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물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기억으로 전해져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고 대화를 트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이번 목적지는 왠지 봄날 여수 밤바다가 보고 싶어 전라남도 여수로 정했다.
짐을 챙길 때 전날 정류장에서 본 사람이 생각났다. 아마 꽃놀이 약속이 있을 가벼운 옷차림의 그는 캐논 AE-1을 메고 여의도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필름 카메라는 쓸데없이 무겁다고 생각되어 오랫동안 챙겨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가끔 알면서도 미련한 행동을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 사람을 보고 느낀 낭만이 생각나 나도 캐논 A-1을 목에 걸고 나왔다. 역까지 시간이 별로 없어 택시를 불렀다. 기사 역시 카메라를 보고 뭔가 느낀 모양이다. “카메라 하나 메고 어디를 가십니까?” “여수 갑니다. 전남 여수.” 택시 내 스몰토크를 선호하지 않지만 이번엔 왠지 상대의 말을 끊고 싶지 않았다.
여수에 가면 향일암에 가 보세요. 올라가기는 조금 힘든데 올라가면 장관입니다. 해 뜨기 전에 가야 합니다. 제가 고향이 그쪽입니다. 간다고 하니까 알려드리는 건데, 전라남도 탐방을 한번 해 보세요. 전남 쪽에 나주·무안·함평 이런 시골이요. 그런 시골 저수지 같은 데 가면 수십 년 된 벚나무가 많아요. 밤에 물안개가 올라오면 정말 이뻐요. 그런 데서는 수도권에선 구하기 힘든 사진이 나오거든요. 또 다른 풍경도 많아요. 예를 들면 나주 배꽃. 온 산에 정말 바닷물처럼 하얗게 쫙 피니까. 밤에 달 뜰 때 보면 바닷가에 금가루 뿌려놓은 것처럼 빤짝빤짝대요. 수도권 벚꽃은 누구나 찍을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전남을 한번 돌아보면요, (경치가 장관이라) ‘야, 이쪽에 젊은 사람들이 왜 안 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기사님은 택시 운전이 아니라 어디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좀 하셔야 될 분 같은데요.” “하하, 그런 거는 한번 해 보고 싶어요. 민방위 교육 다니는 강사.” 산에 들에 꽃 피는 계절이다. 봄이 사람들의 마음을 녹인 것일까, 아니면 쾌활한 사람들이 제철을 만난 것일까?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걱정했는데 발차보다 10분 이상 일찍 도착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출발이다.
바다와 도심의 사잇길을 달리는 여수랑
‘섬섬여수’ 레터링이 붙은 KTX를 타고 긴 여행 끝에 목적지 여수엑스포역에 내려 숙소로 이동했다. 여수고등학교 맞은편의 낮은 언덕길. 여수 시내에서도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호텔 마띠유는 1967년 문을 연 여수관광호텔을 리모델링한 곳이다. 홈페이지에 따르면 호남권에 생긴 첫 관광호텔이라고 한다. 금방 생긴 건물보다 기왕이면 서사(?)가 있는 곳을 원했던 필자의 취향에 나름 들어맞았다.
짐을 풀고 화창한 거리를 천천히 걸어 본다. 실물로 처음 본 남도의 벚나무는 과연 수도권의 여느 포토 스팟에서 볼 수 있는 것들과는 크기부터 달랐다. 둥치가 아주 굵고 힘차다. 줄기가 애매하지 않고 힘있게 탁탁 꺾여서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것이 마치 조선시대 어느 역사적인 화가의 수묵화를 실물로 옮겨 놓은 것 같다. 줄기마다 꽃잎이 가득하고, 바람이라도 한 번 불면 그런 벚꽃잎이 꽃비를 이루는 도로는 아무 인지도 없는 평범한 거리조차도 하나하나 카메라로 담아 영원히 보고 싶은 장관을 이룬다.
여수 도심의 진남상가 주변에는 아직 발견할 만한 글자가 많다. 조금 붐비는 곳의 교통 표지판에는 최신 서체인 [한길체]가 쓰여 있지만, 상관없는 곳으로 걸어가면 [산돌고딕]도 아닌 옛 [견고딕] 스타일 표지판이 나타난다. 사회라는 것이 한두 번의 큰 계기로 한꺼번에 바뀔 수 없듯, 진남상가 주변에서도 해안가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주목성 강한 각종 최신 폰트와는 다른 옛날 글자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장르도 미용실, 치과, 의상실, 세탁소 등으로 다양하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여수중앙신협 건물이다. 건물 외벽에는 1970-1980년대 것으로 추정되는 ‘여수중앙신용협동조합’ 간판 글자가, 측면 간판에는 그 이후 그래픽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친 신협 로고타입이, 정면 간판과 현수막에는 가장 최근에 개발된 신협 전용서체가 쓰였다. 그야말로 어디 가서 쉽게 보기 힘든 ‘서체 3대’라 할 만하다.
