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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훈의 글자발견 #8 춘천에선 과거와 현재가 평행으로 흐른다

    ‘올드 앤 뉴’ 춘천


    글·사진. 한동훈

    발행일. 2022년 10월 27일

    한동훈의 글자발견 #8 춘천에선 과거와 현재가 평행으로 흐른다

    싱어송라이터 김현철은 서정적인 분위기의 1집 수록곡 「춘천 가는 기차」(1989)로 춘천 하면 떠오르는 가수로 새롭게 부상했다. 그는 재수생 시절인 1988년 애인과 함께 경춘선을 타고 떠난 여행을 곡의 소재로 삼았다. 아마 수많은 연인과 친구 들이 혹은 나홀로 여행객들이 이를 따라 ‘워크맨’에, ‘마이마이’에 담긴 테이프 속 노래를 들으며 춘천으로 떠났을 것이다.

    김현철은 경춘선을 타긴 탔지만 완행열차의 속도와 노선에 지쳤는지 강촌역에서 내렸으니 가수 본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실제로는 ‘강촌 가는 기차’에 가깝다. 복선화 전 경춘선은 선형이 매우 구불구불한 느린 열차였다. 그래도 열차의 최종 목적지가 춘천이었으니 틀린 제목은 아닌 셈이다.

    춘천은 강릉, 원주와 함께 명실상부한 강원도의 중심 도시 중 하나다. 춘천을 일컬어 호숫가를 뜻하는 호반(湖畔)의 도시라고들 한다. 이는 도시 전체에 걸쳐 강과 호수, 산이 조화를 이룬 것에서 비롯되었다. 잘 정비된 자전거 도로와 주변 경관으로 인해 ‘자전거’ 하면 떠오르는 도시이기도 하다. 비록 동호인들이 타는 고성능 모델은 아니지만 춘천역에서 자전거를 빌려 몰아 보니 물을 따라 잘 정비된 자전거 도로가 편리했다.

    1박 2일 춘천 여행을 함께해준 자전거

    소양강스카이워크를 지나 춘천중앙시장으로

    2016년 개장한 소양강스카이워크는 소양2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보행교다. 물론 통행 목적이 아닌 만큼 교량은 중간에서 끝난다. 스카이워크(skywalk)라는 이름 그대로 다리 바닥에 투명 강화유리를 깔아 드넓은 소양강 위를 걷는 느낌을 내도록 만들었다. 입장료가 있지만 동시에 춘천에서 쓸 수 있는 동일 금액의 지역상품권을 준다. 투명함을 강조한 시설인 만큼 입장을 위해선 비치해둔 덧신을 신어야 한다.

    워낙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간 탓인지 투명 바닥이 흐려진 부분도 있었지만 화창한 날씨와 강바람, 수면 위에서 빛나는 태양이 서울에서 이고 온 근심을 한번에 날려 버린다. 스카이워크 주변에는 넓은 테라스 공간도 있다. 다른 일정이 없다면 바람이 세차게 부는 이곳에 접이식 침대 하나 펼쳐 두고 누워서 한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춘천중앙시장은 1960년 개설된 아케이드 형태의 전통시장이다. 디지털 폰트로 90퍼센트 이상 잠식한 타 시장과 달리 그래도 연식이 오래된 서체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외지인까지 많이 붐비는 시장을 상상했지만 늦은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한적한 느낌을 풍겼다. 옛날 간판을 보면 양옆에 취급하는 품목의 상표가 같이 들어간 경우가 있다. 오래전 술집 간판 가장자리에 같이 붙은 OB맥주, 크라운맥주 등의 상표도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시장 내부 한 슈퍼 간판에서 제일제당 ‘아이미’ 상표를 만날 수 있었다.

