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인천이 진짜지.”
흐리고 비가 간혹 뿌리는 동인천역에 도착한 필자에게 친구가 한 말이다. 인천은 서울과 가까운 항구도시라는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일찍부터 서양 문물이 들어온 도시다. 그 역사는 어찌 보면 침탈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지만, 문화적으론 한두 용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다양한 흔적을 도시 곳곳에 남기며 지금까지 흘러 왔다.
신포동, 송월동, 송학동, 동인천동 등. 주변 전철역으로 따지면 신포-인천-동인천역을 잇는 해안 쪽으로 완만하게 돌출된 일대를 일컬어 인천 원도심이라 한다. 이 ‘원도심’은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개념은 아니며 1880년대 개항 이후 형성된 근대적 도시라는 의미의 원도심이다. 송도 등 최근 인천에서 떠오르는 곳은 ‘원도심’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덕분에 원도심은 시간이 완벽하게 멈춘 듯 고즈넉한 모습으로 남았다.
동인천역에 내려 길을 건너자마자 맥도날드 매장의 ‘맥도날드’ 한글 로고타입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로고타입은 상표 한글화 바람이 쇠퇴한 1990년대 후반 이후 맥도날드 매장 간판에 거의 쓰이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만난 것이다. 인천 원도심은 마치 필자를 위한 완벽한 세트장의 느낌을 풍겼고 딛고 선, 숨쉬는 땅, 보는 사물 대부분이 살아 있는 박물관의 전시물 같았다. 다른 곳도 아닌 패스트푸드점이 그 사실을 한 번 더 각인시켜 주었다.
근대사의 중심에서
동구 화수동에 위치한 화도진공원은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아 옛 화도진 자리에 조성한 공원이다. 화도진은 초지진, 덕진진처럼 진(鎭)으로 끝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후기 조선의 서해안 방어를 책임졌던 군사 시설이다. 조선과 미국의 첫 접촉은 1871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흥 열강으로 떠오른 미군은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으나,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식민지로서 조선의 가격 대 성능비(?)가 맞지 않아 힘에 의한 강제 개항을 포기하고 그냥 돌아갔다.
10여 년이 흐른 1882년 양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정식 외교 관계를 맺게 된다. 그 통상조약의 조인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한반도의 국가가 서구 열강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다. 1982년 비를 세웠고 1988년 12월 남아 있던 화도진도를 바탕으로 원래 화도진을 완전 복원했다. 현재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공원 진입로를 따라 5분쯤 걸으면 전각들이 나온다. 화도진의 사랑채, 안채, 동헌을 비롯한 여러 전각을 복원했고 한쪽 구석에는 전시관을 만들어 조선군의 의복과 무기류를 전시해 두었다. 야외 전시장도 있어 화도진에 방열됐을 옛 조선군 화포를 살필 수 있다.
마당 한쪽 구석에는 복원된 측간이 있다. 당연히 복원 시설인 만큼 실제로 쓸 수는 없다. 문 앞에도 그것을 알리는 손글씨 안내문이 붙어 있는데 왠지 1988년 복원 시에 제작한 그대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문장의 끝이 ‘-읍니다’로 끝나기 때문이다. 당시 표준 맞춤법이었던 ‘-읍니다’는 1989년 맞춤법 개정으로 ‘-습니다’로 바뀐 바 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언어 습관이 남은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옛 맞춤법을 쓸 수 있긴 하지만, 정석대로 생각하면 그렇다는 뜻이다. 약 20분 정도면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는 이곳은 전체 공원 면적이 크지 않고 나름 역사성도 있어 추천할 만한 산책 코스다.
화도진공원이 ‘국방’을 매개로 양 측이 만났던 초창기라면 자유공원은 그 하이라이트라 해야 할까. 근처에서 가장 높은 응봉산 정상에 위치한 자유공원은 조성 연대가 서울 파고다공원보다 앞선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1888년 11월 조성되어 만국공원, 서공원 등으로 바뀌어 불리던 이름이 자유공원으로 바뀐 것은 1957년 10월. 인천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진 후다. 인천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어 세계 전사에 남을 인천상륙작전(1950)의 무대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국군과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 연합군은 조선인민군이 경상도 방면의 고착된 전선에 집중하는 틈을 타 인천에 기습 상륙을 감행하여 인민군의 허리를 후려치고 서울 탈환의 결정적 전기를 만든 바 있다. 건재한 상태로 공원을 굽어 보는 맥아더 동상 외에도 공원 곳곳에 위치한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과 자연보호헌장탑, 충혼탑 등 한국의 근현대를 관통했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아래 새겨진 100주년 심볼과 한글 로고타입은 희성산업(현 HS애드) 제작팀에서 디자인했다. 2층 높이의 석정루에 오르면 인천항과 북성포구 등의 시가지 경관이 한 눈에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 봄의 절정인 4월엔 벚꽃축제도 열린다고 하는데 시기가 맞지 않아 아쉽게 되었다.