해안가로 나와 여수의 공유 자전거 ‘여수랑’에 올랐다. 어떤 도시의 유동인구가 많은가, 활력이 있는가를 요즘에는 공유 교통수단의 유무로 판별할 수 있다고 본다. 서울에 ‘따릉이’가 있다면 여수에는 여수랑이 있다. QR코드 스캔과 뒷바퀴 잠금 방식은 유사하지만 대여·반납 시 추가적인 버튼을 한 번 눌러 줘야 한다. 다른 면은 만족스러웠지만 대여소의 부족이 약간 아쉬웠다.
저녁을 향해 가는 해안을 따라 천천히 자전거를 달려 본다. 같은 항구 도시 부산에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있다면 여수엔 「여수 밤바다」가 있다. 장범준, 브레드, 김형태가 모인 그룹 버스커 버스커 1집(2012)에 수록된 「여수 밤바다」는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유구한 역사나, 히트곡이 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에는 미치지 못하나, 벌써 클래식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허어어어” 하는 가사가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된다. 노래의 힘은 크다. 이 노래 하나가 여수 관광객 증가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어쩌면 뻔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클리셰가 클리셰인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지금 이 순간도 전국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뻔한 분위기를 느끼려 여수행 열차에 오른다.
충무공의 진남관에서 하멜등대까지
여수의 인물 하면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이순신과 하멜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말이 필요 없는 민족 구국의 성웅으로까지 추앙받는 조선의 해군 제독. 그가 후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592년부터 7년간 벌어진 임진왜란·정유재란이다. 그가 머물렀던 조선시대 호남 수군의 본거지 전라좌수영이 왜란 당시 여수에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 발발 한 해 전인 1591년 여수에 부임해 전운을 감지하고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적과 싸우는 족족 승리를 거둔 이후의 활약상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것과 같다. 현재 전라좌수영 터에 들어선 국보 제304호 진남관(鎭南館)은 아쉽게도 대대적인 보수 공사 중이라 들어가 볼 수 없었지만 근처 이순신 광장 주변에 거북선 등의 조형물과 설명이 가득해 분위기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네덜란드 출신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은 무역선 스페르베르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중 큰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도착해 36명의 생존자와 함께 구조된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지식이나 기량이 활용 가치가 있다고 여긴 조선 조정에 의해 본국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억류되었다. 잠시 안정된 삶을 산 적도 있다고는 하나, 원치 않은 직업과 타향살이가 성에 찰 리 없었다. 하멜 일행은 수차례에 걸친 시도 끝에 1666년 결국 탈출에 성공해 13년 만에 귀향할 수 있었다.
돌아간 그는 회사에 억류 기간의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그동안의 실상을 기록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출판된 것이 우리가 『하멜 표류기』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바로 그 책이다. 기약 없는 일지를 무려 10여 년간 작성한 데서 그의 치밀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여수는 하멜이 마지막 4년을 보낸 곳이다. 여수시는 하멜 일행이 일했다고 알려진 여수 동문동 일대를 ‘하멜로’로 지정하고 여수해양공원 방파제 끝단에 등대를 세워 ‘하멜등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자세한 여정은 등대 근처 하멜 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방파제를 걸어 하멜등대로 가 보았지만 등대 이름이 상징하는 인물과의 연관성은 딱히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이곳에 들렀다 하면 그냥 사진 한 장 찍고 마는 흔한 기념물 중 하나로 전락한 듯하다. 빨간 외벽에 쓰인 ‘하멜등대’ 네 글자만이라도 하멜과 관련한 역사서에서 따온 글자로 할 수는 없었을까? 조선은 그에게 억압의 상징 같은 땅일 텐데, 자신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관광지의 일부가 된 것을 알면 지하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진다.
삼합에 여수밤바다 한 잔
여수 밤바다 앞에는 관광객들을 노린 일명 낭만포차 거리가 성업 중이다. 그런 곳에서 바다를 느껴 볼까도 싶었지만 화려한 조명과 북적이는 모습에서 어쩐지 제대로 된 분위기를 느끼기 어려울 것 같아 근처 서시장 앞에 있는 소규모 포차 밀집 지역으로 옮겼다. 그중 23호 ‘실내마차’라는 곳으로 들어가 여수밤바다 소주(보해양조)와 삼합을 시켰다.