    소양강스카이워크
    춘천중앙시장의 어느 슈퍼에서 발견한 제일제당 ‘아이미’ 상표
    춘천중앙시장을 수놓은 옛 간판들

    ‘국내 최초의 핵산 조미료’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1977년 출시된 아이미(경향신문 1977년 11월 21일자 6면에 실린 ‘아이미’ 지면광고 보기)는 독특한 레터링과 캐릭터로 화제를 모았던 조미료 브랜드. 쉽게 말해 미원과 경쟁하는 제품이다. 현재 구입할 수 있는 아이미는 상표의 기본 틀은 그대로지만 내부 레터링이 평범한 서체로 바뀌었다. 받침이 없다는 천혜의 조건과 전체적으로 단순한 문자열로 얼마든지 장식적인 시도를 해볼 수 있음에도 무색무취의 고딕으로 일관하는 것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간판 반대쪽에는 역시 오늘날까지 생산되는 장수 브랜드 다시다의 옛 상표가 눈에 띄는데, 화석처럼 보존된 옛 디자인을 보면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브랜드건 아니건 우선 반가움이 앞선다. 시장 건물 건너편 상가 골목에서도 옷가게, 수선집 등에 적용된 짧은 거리 대비 다수의 옛 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양식은 둥근 고딕이거나 획에 강약을 주어 멋을 부린 고딕 혹은 유리에 시트지를 잘라 붙인 장식적인 고딕으로 비교적 평범한 편이나 큰 변화 없이 수십 년간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무적이다.

    청춘으로 되살아난 고갯길, 육림고개 청년몰

    춘천중앙시장 뒷길로 나가면 육림고개와 연결된다. 육림고개는 옛 육림극장과 중앙시장을 연결하는 500미터가량의 고갯길이다. 30~40여 년 전만 해도 춘천의 주요 상권이었으나 2000년대 들어 신도시 개발 등의 복합적 이유로 상권이 이동해 낙후된 채로 방치됐던 지역이다. 이에 춘천시는 2010년대 후반 청년몰 조성 사업을 통해 현재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꽤 경사진 고갯길 양편에 ‘청년 가게’들이 다수 들어와 있는데 적당한 길이의 골목에서 먹거리, 술, 액세서리, 타로점 등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각 지자체에서 주도했던 청년몰 조성은 사실상 실패한 사업도 많다. 그러나 육림고개 청년몰은 일단 자생적으로 지역 문화에 연착륙한 듯 보인다.

    청년몰 아이덴티티의 중심을 이루는 ‘육림고개’ 레터링을 하나의 양식으로 정의하기는 힘들다. 디자이너가 어떤 양식을 차용해서 만들었다기보다 단지 획을 구부리고 연장시켜 색다르게 보이는 데 중점을 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픽 디자이너 김기조가 독특한 한글 표현으로 선풍을 일으킨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서너 글자로 딱 떨어지는 명칭을 붙이긴 애매하지만 이제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한 어설프지만 개성 있는 장식적 고딕 레터링’이라는 신규 카테고리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분류와 분석의 관점에서 이런 레터링도 하나의 양식으로 부를 때가 됐다. 더욱 명료한 명칭은 디자인 연구자나 역사가의 몫으로 일단 남겨둔다.

    1967년 문을 연 옛 육림극장 건물은 빈 상가에 으레 들어서기 마련인 철 지난 등산복이나 골프웨어를 파는 일회성 의류 매장으로 쓰이고 있는 듯 했다. 건물의 역사성을 살려서 영화를 포함한 영상 관련 센터로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하면 좋은 랜드마크가 될 것 같다.

    육림고개와 육림극장

    체스터 후라이드 치킨과 춘천 피카디리

    춘천시청 주변 시내에도 시각 유산이 많다. 우선 넓은 도구로 쓴 듯한 독특한 조형 감각을 자랑하는 ‘체스터 후라이드 치킨’(조선일보 1997년 6월 23일자 44면에 실린 ‘체스터 후라이드 치킨’ 지면광고 보기) 한글 로고타입. 미국에서 온 본래 아이덴티티(슬랩 세리프)와 완전히 다른 룩이 특징이다. 체스터 후라이드 치킨은 1990년대 초반 한국에 진출해 활발한 가맹점 모집을 전개했던 치킨 프랜차이즈로, 1997년 IMF 외환 위기 여파로 지금은 한국 시장에서 철수한 상태다.