비바람에 가까운 바람을 맞으며 자유공원을 내려와 인천 앞바다 쪽으로 향한다. 경사가 제법 급한 비탈길이지만 계단 하나도 그냥 넘어갈 것이 없다. ‘무심코’ 걸어 내려온 자유공원 아래쪽 계단이 독자적 근대유산인 청일조계지계단과 각국조계지계단일지 모른다. 조계지(租界地)란 방한한 외국인들이 조선-대한제국의 법 적용을 받지 않는 지역 즉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던 특정 구역을 말한다.
불평등 조약의 결과인 이 조계지는 외국인이 개항장 업무를 위해 드나들 일이 많았던 항구 도시 주변에 주로 발달해 있다. 인천 지역 조계지는 크게 청일조계지와 나머지 열강에 해당하는 각국조계지로 나눠진다. 가까운 열강인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놓고 직접 대립하고 나머지 열강들이 얻을 것 없나 호시탐탐 노리던 구한말 한반도의 세력 지형도가 한눈에 보인다.
청·일 양국 조계지를 구분하는, 응봉산 정상으로 향하는 청일조계지 경계 계단은 1880년대 말에서 1890년대 초에 형성됐다고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경계선 목적을 명확히 갖고 만들어진 시설은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양국 조계지 영역이 확장되면서 일종의 경계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영향은 오늘날에도 남아, 청국 조계지 쪽에는 차이나타운이 형성됐고 일본 조계지 방면에는 일본이 세운 각종 근대 건물이 많다. 청일조계지 우측 각국조계지에는 이를 관통하는 각국조계지계단도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천천히 걸어볼 만하다.
근현대 건축물 속으로
근처에는 제물포구락부와 ‘인천시민애(愛)집’이라는 공간이 있다. 구락부는 영단어 클럽(club)을 한자로 음차한 일본식 단어다. 클럽이라는 이름처럼 1880년대부터 1910년대 초반의 개항기 인천에 거주하던 각 외국인들의 친목을 위한 사교장 목적으로 지어졌다. 아담한 규모의 2층 벽돌 건물이지만 언덕을 끼고 있어 실제보다 커 보인다. 1910년 한국이 완전히 일본 식민지로 변하고 조계지도 철폐된 후 일본인을 위한 회관이 되었고 광복 후엔 미군이 썼으며 1953부터 2006년까지 인천시립박물관·인천문화원으로 쓰이다가 제물포구락부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했다.
현재 제물포구락부 1층은 전시장 및 영상 감상실로 쓰이며, 2층은 개항기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공간이다. 외국인을 위한 사교 클럽이 이제 내국인을 위한 사교의 장으로 자리잡은 셈이다. 이 근처 건물의 내력을 알아보면 주인과 용도가 무수히 바뀌어 온 건물이 한둘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각 열강, 일본, 미국 순으로 한반도에 영향을 미친 외세의 순서대로인 경우가 많다.
과거 일본인 사업가의 저택 부지이기도 했던 인천시민애집은 1967년부터 2001년까지 인천시장 관사로 쓰였다. 17명의 인천시장이 이곳을 거쳐 갔다. 2001년부터는 인천시 역사자료관으로 쓰이다가 2021년 7월 일반에 개방했다. 시민애집이란 이름은 투표를 거쳐 정해진 것으로 현판의 판본체가 눈에 띈다. 인천시민애집 권역은 크게 ‘1883 모던하우스’라 이름 붙은 한옥 본관과 야외시설(정원·마당·역사전망대)로 구분된다.
본관 내부에 전시된 어린이 사생대회 수상작을 구경하는데 조금씩 날리던 빗방울이 소나기로 변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준비하지 않은 필자는 잠시 창가에 앉아 쏟아지는 빗속에서 인천항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저녁 시간과 맞물려 검푸르게 변한 하늘 아래 켜진 시가지의 조명이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든다. 마당 한 쪽에 ‘역사담벼락’이라 이름 붙은 벽이 있다. 이 벽에 경기도 서체 [경기천년바탕]으로 쓰인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다’ 문구가 인상 깊다. 인천 원도심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면 이보다 적절한 말이 있을까.
