훈민정음(혹은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에 우리 조상들은 우리말을 중국 문자인 한자를 빌어 표기했는데(이를 ‘차자표기(借字表記)’라고 한다), 이때 한자의 뜻을 빌어 표기하기도 하고, 한자의 음을 빌어 표기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주격조사 ‘-이’를 표기하기 위하여 ‘이’라는 음을 가지고 있는 ‘伊’라는 문자로 주격조사를 표기하기도 하였고, ‘이’라는 뜻이 있는 ‘是(시)’라는 문자로 주격조사를 표기하기도 하였다. 또한, ‘光明理世(광명이세)’라는 뜻을 가진 신라 시조왕을 ‘赫居世(혁거세)’라 표기하기도 하고 ‘弗矩內(불구내)’라고 표기하기도 했는데, 후자는 한자의 음을 빌어 당시의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고 전자는 같은 말을 조금 다른 식으로 즉, 한자의 뜻을 빌리기도 하고 한자의 음을 빌리기도 하는 방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 글은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던 방식 일부에 대해 일반인이나, 전공은 아니지만 필요로 하는 분들을 위해 약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성되는 것이다.
지금 한글이 없다면
미국에 간 친구와 전자 우편(E-mail)으로 통신하고 싶은데, 미국에 있는 친구가 한글문서 작성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그리고 영어로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친구야, 오늘은 너의 생일인데, 네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선물도 줄 수 없구나.”라는 표현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영어 단어를 빌어 우리말 순서대로 적으면 이 친구가 알아들을 수 있을 테지. “friend, today your birthday, you far away is, present give cannot.” 이런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은 없을까? 영어 알파벳을 빌어서 우리말 발음처럼 적어 보면 어떨까? “Chingu-ya, onul-un neo-ui saengil-indae, nei-ga meoli ddeoleocyeo issuni seonmul-to cul su eopskuna.”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 우선 어휘를 표현하는데 조금 세련되게 할 수 없을까? 우리말의 ‘-도’는 영어를 표현하면 ‘also’가 되는데, ‘seonmul-to’를 ‘seonmul-also’로 표현해 볼까. 혹은 문장 전체를 위의 첫 번째 방식과 두 번째 방식을 적당히 섞어서 표현해 볼까?
다음과 같이 결정하여 전자 우편으로 보내자, “Friend-ya, today-un you-ui(혹은 your) birthday-indae, you-ga far away is-ni present-to give-su no-kuna.” 친구가 답장하기를, “Kurae, thank you-kuna. Soon, meet-gae doigessci.”(그래, 고맙구나. 곧, 만나게 되겠지.) 영어의 단어나 철자를 빌어서 표현하지 않고, 한자를 빌어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차자 표기의 기본 방법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방법은 방법상에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 로마 문자 혹은 영어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차자 표기를 이해하기 위해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할 방법에 대해 이해를 해 보자. 앞에서 예로 들었던 문장의 일부분 즉 ‘친구야, 오늘은 너의 생일인데’를 한자를 빌어 표기하면 어떻게 될까.
‘친구’는 한자 말이니까 ‘親舊’를 쓰도록 하자. ‘야’는 고유어인데 이에 꼭 맞는 한자를 찾기 어려우니까 ‘야’라는 음을 가진 한자 즉 ‘也’를 쓰자. ‘오늘’은 이것의 뜻에 해당하는 ‘今日(금일)’을 쓸 수도 있겠고, 음을 살려서 표기하려면 ‘오’는 ‘烏’로 표기할 수 있을 텐데 ‘늘’의 음을 가진 한자어가 없으니까 비슷한 음을 가진 ‘訥(눌)’로써 표기해 보자. 조사 ‘-은’의 기능을 가진 한자는 없으니까 이것과 비슷한 음을 가진 한자 ‘隱(은)’으로 표기하자. ‘너’는 같은 뜻을 가지고, 음도 비슷한 부분을 가진 한자 ‘汝(여)’로 표기하도록 하자. ‘-의’는 역시 한자의 뜻으로 해결할 수 없으니까 이와 비슷한 음을 가진 ‘矣(의)’로 표기하도록 하자. ‘생일’은 한자 말이니까 ‘生日’을 쓰도록 하고, 지정사 ‘-이-‘는 이와 같은 음을 가진 ‘伊’로 표기할 수도 있겠고, 혹은 뜻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라는 새김(釋)을 가지고 있는 ‘是(시)’로써 표기할 수도 있겠다. ‘ㄴ데’의 ‘ㄴ’은 ‘隱(은)’으로 표기하고, ‘데’라는 음을 가지 한자가 없으니까 (현대의 한자음에서) 비슷한 음을 ‘待(대)’로 표기해 보자.