    체스터 후라이드 치킨 춘천중앙점

    체스터 후라이드 치킨을 검색하면 공식적으로는 안양 동안구 및 서울 일원동에 총 세 곳이 나오는데, 춘천중앙점이 검색에 잡히지 않듯 전국 어딘가에는 유사한 지점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으나 현재로선 파악되지 않고 있다. 지역 프랜차이즈 중에는 사업 철수나 부도로 본사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업종과 간판만 유지한 채로 영업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체스터 후라이드 치킨의 경우도 그렇다고 봐야겠다.

    피카디리 극장은 서울 종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춘천 피카디리는 종로 피카디리와 비슷한 황토색 외관에 잘게 나눠진 황토색 타일의 익숙한 외형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1955년 소양극장으로 문을 열어 1990년 피카디리로 이름을 바꾼 이후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건너편 육림극장과 더불어 전통적인 영화관의 쇠퇴로 영화 상영은 2007년 멈췄지만 특징적인 외관과 간판 레터링은 그대로 남아 있다.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역사성 높은 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지자체와 시민 사회의 중지를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춘천 피카디리

    효자3동의 한 2층 건물 창문 전체에 붙은 ‘만화센터’ 글자는 지금은 아무데서나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옛날에는 ‘분식센터’처럼 가게 이름에 ‘-센터’를 붙이는 것이 유행했다. 아마 센터라는 단어가 주는 트렌디한 이미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명조체의 비례와 자소 디자인을 시트지로 어설프게 재현한 ‘만화센터’ 외곽선에서, TV가 귀하던 시절 TV를 보여주고 돈을 받았다던 그 시절 만화방 얘기가 떠오른다. 한쪽 끝에 붙은 ‘대본소’ 글자도 대본소 만화의 향수를 자극한다.

    ‘춘천커피’는 얇고 긴 독특한 규격의 간판에 붙은 글자로 시선을 끌었다. 초성과 중성이 온자 위쪽에서 붙은 ‘피’와 한 자리로 시작하는 옛 전화번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아래쪽 시트지는 위에 붙은 둥근고딕 느낌을 재현하려는 듯 획이 닿는 부분을 굴린 서체로 되어 있다. 한 자리에서 세 자리로 변한 국번에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진다.

    ‘만화센터’와 ‘춘천커피’

    춘천 상상마당에서― 30년 세월을 가로지르는 두 머릿돌

    공지천을 건너 KT&G상상마당 춘천(이하 ‘춘천 상상마당’)으로 향했다. 의암호가 바라다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내려앉은 춘천 상상마당 아트센터는 1980년 강원어린이회관으로 문을 연 곳이다.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설계했으며 후기 김수근 건축의 특징인 적색 벽돌조로 되어 있다.

    2층 규모 건물의 전체적인 평면은 의암호를 향해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이며 층계를 최대한 줄이고 경사로로 대체한 내부 구조가 인상적이다. 같은 건축가의 작품인 경동교회(서울 중구 장충동)나 구 공간사옥(서울 종로구 원서동)을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다. 수많은 각이 면을 이루며 어디에 어떤 공간이 숨었는지 모를 건물 구조로 찾는 재미를 준다.

    쇠퇴 일로에 있던 강원어린이회관은 KT&G의 인수 이후 공연장, 라이브 스튜디오, 갤러리, 강의실 등을 갖춘 지금의 아트센터로 2014년 재개관했다. 입구 오른편 옛 머릿돌과 새 머릿돌이 같이 있는 모습에서 서울 종로의 삼일빌딩이 떠오른다. 이 건물 또한 1969년 건립 당시 정초석과 2020년 리모델링 정초석이 나란히 붙어 있다. 춘천 상상마당의 재개관 머릿돌은 [상상마당체]로 되어 있다.