해안 쪽으로 조금 더 걸어 내려오면 인천 중구청사가 있다. 그런데 이곳도 흔한 관공서 건물이 아니라 국가등록문화재다. 고전 느낌을 풍기는 황색 타일이 인상적인 중구청사는 1933년 기존에 있던 인천이사청을 허물고 2층 규모의 인천부 청사로 처음 지어졌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원도심의 중심지에 자리잡은 근대 모더니즘 양식의 인천부 청사는 행정구역의 변화에 따라 인천시 청사, 직할시 승격에 따라 인천직할시 청사로 바뀌었고 청사가 면적과 노후화 문제로 1985년 말 구월동으로 신축 이전할 때까지 인천을 총괄하는 관청으로 쓰였다.
안정된 수평형 디자인 가운데 중앙에 늘어선 4개의 수직 기둥이 관공서로서의 권위를 강조한다. 비슷한 건축적 장치를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의 정부서울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후 1960~1970년대를 지나면서 3층을 증축하고 공간 부족으로 양쪽에 별관도 만들어 현재 모습이 되었다.
실제 사무실로 쓰이는 건물이라 내부 탐방을 할 수 없는 점이 유일한 아쉬움이지만 한편으론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현 시대 살아 숨쉬는 실사용 건축물이란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청사 앞에는 역사성을 살린 일본풍거리가 조성되어 관광객을 맞는다. 거리의 가게만 둘러봐도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일본풍을 재현한 목조 주택 건물 사이로 늘어선 조명들이 별처럼 반짝이며 푸른 밤하늘과 멋진 조화를 이룬다.
원형이 보존된 근현대 건축물이 걸어서 10여 분 되는 거리 안에 포진해 있어 어디부터 봐야 할지 헷갈릴 지경이다.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건축물 몇 개를 소개한다. 우선 근대건축전시관이 있다. 개항기 일본 제18국립은행 인천지점으로 쓰였던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은 인천 원도심의 건축을 좋아하는 건축·역사학도라면 관심을 가질 만한 곳이다. 크지 않은 건물에 존재하거나 소실된 인천 지역 주요 근대건축물을 상세한 모형과 함께 밀도 높게 전시해 두었다. 전시관 자체가 이미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근대건축물이기도 한 이곳은 은행으로 사용될 당시의 지붕과 금고가 남아 있다.
옛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으로 쓰였던 인천개항박물관은 중앙에 돔을 둔 후기 르네상스식 석조건축물이다. 대한제국 광무 3년(1899)에 일본 건축가 니이노미 다카마사가 설계했다. 구 서울역이나 경성우체국과 비슷한 양식으로 우리에게 은근히 익숙한 모습이나, 그 크기가 생각보다 작아 아담한 느낌을 준다.
1911년 조선은행 인천지점으로 바뀌었으며 정문 위에 ‘조선은행’ 한자가 새겨져 있다. 1950년부터는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는 등 여러 용도로 활용되다가 2010년 개항박물관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4개의 상설전시실에 인천항을 통해 유입된 근대문물을 전시해 놓아 항구도시 인천에서 외국와의 무역을 전면 개방한 ‘개항’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새겨볼 수 있다.
1888년 건립되어 국내 건립 연도 확인이 가능한 근대 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은 개항 이후 인천 해운업을 독점한 일본우선(郵船)주식회사의 인천 방면 본부로 세워진 건물이다. 종교 시설도 관공서도 아닌 순수 민간 건물이 1세기 넘어 존속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현 미쓰비시그룹의 모태가 된 이 회사는 조선에서 원재료를 사들여 주변 각국에 판매하는 등의 중개 무역·우편·운송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업체였다. 사업 전개 혹은 수탈을 위해 한반도에서 나가는 주요 항구인 인천 앞바다에 그 첨병을 심어 놓은 셈이다. 군과 민간이 분리되지 않은 병영 국가 일본 제국의 회사 답게 1904년 러일전쟁 당시에는 이 건물을 일본군이 사용했다고도 전해진다.
소유주가 숱하게 바뀐 끝에 2004년 인천광역시에 매입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내부를 자유롭게 관람할 수 없는 점은 아쉽지만 붉은 벽돌 외벽이 황색 타일로 덮인 것 외에는 원본에서 크게 훼손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지금은 고깃집으로 바뀐 구 제일은행 인천지점은 한국 건축가 1세대 나상진(1923~1973)이 설계했다. 김수근이나 김중업 같은 유학파 건축가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울 광진구에 있었던 서울컨트리클럽 클럽하우스(어린이대공원 꿈마루) 같은 의미 있는 건축을 많이 남겼다.