이렇게 표기한 것을 정리해 보면, ‘親舊也 今日(烏訥)隱 汝矣 生日伊(是)隱待’가 될 것이다. 만약 이것이 고대에 표기된 것이라면, 이것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로 등장하게 될 것인데, ‘親舊, 生日’ 등은 한자음 그대로 읽어도 될 것이고, 한자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也(야), 烏訥(오눌), 隱(은), 矣(의), 伊(이), 待(대)’ 등은 한자의 음으로 읽는 것인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는 상관없이 같거나 비슷한 음만을 빌려온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汝, 今日’ 등을 ‘너, 오늘’로 읽는다면, 그 뜻으로 해독한 것이고 한자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가 살아 있는 것으로 해독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是’를 ‘이’로 해독한다면, ‘是’의 뜻으로 해독했는데 본래의 뜻과는 무관하게 해독한 결과가 될 것이다. 이것이 차자 표기 해독의 기본적인 방법이 될 것인데, 각각 ① 音讀(음독, 한자를 음으로 읽음) ② 音借(音假)(음차, 소리를 빌리는 일) ③ 訓讀(훈독, 한자의 뜻을 새기어 읽음) ④ 訓借(假)(훈차, 차자 표기에서 한자의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일)라고 흔히 이른다.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데, 한자의 의미구조나 음운구조가 우리말과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같은 음을 가진 한자가 많기 때문에, 하나의 음을 표기하기 위해 여러 문자가 사용될 수도 있겠지만, 차자된 각각의 한자 하나하나는 같은 음을 나타내는 기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즉, ‘고’라는 음을 표기하기 위해 ‘古, 告, 故’ 등의 한자를 빌어 사용할 수 있지만, ‘古, 告, 故’ 등의 글자가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면 이것은 다른 음이 아닌 ‘고’를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를 흔히 ‘1字(자) 1音(음)의 원리’라고 한다. 이것은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데, 이것이 문자로써 의사소통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자의 한 글자는 여러 가지로 차자될 수 있고, 또한 한자 한 글자는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한자의 훈을 빌어 표기했을 경우 그 해독자가 어떤 의미로 해독할 것인가 하는 것이 난해한 경우가 흔히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언어(문자언어이든, 음성언어이든)의 기본적인 기능은 의미의 전달이기 때문에 한자의 뜻을 빌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한 후, 다른 해독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 혹은 또 다른 이유 등으로 인해, 뜻을 나타내는 부분을 앞세우고, 그 음을 나타내는 부분을 뒤에 놓은 식으로 표기하는데, 이를 흔히 ‘訓主音從(훈주음종)의 원리’라고 한다.
이 외에 차자표기도 국어의 문장을 표기하기 위한 것이고, 향가는 시가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아직 정확히 그 실체는 알지 못하지만) 고대 국어의 문맥 구조에 맞아야 할 것이고, 고대 시가의 운율 구조에 맞아야 할 것이다. 전자를 ‘맥락일치의 기준’이라 하고, 후자를 ‘율조적 기준’라고 한다.
마무리
우리말의 구조와 전혀 다른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자를 사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제약과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단어 문자이면서 뜻글자인 한자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하게 된다. 즉 음절 문자로 변용하기도 하고 음소 문자로 변용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음소 문자로 변용하여 사용하는 것은 한국어의 음절을 3분하여 인식하는 것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다양한 방식의 변용은 후에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도 우리 민족이 그 이전에 해 오던 문자 생활에서 음절 구분이라는 언어 인식의 암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박창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어학을 연구하고 교육하고 있으며,
한국어세계화재단 운영이사, 국립국어원 어문규범연구부장을 지냈다.
〈훈민정음〉, 〈중세국어자음연구〉 등 100편 내외의 연구업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