여수밤바다 소주의 라벨 타이틀은 [윤명조 700] 계열로 보인다. 아마도 [윤명조 710]쯤에 해당할, 수직 수평으로 정제된 획과 도톰한 부리가 이루는 잔잔하고 안정적인 글자 구조가 원고지 콘셉트 라벨 디자인의 마지막 점을 찍는 역할을 한다. 바닷가와 달리 주변이 조용해서 좋았다.
“감사합니다- 여수 놀러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여수 사람이라. 이게 여수의 홍보야 홍보.” 건너편 테이블에서 반려자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아주머니가 계산하고 나가는 외지인들을 향해 한마디씩 한다. 혼자 하는 여행의 장점은 동행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한마디 얹어도 뉘앙스만 잘 탄다면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곧 근처 테이블에서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던 현지인 아저씨가 필자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고 그와 안면이 있는 듯한 실내마차 주인장도 문 닫을 시간(자정)이 가까워 오자 아예 테이블로 합석해 세 명이서 여수밤바다를 끝없이 기울였다. 아무 연고가 없고 아는 이도 잡는 이도 없는 남도의 어느 포장마차에서 필자는 비로소 약간의 자유를 느꼈다. 명함도 나누었다.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것이다.
111번 버스 종점, 향일암
원래 이튿날 일찍 향일암에 가보려 했다. 하지만 새벽부터 내내 흐린 날씨로 인해 계획한 일출 감상은 실패했다. 향일암은 여수에서도 맨 아랫자락에 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할 수도 있지만 도심에서 꽤 먼 거리로 요금이 만만찮게 나온다. 대신 시내버스 111번을 타면 정차하는 곳이 조금 많아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의 모습을 보면서 갈 수 있다. 생소한 수많은 지명을 따라 굽이굽이 길을 얼마나 지났을지, 버스를 채웠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내리고 1시간이 좀 넘게 걸려 종점인 향일암에 도착했다.
여수 돌산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향일암은 644년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한 역사 깊은 암자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1715년 향일암(向日庵)이라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말 그대로 해를 향하고 있다는 의미다. 티켓의 서체는 잔잔한 궁서체와 명조체로 되어 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짧은 편이다. 그래도 아무런 생각 없이 가볍게 올랐다면 숨이 찰 수도 있다. 건축을 제대로 전공해본 적은 없으나 그 종사자였다면 여기서 하나쯤 작업에 대한 영감을 얻어 가지 않았을까 싶은 다양한 바윗길이 반복됐다. 관음전을 뒤로 하고 바라본 넓은 바다는 한없이 잔잔하기만 하다.
향일암을 내려와 돌산공원에서 해상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면 바로 아래 인접한 섬인 오동도로 연결된다. 오동잎을 닮았고 오동나무가 많이 자라 이름도 오동이 되었다는 오동도는 문자열이 독특하다. 한글부터 이미 자소 이응[ㅇ]이 많이 강조된 인상인데 로만 알파벳으로 옮겨도 ‘odongdo’로, 둥근 속공간이 가득하다. 시에서도 그런 특성을 디자인 모티프로 삼았는지 이를 활용한 알파벳 로고타입을 곳곳에 강조했다. 섬 중앙 광장에 조형물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가운데 [동]을 높게 해서 리듬을 강조한 한글 조형물도 같이 놓으면 좋지 않았을까?
‘김재완치과의원’ 로고타입 해석과 파생
지난 부산 여행(「한동훈의 글자발견」 #1 돌아와요 부산항에) 때처럼, 이번 여수 여행에서도 다양한 글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를 분석해보려 한다. 1일차 여행지였던 진남상가 주변의 ‘김재완치과의원’ 로고타입이다. 짧지만 독특한 특징을 지닌 글자다. 이 로고타입이 지닌 DNA를 다시 한번 짚어보자.
▷ 전체 글자틀은 받침이 있는 글자와 없는 글자의 높이 편차가 거의 없는 정네모틀에 가까운 모양이다.
▷ 모서리를 둥글린 라운딩이 획 중간중간 들어간 고딕 형태다. 특히 세로 기둥 시작하는 획의 큰 굴림이 특징적이다.
▷ [완]의 예외를 제외하면 중성과 종성이 연결된 낱자 형태를 갖고 있다.
▷ [김]의 초성 기역[ㄱ] 끝부분이 왼쪽으로 한번 더 꺾어진다. 보편적인 고딕은 걸리는 부분 없이 부드럽게 내려온다.
▷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초성 지읒[ㅈ], 치읓[ㅊ]으로 획이 왼쪽으로 뻗어 내려 오다가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꺾어져 넓어지면서 끝난다. 이는 급진적이지만 다른 자소로 판독될 위험이 적어 생각보다 널리 쓰이는 디자인 옵션이기도 하다.