    왼쪽 동에는 ‘댄싱 카페인’이라는 카페가 들어와 있는데 커피와 빵을 시켜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며 글자 설계 작업을 하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날도 마침 아주 화창했다. 여행을 갈 때면 항상 비 걱정이 크다. 비는 탐방과 촬영을 방해하고 자전거 등 공유 교통수단의 탑승도 제한한다. 이번엔 그럴 염려가 없어 좋았다. 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공연이나 전시 일정을 미리 알아두고 뒤쪽에 위치한 ‘상상마당 스테이(강원체육회관 리모델링 건물)’에 숙소를 잡으면 좋은 휴식이 되겠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강원어린이회관(1980년 개관)을 리모델링한 춘천 상상마당(2014년 재개관)
    두 머릿돌. 30여 년의 시차가 나란히 놓이다.
    춘천 상상마당 내 카페에서 잠깐의 신선놀음

    춘천지구 전적기념관과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

    의암호가 내려다보이는 다른 쪽에는 춘천지구 전적기념관이 있다. 야외에 연합군 주력 제트전투기였던 F-86 세이버가 자리잡은 이곳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국군 6사단이 펼친 방어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전면 침공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국군은 초기에 전 전선에서 밀리며 부진했다.

    그러나 춘천에 주둔한 6사단은 성공적인 방어 전략으로 적의 진격을 3일간 지연시켰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남쪽으로 후퇴하긴 했지만 춘천지구 전투는 시간을 벌고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존립과 연관된 전투로서 의의가 크다.

    1950년 여름 대한민국은 경상도의 일부 지역만을 점유하면서 마지막 코너에 몰려 있었다. 역사는 ‘그래야만 하는’ 경로로 당연하게 흘러온 것 같지만, 그 내면을 자세히 보면 의외로 면도날처럼 미세한 차이로 대세가 결정된 경우가 많으며 그 반대의 경우로도 얼마든지 진행될 수 있었다는 것이 실감난다.

    ‘춘천지구 전적기념관’ 및 ‘춘천지구 전적비’ 글자는 장중한 분위기를 살린 전형적인 한글 붓글씨의 모습. 기념관의 위치와 장르가 일반인들이 가볍게 들르기엔 어려운 쪽이라 특별한 수정이 가해지지 않고 보존이 잘된 편이다. 근처 자유회관의 오리지널 한자 간판과 후에 웨딩홀을 겸하게 되면서 붙은 [태-물방울] 서체를 쓴 간판이 시대의 변화를 보여준다.

    춘천지구 전적기념관과 전적비
    기념관 근처 자유회관: ‘자유센터웨딩홀’ 글자체는 [태-물방울]이다

    춘천지구 전적기념관 근처의 ‘이디오피아 집’은 1968년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1892~1975)가 방한해 직접 명명하고 황실 전용 원두까지 보내준 한국 최초의 로스터리 카페 전문점이다. ‘이디오피아 벳’이라고도 불리는데 ‘벳(bet)’은 에티오피아어(암하라어)로 ‘집’이라는 뜻이다.

    이디오피아 집에서는 공지천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카페 입구에 있는 [산돌북체]와 달리 같이 놓인 ‘이디오피아’ 레터링은 연식이 꽤 되어 보였다. 초성 디귿[ㄷ]에서 보이는 모서리를 사선으로 깎은 기하학적 디자인은 1970~1980년대 국내 기업 한글 로고타입에서도 자주 보였던 스타일이다.

    한국 최초의 로스터리 카페 전문점 ‘이디오피아 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은 첫 실전 적용 장소로 한반도를 선택, 사상 첫 유엔 연합군을 파병했다. 이때 아프리카 국가로 유일하게 수교도 하지 않았던 에티오피아가 참전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한국보다 부국에 가까웠다. 1935년 이탈리아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많은 자국민을 잃어 약소국의 아픔을 절감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같은 처지에 놓인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파병을 결정한 것이다. 황제는 출발하는 병사들에게 손수 ‘강뉴 부대’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에티오피아어 ‘강뉴(Kagnew)’는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또는 ‘초전박살’을 의미한다.