위에서 보면 양끝이 잘린 타원형의 입면이 중심인 이 건축물은 애초 지상 6층으로 설계됐지만 2층에서 끝났다. 전면 전체를 커튼처럼 덮은 수직성 강한 PC패널이 6층까지 뻗었다면 더욱 확고한 수직 흐름을 보였겠지만 높이가 낮아 오히려 일렬로 늘어선 수평성이 강조되는 듯하다.
원래는 1층까지 패널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창문을 내기 위해 점차 철거되어 현재 모습이 되었다. 외부는 그렇다 쳐도 내부의 원형 보존은 용도가 완전히 바뀌어 기대할 수 없는 상태로 여겨진다. 존재 가치를 완전히 잃어 철거되지 않은 점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한동안 스포츠용품점으로 쓰이는 등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여러 부착물로 수난을 겪었던 건축가 김중업의 서산부인과병원 건물이 생각난다. 원형 복원은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건축·디자인 계통 업체에서 인수해 사무실로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신포사거리 한편을 지키고 선 구 인천우체국(인천 유형문화재 8호)은 일제강점기 건물의 전반적인 크기를 생각하면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하는 근대 우편 문화재다. 통신이 발달한 항구 도시에 통신이 주요 역할인 대형 우체국은 당연한 조합. 가각부에 주출입구를 내고 대지를 따라 양쪽으로 넓게 벌린 모습으로 실제보다 커 보인다. 사각형으로 따로 돌출시킨 입구 위에 새겨진 ‘인천우체국’ 다섯 글자가 고풍스럽다. 1923년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계의 설계 하에 지어졌고 1949년 인천우체국’으로 개칭했다.
2019년 5월 안전 문제와 문화재 훼손 우려로 폐쇄된 이후 용도를 잃고 반 방치 중인 것으로 보인다. 뉴스에 따르면 우정박물관으로 단장할 계획이 있다고 하는데 원만히 진행되어 더 많은 이들이 다녀가면 좋겠다. 구 인천우체국 청사와 도로를 사이에 둔 맞은편 선광미술관 건물도 같이 둘러보면 좋다. 동시기 보기 어려운 4층 건물로 지어졌고 최상층이 열 십자(十)로 되어 있어 특기할 만하다.
개항기 대신 개발 시기 건축물도 많다. 그중 하나인 화도진공원 근처의 화수아파트는 푸르게 녹슨 청동 빛깔 비슷한 연녹색 외벽으로 마치 홍콩 구룡성채 같은 분위기를 발산한다. 아파트 외벽에 세로로 쓰인 ‘화수아파트’ 글자가 수수하고 정석적인 둥근 고딕 모양으로 건물을 말해준다. 원활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이 차라리 SF 영화의 세트장 비슷하게 보인다.
콘크리트로 된 욕조처럼 돌출된 발코니는 한국 아파트 도입 초기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1970년대 초반의 주공아파트와 비슷하다. 그러나 알려진 건축 연대인 1979년 기준으로는 디자인이 조금 뒤처진 감이 있다. 예를 들어 같은 해 준공된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이미 돌출형 발코니가 아닌 매립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구조는 경사진 대지에 판상형으로 지어졌고 1층에 상가를 둔 4층 주상복합형이다. 바로 뒤에 붙은 연립주택과 간격이 거의 없어 마치 한 쌍의 대형 건물처럼 보인다. 평균 체격의 사람 세 명이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동시에 지나가기 힘들 정도다. 재건축 소식이 구체적으로 들리는 것은 아니나, 항상 그렇듯 ‘도시’는 우리에게 그런 것을 미리 말해주지 않기에 건물의 면면을 살피고 싶다면 코스에 우선적으로 넣는 것이 어떨까.
해안 쪽으로 가다가 거꾸로 올라가면 인천역사에 이른다. 1899년 개통된 인천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과 수인선의 종착역이자 수도권 전철에서 가장 오래된 역이다. 도시 이름을 그대로 쓰는 역답게 서울역처럼 상당한 규모로 재건축된 최신식 역사를 연상하기 쉽지만 2층 규모의 자그마한 역사를 갖고 있다.
2~3층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과 역전에 형성된 광장은 1990년대 이전 도심 전철역의 공간 구성 그대로다. 재건축 전 영등포·청량리역을 기억한다면 시계탑만 없을 뿐 익숙한 모습. 말쑥한 흰색 역사는 고전의 느낌을 풍기는데 ‘생각보다’ 최근인 1960년 건립된 건물이다.