▷ 세로 기둥에 붙은 [ㅏ] 등의 가로 곁줄기가 짧은 편이다.
▷ 초성 치읓[ㅊ]의 꼭지가 짤막하다.
▷ [완]의 섞임모임꼴 [ㅘ], [과]의 [ㅘ]와 비교했을 때 위아래로 붙은 기둥이나 누르는 부분이 없는 이음보([의]의 [ㅢ])만이 대각선으로 되어 있다.
▷ [원] 중성 [ㅝ]의 일부가 왼쪽으로 빠져나오며 종성 자리를 잡아먹었다. 종성 니은[ㄴ]이 그만큼 작아졌다.
DNA를 분석했다면 한글 원리에 의해 다른 낱자도 만들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전라남도 여수의 글자발견’ 이라는 견본 문자열을 파생해 보았다. 주요 글자 파생 방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전체 낱자의 글자폭은 원본의 느낌을 살려 1000unit로 넉넉하게 설정했다. 나머지 글자도 설명을 보면서 이유를 추측해 보거나 자신만의 방법으로 해석·응용한다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 [전]
[재]의 독특한 [ㅈ] 모양을 가져왔다. 다만 같은 크기가 되어서는 안 되며, 밑에 종성 받침이 치고 올라오는 만큼 더 작아져야 한다. 오른쪽으로 뻗는 획은 막고 있는 획이 없어 시원하게 그려 보았다. 중성 [ㅓ]와 종성 니은[ㄴ]이 결합한 부분은 [김]에서 가져왔다. 받침 [ㄴ]은 미음[ㅁ]에서 획 하나 제거한 정도가 아니라, 원래 차지하는 공간이 더 작은 만큼 세로 기둥도 내려가야 한다.
▷ [라]
초성 리을[ㄹ]은 단순한 형태로 만들 수도 있었으나, 조금 심심해 보여 변화를 주었다. 위쪽에서 꺾어져 내려오는 획을 수직이 아니라 약간 비스듬하게 만들었다. 중성과 연결될 듯하면서 끝나는 마지막 부분 커브는 [김]의 초성 [ㄱ]에서 가져왔다. 획을 다각도로 분석하여 그 특징을 서체의 온갖 부분에 자유롭게 적용해 보는 연습이 도움이 된다.
▷ [남]
일관성을 위해 초성 [ㄴ]의 시작 부분은 세로 기둥에서, 끝나는 지점은 [ㄹ]에서, 나머지 부분은 [김]과 [과]에서 가져왔다.
▷ [수]
원본 글자에는 세로모임꼴 시옷[ㅅ], [ㅈ], [ㅊ]이 없다. 따라서 디자이너 본인의 해석이 중요하다. 세로모임꼴에서도 가로모임꼴 [ㅈ]·[ㅊ]을 그대로 따라가면 가독성에 영향을 줄 수 있어, 획의 느낌을 살려 ‘이런 필법으로 [ㅅ]을 썼다면?’의 관점으로 새롭게 만들었다. 시작 부분은 수평으로 자를 수도 있었지만 개성을 위해 굴림을 넣어 디자인했다.
▷ [발]
원본 글자에는 비읍[ㅂ]이 없다. 이 역시 디자이너 본인의 해석이 중요하다. 이번에는 과한 개성을 넣는 대신 보편적인 규칙으로 만들었다. 획 시작 부분은 세로 기둥, 양 옆과 아래 가로획은 [ㅁ]과 공유하며 가운데 가로획을 막는 대신 살짝 열어서 두꺼운 글자에서 받기 쉬운 답답한 느낌을 해소했다.
종성 [ㅁ]에 비해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ㄹ]의 면적 설정도 중요한데, [ㅁ]이 차지하는 위아래 면적의 1.5배 정도로 설정했다. 많은 서체를 해부해 보면서 보통 어떤 자소가 어느 정도의 면적을 차지하는지에 대한 감각을 키워 놓으면 빠른 작업에 많은 도움이 된다.
여수엑스포역 근처에 위치한 스카이타워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1980년 처음 세워진 스카이타워는 동양시멘트의 시멘트 저장고로 쓰이던 구조물을 리모델링해 전망대와 카페로 만든 곳이다.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1박 2일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바다’를 느끼러 왔지만, 좀더 깊숙이 들어가면 그 포인트는 역시 ‘사람’이 아니었던가 생각해 본다.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산돌을 거쳐 ㈜티랩에서 근무했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 등에 글을 기고했으며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 온라인 플랫폼 클래스101, 이도타입에서 서체 디자인을 가르쳤다.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donghoonha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