    춘천은 강뉴 부대 병력들이 활약한 주요 격전지 중 하나였다. 사시사철 더운 아프리카에서 온 3개 대대 6,037명 참전 용사들은 한국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그야말로 엄청난 고생을 했으나 1951년부터 전후 복구 사업을 마치고 공식적으로 철수하는 1965년까지 253회 크고 작은 교전을 치러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다만 전사자 121명, 부상자 536명이라는 희생은 피할 수 없었다.

    강뉴 부대는 한국을 위해 단 한 명의 포로도 없이 용맹하게 싸웠다. 그런데 1974년 쿠데타로 황제가 실각하고 나라가 공산화되자 적성국인 한국을 위해 싸웠던 참전 용사들은 하루아침에 군인 연금을 몰수 당하고 취업 제한이 걸리는 등 영웅에서 범죄자로 위상이 바뀌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대접을 받게 된다. 지금은 공산정권도 전복되어 박해는 사라졌지만 참전 용사 대다수가 연로한 상태다. 2014년부터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경북 칠곡군을 비롯해 현재도 다양한 지자체와 단체에서 에티오피아 현지와 교류·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모아둔 공간이 이디오피아 집 건너편에 있는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이다. 2007년 에티오피아 전통 건축 양식인 돔 모양으로 건립된 기념관에는 산화한 참전 용사들의 이름과 함께 참전 용사들이 들고 싸웠던 무기와 장구류, 계급장, 훈장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전쟁 당시 국군과 연합군의 주요 개인 화기였던 M1 개런드와 단축형 소총 M1 카빈이 보인다. 관람하는 순간에도 무리 지어 들어오는 중년 관광객들이 눈에 띄었다.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

    황금 들녘을 지나면 책과인쇄박물관

    타이포그래피에 관심이 있다면 책과인쇄박물관도 한 번쯤 둘러볼 만하다. 사실 사전 정보는 딱히 없었는데, 평범한 이름과 위치로 인해 실망할까 고민도 되었으나 방대한 소장품을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기우에 불과했다. 신문사와 서울 충무로 거리에서 인쇄업에 종사한 전용태 관장이 평생 모은 수집품을 모아 2015년 건립했다는 박물관 건물은 김유정문학촌(춘천 신동면) 입구에서부터 ‘황금 들녘(가을 벼 수확철, 춘천 동내면 외곽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들 때 부르는 명칭)’ 사이를 10여 분쯤 걸어가면 나온다. 3층에 이르는 전시 공간에 활판부터 사진 식자에 이르는 인쇄 방식의 변천을 보여주는 여러 유물이 놓여 관람객을 맞는다.

    사실 직업 타이포그래퍼라고 해도 디지털 인쇄에 익숙한 지금 과거의 장비나 원리를 접하기는 쉽지 않다. 책과인쇄박물관은 과거 인쇄 문화에 대해 추상적으로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공목을 포함하여 짠 완성된 인쇄판을 여러 개 전시하는 등 ‘실질적인’ 갈증을 해소해준다. 특히 책갈피로 활용할 수 있는 빳빳한 재질의 입장권과 까마득한 높이의 벽을 금속 활자와 매트릭스로 가득 채운 1층 전시실이 인상적이었다.

    인쇄 역량이 갖춰진 만큼 이를 활용한 시집, 엽서 등의 굿즈도 판매한다. 그중 작은 포인트의 금속 활자가 있다. 기념으로 [한] [동] [훈] [한] [글] [타] [이] [포] [그] [래] [피] 열한 자를 구입했다. 활자는 작은 유리병에 담아 제공된다.