도시를 돌아보며 느낀 여담 한 가지는 독특한 창살 무늬가 많다는 것이다. 오래된 시가지라면 창살이 많을 수밖에 없겠지만 이곳에는 그런 유산들이 특히 눈에 띈다. 근대 문화유산뿐 아니라 좀 오래된 주택에도 독특한 무늬를 이루는 창살이나 담장 철창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어찌 보면 이는 ‘타이포그래피’와 무관하지 않다. 창살과 철창이 이루는 각양각색 패턴에서 화려한 패턴으로 여백을 채운 장식 타이포그래피가 겹쳐 보인다. 근대 건축물 사이에 끼어 있었던 오래된 건물의 타일 무늬도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시각 유산이다. 건축물의 선과 장식 모두에서 서체의 획 전개를 위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글자를 직접 보고 얻는 영감보다 때로는 이런 경험이 창작에 더 효과적이다.
시간 저편에 남겨진 장소
“아저씨 뭐 좀 물어볼게요. 여기 양키시장이 어딘지 알아요?”
“저도 타지에서 와서..”
“그래요? 사진 찍고 하길래 뭐 좀 아는지 알았지. 이쪽이 원래 다 양키시장이었는데.. 다 닫고 수선집밖에 안 남았네.”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라져 간다. 동인천역 4번 출구로 나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만날 수 있는 인천중앙시장은 1970년대 동인천 주변이 손꼽히는 번화가였을 때 번성한 곳이다. 빛바랜 색색깔의 3층 규모 건물이 줄지어 블록을 형성하고 있다. 전성기에는 400여 점포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슬럼가에 가까운 모습으로 입구를 제외하면 인적은 뜸했다. 각 건물 1층을 빼면 거의 쓰이지 않고 있다. 현재 주요 점포는 한복, 혼수용 이불, 수선 등 의류 관련 점포가 대부분이다.
이런 곳에는 으레 청년가게가 자리잡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흔적을 제대로 찾긴 어려웠다. 대신 어떠한 가공도 없이 1970년대 모습 그대로 남은 간판들이 필자를 맞아 주었다. 어떤 의미에선 거대한 세트장 같았다. 미군 관련 중고 물품을 취급하는 양키시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두세 곳이 명맥만 잇는 수준. 대부분 문을 닫았다. 먹거리가 중심이 된 타 지역 ‘중앙시장’의 역할은 근처 신포국제시장이 잇고 있었다. 대표 먹거리로 닭강정이 유명하다.
“저기···.”
“찍어. 예전에 대학생들도 한 번 왔다 갔어.”
“뭐 하는 사람들인데요?”
“영화 한다던가? 여기 와서 이것도 찍어. 이거 다 40년 이상 된 것들이야.”
동인천역 2번 혹은 3번 출구에서 길을 건너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면 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는 소위 ‘동인천 전자상가’로 불리는 곳이 보인다. 전자기기 취급 가게가 역 근처로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됐다고 한다. 전자상가로 불리지만 세운상가나 용산전자상가 같은 대규모는 아니고 전자기기 관련 소규모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작은 골목에 가깝다.
30~40년 된 옛 간판들이 비록 세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손상은 있어도 늘어선 간판들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모습은 놀랍다. 건물의 노후도나 밀집된 형태가 어쩐지 청계천 헌책방거리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건물 중 하나는 일제강점기 양조장 건물을 그대로 활용한 것. 역사가 지층처럼 겹겹이 퇴적된 현장이다. 셔터를 내린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군데군데 문을 연 곳도 있었다. 카오디오를 전문으로 하는 한 가게 앞에 아저씨가 바닥을 쓸고 있다.
‘우리농산’, ‘정원다방’ 간판 글자 해석과 파생
동인천역 부근 화평동 길가에 위치한 ‘우리농산’, ‘정원다방’ 간판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완전히 다른 가게지만 사실상 같은 서체로 되어 있다. 특정 지역 가게에 비슷한 서체가 쓰이는 경우는 서울 을지로나 만리동, 그 외 다수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마 제작자가 같았을 이 간판의 서체는 붓으로 쓴 모양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기존 간판에서 쉽게 보기 힘든 독특한 요소를 지닌다. 전체적인 외곽선이 마치 해안선에 치는 파도처럼 너울거린다. ’정원다방’ 중 ‘다방’은 기본형에서 맺음을 좀 더 두껍게 다듬은 모습이다. ‘다방’을 제외한 간판 글자의 주요 DNA를 살펴보자.
❶ 엑스트라볼드(ExtraBold), 헤비(Heavy) 정도로 분류할 수 있는 두꺼운 붓글씨 형태다.