    가을철 춘천 동내면의 벼 익는 풍경을 일컬어 ‘황금 들녘’이라 한다
    책과인쇄박물관

    ‘대덕상회’ 간판 글자 해석과 파생

    춘천중앙시장 건물 1층 건어물 가게 ‘대덕상회’는 시장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간판 양식을 보존하고 있다. 튀는 온자 없이 전체적으로 평이하나 초성 피읖[ㅍ]의 가운데 기둥 아래쪽이 브이(V) 자 형태로 모아지는 등의 고유 특징을 갖고 있다. 이 간판 글자의 주요 DNA를 살펴보자.

    춘천중앙시장 ‘대덕상회’ 간판 글자


    ▷ 미디엄(medium)에 가까운 두께를 가진 고딕 형태다.
    ▷ 온자가 전체적으로 가로로 넓은 평체에 가깝다.
    ▷ 획의 오른쪽 끝이 위쪽으로 꺾어지며 끝나는 형태가 초성과 [회]의 이음보를 가리지 않고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 초성 [ㅍ]의 가운데 기둥 아래쪽이 모임꼴을 가리지 않고 브이 자 형태로 모아진다.
    ▷ 네모틀에 꽉 채우는 간판 글자 양식의 영향으로 온자 대비 초성의 사이즈가 크다.
    ▷ [콩]에서 초성 키읔[ㅋ]과 중성 [ㅗ]의 연결이 독특하다.
    ▷ [용]의 중성 세로기둥이 초성 [ㅍ]처럼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다.
    ▷ 초성 지읒[ㅈ]의 위쪽 가로획 부분이 아래쪽 빗침보다 넓어 보인다. 보통은 빗침보다 크기를 줄인다.
    ▷ 종성 니은[ㄴ], 리을[ㄹ]과 [덕]의 초성 디귿[ㄷ] 등 일부 자소에 모서리 굴림이 들어갔다.
    ▷ 이응[ㅇ]은 온자에 맞춰 상하좌우로 꽉 찬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DNA를 분석했다면 한글 파생 원리에 의해 다른 낱자도 만들 수 있다.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원본 글자를 현시대 고딕 서체로 쓸 수 있도록 통일성 있게 정제하고 ‘호반의 도시 춘천 글자발견’이라는 문자열을 추가해 보았다. 흥미로운 글자를 수집해도 그것을 응용해 디자인하려면 새로운 디자인에 맞먹는 수정이 요구되는데 정제하는 포인트를 잘 판단해야 한다. 글자폭은 온자 간 너비 차이가 없는 고정폭, 각 1000유닛(unit)으로 설정했다. 이번에는 튀는 개성보다 무색무취한 고딕을 만드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대표적인 온자의 파생 방법을 설명한다.

    글에서 제시되지 않은 글자라도, 설명을 보면서 이유를 추측하거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석·응용한다면 좋은 서체를 만들 수 있다. 다른 분야처럼 서체 디자인도 반복적인 연습이 필수다. 원본이 평이하지만 곳곳에 숨은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해석하여 확대 적용하는가에 따라 상당히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대덕상회’ 간판 글자를 바탕으로 제작한 견본 문자열

    ▷ 가로모임꼴: [시], [자], [절], [판], [땅], [덕], [반], [천]

    [시]의 초성은 [상]에서 가져왔다. 중성 [ㅏ]의 곁줄기가 오른쪽으로 치고 들어오는 [상]과 달리 [시]의 중성은 곁줄기 없는 [ㅣ]이므로 그만큼 오른쪽으로 넓혀주어야 한다. 초성 시옷[ㅅ]은 오른쪽으로 약간 이동시키면서 너비도 넓혀준다. 빗침 부분을 선택해서 아래쪽으로 내리되 어색하게 늘어난 것처럼 처리하면 안 된다.

    [자]의 초성은 [시]에서 가져오되 위쪽에 가로획을 붙여 준다. 시각 보정을 고려하여 [ㅅ]의 맨 윗선에 맞추지 말고 10유닛이라도 내려온 위치에 붙여야 한다. 중성 [ㅏ]는 [상]의 위치에 맞춘다.