❷ 온자가 가로로 넓은 평체에 가깝다. 처음부터 넓게 그리기보다 약간 눌린 듯한 모습이다.
❸ 세로 기둥이 삼각형 모양으로 시작한다. 우측 외곽선이 오른쪽으로 더욱 빠졌다가 다시 급격하게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향하면서 내려간다.
❹ ‘산’의 시옷[ㅅ], ‘정’의 지읒[ㅈ]에서 보이듯 빗침의 마감이 넓적한 도구로 쓴 것처럼 평평하다.
❺ ‘산’의 종성 니은[ㄴ]이 왼쪽으로 뻗었다가 급격한 예각을 이루며 아래쪽으로 향한다. 가로획은 평평하다. ‘원’의 종성 ㄴ처럼 섞임모임꼴이 되는 경우에는 흘림 표현 없이 일반적인 ㄴ에 가깝지만 바깥쪽 외곽선 모티프는 살아있다.
❻ ‘산’에서 중성 ㅏ와 종성 ㄴ은 사선을 이루며 결합한다. ‘정’의 중성 ㅓ와 종성 이응[ㅇ]도 유사한 사선 리듬을 지닌다.
❼ ‘우’와 ‘원’의 초성 ㅇ은 획 맺음이 왼쪽 방향으로 끝나는데, 대부분 자소가 갖는 오른쪽 방향에 배치된다. 맺음의 형태 역시 날카롭지 않고 둥글다.
❽ 세로기둥 맺음은 특정한 방향으로의 흘림이 거의 없고 평이하다.
❾ ‘우’, ‘정’, ‘원’의 ㅇ을 보면 바깥쪽 외곽선은 복잡하나 안쪽 외곽선은 정원에 가깝다.
❿ ‘정’, ‘원’을 보면 획과 획이 겹칠 경우 떨어뜨리기보다 그대로 뭉치게 두는 쪽을 택했다.
⓫ 가로보는 일반적인 명조체와 달리 돌출부가 전부 아래쪽에 형성되어 있다.
DNA를 분석했다면 한글 파생 원리에 의해 다른 낱자도 만들 수 있다.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원본 글자를 정제하고 ‘글자발견/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다’라는 문자열을 파생해 보았다. 글자폭은 온자 간 너비 차이가 없는 고정폭, 각 980유닛(unit)으로 설정했다.
이번에는 원본의 획과 맺음을 그대로 살리기 보다 특징을 몇 개의 유형으로 분류하고 이를 허용 가능한 선에서 과장해서 디스플레이 용도(유튜브 섬네일 등)에 단문으로 쓰일 수 있는, 만화적으로 느껴질 만큼 화려하게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불분명한 자유곡선은 없애고, 원과 곡선·직선을 명쾌하게 다듬었다. 대표적 온자의 정제 방법을 설명한다.
▷ [우]
초성 ㅇ은 마름모꼴에 가까운 바깥쪽 원을 타원형으로 바꿨다. 왼쪽을 향하는 상단의 맺음 방향은 다른 자소에 맞춰 오른쪽으로 바꾸고 모양도 삼각형 모티프에 맞춰 날카롭게 만들었다. 자유곡선의 집합에 가까웠던 기존 가로보에는 각을 부여하고 끝부분을 위쪽으로 치켜 올라가도록 마무리하여 처져 보이지 않도록 했다. 명조 등 붓에서 파생된 서체는 가로보 왼쪽과 오른쪽의 무게가 같으면 오른쪽으로 처져 보이기 쉽다. 뭉툭하게 끝났던 ㅜ의 세로획은 오른쪽으로 치켜 올라가도록 마무리하여 다른 자소와 보조를 맞추었다.
▷ [리]
자유곡선들의 집합에 가까웠던 초성 리을[ㄹ]을 명쾌한 곡선과 각의 조합으로 다듬었다. 가로획 3개의 전체적인 흐름은 맨 위쪽 가로획은 평평하게, 아래로 갈수록 오른쪽으로 큰 각도를 이루며 상승하도록 했다. 이는 DNA 분석 ❻에 드러난 사선 흐름을 따른 것이다.
초성 ㄹ과 중성 ㅣ가 결합되는 부분은 다른 자소의 분위기에 맞춰 안쪽으로 깎아서 너무 무거워지는 것을 막았다. 이 서체의 주요 부분인 중성 세로기둥 ㅣ는 오른쪽 돌출부를 날카롭게 다듬고, 불규칙한 자유곡선에 가까웠던 원본을 곡선+호+직선의 조합으로 느껴지도록 명확하게 표현했다.
▷ [산]
초성 시옷[ㅅ]의 전체적인 획을 세로 기둥의 두께에 맞춰 두껍게 만들었다. 원본의 ㅅ은 시작 부분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하지만 여기서는 오른쪽에서 시작해 꺾어져 내려가도록 바꾸었다. 이로써 세로 기둥과 방향을 일치시켰다. 자소 방향이 다르면 온자가 시각적으로 하나로 뭉쳐지지 않고 응집력이 약해질 수 있다.
종성 ㄴ은 원본의 독특한 진행을 대부분 따르되 평이했던 맺음을 가로보 느낌에 맞춰 위쪽으로 치켜 올라가도록 바꾸었다. ㅅ의 오른쪽 빗침과 중성과 종성이 연결되는 부분은 통으로 연결될 시 자칫 지루하거나 무거워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안쪽으로 깎은 후 연결시켰다.
▷ [정]
초성 지읒[ㅈ]의 꺾이는 부분에 원본에는 없지만 오른쪽으로 확 뻗는 돌출부를 넣어 분위기를 맞추었다. 빗침 맺음은 ㅅ와 같은 방향으로 처리하였다. 바깥쪽 외곽선이 마름모꼴에 가까운 종성 ㅇ은 타원형으로 바꾸되 윗부분만 중성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사선으로 변형했다. 원본은 바깥쪽·안쪽 곡선이 따로 놀았지만 여기서는 같은 속성을 갖도록 했다. 안쪽 원의 윗부분에 각을 추가해 넓은 붓으로 원을 그린 듯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다른 온자들 역시 두께 변화가 심한 편이라 이 정도의 변형은 무리 없다고 판단했다.
▷ [원]
섞임모임꼴은 그 밀도상 더욱 세심한 처리를 요한다. 일단 온자 전체의 방향과 맞지 않는 초성 ㅇ의 왼쪽 방향 맺음을 ‘우’의 ㅇ과 같이 오른쪽으로 돌리고 날카로운 각을 추가해 분위기를 맞춰 준다. ㅝ의 이음보는 원본에서는 이어져 있지만 여기서는 지나치게 두꺼워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중성과 분리했다.
원본을 보면 ㅜ와 종성 ㄴ이 마치 자동차의 오프셋 충돌 테스트처럼 비스듬히 결합한다. 이를 개선하면서 종성 ㄴ의 오른쪽 방향 돌출부를 강화함으로써 거의 위아래로 일직선으로 결합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획을 합치면 자소 간 구분이 어려워지므로 분리시켰다. 이때 중성 ㅜ가 가진 오른쪽 돌출부와 종성 ㄴ이 가진 오른쪽 돌출부가 결합되어 오른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제 복잡하거나 세로 기둥과 만나지 않는 ㄴ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견본이 생겼다. 이는 ‘은’의 ㄴ에 적용할 수 있다.
방향을 정하고 원본을 정제했다면 이 견본을 바탕으로 원하는 글자를 파생해 나가면 된다.
대표적 온자의 파생 방법을 설명한다.
▷ [천]
초성 치읓[ㅊ]은 ㅈ의 형태를 활용하되 꼭지가 들어갈 자리를 만들기 위해 높이와 크기를 낮춰 준다. 꼭지를 세우면 자소 전체가 두꺼워질 위험이 있으므로 눕혀서 분리시킨다. 형태는 필획을 따라 자연스럽게 하강하는 형태로 만들어 준다. 맺음은 날카롭게 만드는 대신 투박하게 끊었다. 이는 도구를 눌렀다 떼는 느낌으로 만든 것이다.
▷ [심]
‘시’ 부분은 만들어둔 ‘산’을 활용하되 기둥 위치는 가로 곁줄기 없는 온자와 맞춰 준다. 종성 미음[ㅁ]은 원본에 없으므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 종성 ㄴ의 모티프를 활용하되, 한 번에 뻗는 ㄴ과 달리 단계적으로 분절되어야 하므로 안쪽 외곽선에 각을 준다. 오른쪽 상단은 기역[ㄱ]의 개념을 활용해서 붙이면 된다. 왼쪽 상단의 시작 부분에 날카롭게 날리는 듯한 디테일을 추가해 다른 자소와 통일성을 부여했다.
▷ [역]
초성 ㅇ은 ‘인’을 활용해 만들되 안에 중성이 들어갈 공간이 필요하므로 살짝 왼쪽으로 움직여 준다. 중성 곁줄기 두 개는 둘 다 붙거나 떨어지면 어색해질 수 있으므로 위쪽은 떼고 아래쪽 곁줄기는 붙여 준다. 앞에 오는 초성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로, ‘견’의 경우 반대로 보통 위쪽은 붙이고 아래쪽은 떼어 준다.