    [절]의 초성 [ㅈ]은 위쪽 가로획이 아래쪽 빗침보다 넓게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를 살릴 수도 있지만, 수정 방향을 일반적인 고딕에 가깝게 잡았으므로 아래쪽 빗침을 더 넓고 크게 보정해준다. 중성 [ㅓ]의 짧은 곁줄기도 왼쪽으로 늘려서 [ㅈ] + [ㅓ]가 한데 묶여 보이도록 수정한다.

    [판]의 초성 [ㅍ]은 이 서체의 주요 아이덴티티이므로 최대한 유지한다.

    [땅]은 초성 쌍자음이 있는 온자인 만큼 일반 온자에 비해 넓어져야 하지만, 과하게 넓어지면 안 된다. 그 수치는 일반 온자 대비 5~10퍼센트 정도면 무난하다. 초성 쌍디귿[ㄸ]의 왼쪽 [ㄷ]이 오른쪽 [ㄷ]에 비해 위아래로 더 크다. 바깥에 위치한 자소가 안쪽에 위치한 자소보다 크면 온자가 가진 힘이 안쪽으로 쏠리게 되어 무게 중심이 맞춰지는 효과가 있다. 결국 온자가 한 덩어리로 잘 뭉쳐져 보인다.

    [덕]의 초성 [ㄷ]은 아래쪽 가로획을 위로 꺾어 주되 중성 곁줄기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자른다. 다양한 크기로 보면서 두 요소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지 확인해야 한다.

    [반]의 중성과 종성은 [판]에서 가져온다. 이 서체에선 조합 경우의 수를 단순하게 가져갈 예정이므로 비슷한 면적을 차지하는 자소를 공통적으로 활용하는 빈도가 높다. 초성 비읍[ㅂ]은 [덕]의 [ㄷ]과 같이 왼쪽 아래 모서리를 굴려 통일성을 준다.

    [천]의 초성 치읓[ㅊ] 꼭지는 원본 [회]에서 볼 수 있듯 세워진 방향이 자연스러우므로 세워서 디자인한다. 빗침은 [ㅅ], [ㅈ]과 같은 분위기를 유지해 준다.

    ▷ 가로모임꼴: [폐], [백]

    [폐] 너비는 [대]를 기준으로 맞춘다. 완전히 같은 수치로 해도 괜찮지만 조금 더 세밀하게 디자인하고 싶다면 살짝 넓혀준다. 온자 안의 획들이 [대]보다 복잡하기 때문이다. 세로기둥이 브이 자 형태로 만나는 원본 아이덴티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작업해준다. 초성 [ㅍ]의 아래쪽 가로획 시작 부분과 마지막 꺾임 정도는 [회]의 이음보에서 가져온다. 경우의 수를 두면 지나치게 복잡해지는 만큼 통일하는 쪽을 택했다.

    [백]의 초성은 [반]에서 가져오되 높이를 줄여 준다. 중성 [ㅐ] 위치는 [대]를, 종성 기역[ㄱ] 위치는 [덕]을 참고하면 된다. 다만 [덕]보다 [백]이 좀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므로 [백]에 들어가는 종성도 [덕] 종성보다 약간 넓어져야 한다.

    ▷ 세로모임꼴: [구], [도], [호]

    [구] 가로보 [ㅡ]의 시작 부분은 사선으로 깎이는 쪽으로 통일한다. 아이덴티티가 적은 서체이기에, 재해석 시 원본의 특징 중 일부에 들어가는 것을 전체로 확대 적용한다는 개념이다. 초성 [ㄱ]의 세로획은 원본을 따라 왼쪽으로 쏠려서 마감되도록 만들어 준다.