물론 일반론이므로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법칙은 아니다. 종성 ㄱ은 평이하게 만들되 세로 기둥 맺음을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꺾어 준다. 이미 온자 내에 오른쪽으로 뻗는 모티프가 두 개나 있어 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쓰기 습관으로도 왼쪽으로 꺾어 마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대]
초성 디귿[ㄷ]은 원본에 없으므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 위쪽 가로획은 가로보를 줄여 만들었다. 나머지 부분은 일반적인 ㄷ처럼 세로 기둥으로 가면 평이해질 것 같아, 원본 간판 ‘농’의 초성 ㄴ에서 따오되 불규칙한 자유곡선을 깔끔하게 다듬었다. 중성 ㅐ 왼쪽 기둥의 윗부분 돌기를 오른쪽과 같은 크기로 하면 공간이 비효율적이므로 오른쪽 돌기보다 축소시켜 표현했다. 온자 안에서의 특징은 외곽으로 나갈수록 강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 [발]
초성 비읍[ㅂ], 종성 ㄹ 모두 원본에 없으므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 먼저 ㅂ의 경우 디테일을 과도하게 잡기보다는 일반적인 ㅂ의 획순을 따르면서 부분적인 특징을 주었다. 오른쪽 세로기둥의 경우 그대로 합쳐지면 뭉쳐 보일 수 있어 안쪽을 깎아 표현했다. ㄹ은 종성 ㄱ과 ㄴ의 특징을 결합하되 두 자소보다 디자인을 간소화했다.
밀도가 많은 자소나 온자는 하나하나 전부 복잡하게 표현하기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맞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디테일은 어디까지나 온자의 특징을 더해주는 것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중성 ㅏ 세로기둥의 밑부분은 이미 온자 자체가 충분히 복잡하기에 돌기를 제거했다. 이로써 덜 복잡한 온자에는 돌기를 넣고 복잡한 온자에선 삭제한다는 규칙이 생겼다.
글에서 설명 혹은 제시되지 않은 글자라도, 이유를 추측하거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석·응용한다면 좋은 서체를 만들 수 있다. 원본 곳곳에 숨은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해석하여 확대 적용하는가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파생 방향을 필자와 반대로 평이하게 잡거나, 삼각형 모티프 대신 다른 도형을 응용해 만들었다면 또 다른 분위기의 서체가 나왔을 것이다. 각 디자이너의 성향에 맞는 개성적 드로잉을 기대한다.
많은 사람들이 만나는 곳에는 전문점이 번성하기 마련이다. 맞춤 양복점도 그런 직종 중 하나다. 한때 동인천 애관극장 일대엔 수십 개의 맞춤 양복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양복 하면 동인천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기성복이 대세가 되면서 많은 장인들이 일을 접고 소수의 가게만 남아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맞춤’의 가치를 아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옛 양복점 거리를 걷다가 서울양복점, 제왕양복점, 신라라사 간판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제왕양복점 간판은 맹금류를 형상화한 듯한 심벌과 한자·한글의 조합이 눈길을 끈다. 중앙의 로만 알파벳과 숫자까지 개업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어 배제할 요소가 없다. 수십 년간 종사한 테일러의 자부심을 표현하기에 매끈한 디지털 폰트 간판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손님의 체형과 신체 사이즈를 면밀히 분석하여 패턴을 그리고 최선의 핏을 이끌어 내는 테일러들이 어쩐지 커스텀 폰트를 만드는 디자이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관련 산업이 쇠퇴기에 있다고 하지만 한 ‘분야’라는 것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인쇄 매체의 효용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시대가 와도 책의 물성을 아끼는 사람들에 의해 인쇄물은 이어질 것이다.
디지털 대비 장점이 거의 없는 필름 사진도 오히려 촬영과 공유가 활발해지는 양상이고, 범용성과 가격에서 볼펜의 상대가 될 수 없는 만년필은 고유의 특성으로 확고한 마니아층을 유지하고 있다. 후배 테일러 양성만 잘 이루어진다면 양복점 역시 그럴 것이다. 이처럼 관점에 따라 다양한 감상을 건져 올릴 수 있는 인천 원도심. 역사적, 시각적, 무엇으로 보나 ‘진짜’가 가득한 장소다.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산돌을 거쳐 ㈜티랩에서 근무했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 등에 글을 기고했으며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 온라인 플랫폼 클래스101, 이도타입에서 서체 디자인을 가르쳤다.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donghoonha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