    [도]의 초성 [ㄷ]은 [대]에서 가져오되, 마지막 획 꺾임이 없이 쭉 펴준다. 이로써 가로모임꼴에서는 꺾임이 있지만 세로모임꼴에선 없다는 법칙이 생겨난다. 이렇게 한 이유는 세로모임꼴 온자는 오른쪽에 물리적으로 [ㄷ]의 획 진행을 방해할 만한 중성이 없기 때문이다. [도] 초성 [ㄷ]의 두께는 [대]에 쓰인 [ㄷ]과 큰 차이가 없다.

    [호]의 중성 [ㅗ]는 [도]에서 가져오되 초성 히읗[ㅎ]은 [회]에서 가져와 늘려준다. 세 온자의 초성 [ㄱ], [ㅎ], [ㄷ]은 어느 하나가 넓거나 좁지 않도록 맞춰 준다.

    ▷ 세로모임꼴: [용], [콩], [춘], [글]

    [용]의 중성 [ㅛ] 세로기둥은 사선으로 진행함으로 이를 그대로 살려 준다. [용]은 초성과 종성에 모두 [ㅇ]이 들어가는 대칭에 가까운 온자다. 여기서 초성 [ㅇ]을 종성 [ㅇ]보다 약간 좁고 작게 만들어 준다. 귀여운 디자인을 추구한다든지 하는 특정 목적이 있지 않는 이상 초성이 종성보다 커지면 가분수가 되어 불안정한 온자가 되기 때문이다. 종성이 시각적으로 받쳐 줘야 안정적으로 보인다. 다만 모든 보정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지나치게 티가 나면 곤란하며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

    [콩] 역시 원본의 독특한 획 진행을 살려 준다. 초성 [ㅋ]은 [구]의 초성 [ㄱ]을 바탕으로 하고 종성 [ㅇ]은 [용]에서 가져와 아랫선은 그대로 두고 위쪽 높이만 조절한다.

    [춘]의 초성 [ㅊ] 빗침은 [천]과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되 밑에서 [ㅜ] + [ㄴ]이 치고 올라오기 때문에 양옆으로 더 길게 늘어져야 한다. 같은 이유로 [ㅊ]의 전체 위치도 [천]에 쓰인 [ㅊ]보다 넓고 높게 위치해야 한다. 두께는 두 [ㅊ]이 비슷하다.

    [글]의 초성 [ㄱ]은 [구]에서 가져오되 아래쪽에 받침이 있으므로 [구]의 [ㄱ] 대비 10유닛가량 올리고 양옆 너비를 살짝 줄여준다. 종성 [ㄹ]은 [절]에서 가져오되 살짝 넓혀준다. 같은 자소라면 가로모임꼴보다 세로모임꼴에 쓰인 자소가 더 넓은 경우가 많다. 그래야 온자의 전체 외곽선을 균일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 김유정역
    신 김유정역

    경춘선을 타고 춘천에 들렀다면 아마 ‘김유정역’을 지날 것이다. 원래 경춘선 신남역이었던 이곳은 단편소설 「봄봄」과 「동백꽃」으로 잘 알려진 춘천 출신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의 이름을 따 2004년 김유정역으로 바뀌었다. 사람 이름을 딴 최초의 한국 기차역이라 한다.

    현재 김유정역 구 역사는 문을 닫고 근처에 전통 한옥 양식으로 새로 지은 역사가 영업 중이다. 구 역사는 추억이라는 콘셉트로 과거에 쓰였던 여러 승차권과 역명판, 역무실에서 썼던 전화기 같은 집기류를 전시해 두었다. 2010년 지은 새 역사에서 특이한 것은 서체다. 역명판을 비롯한 주요 사인을 클래식한 궁서체로 통일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리 문화적으로 특성이 뚜렷한 역은 흔한 [코레일체] 사인 대신 이렇게 포인트를 주는 것도 좋아 보인다.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산돌을 거쳐 ㈜티랩에서 근무했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 등에 글을 기고했으며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 온라인 플랫폼 클래스101, 이도타입에서 서체 디자인을 가르쳤다.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donghoonha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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