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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훈의 글자발견 #12 ‘풍(豊)’의 도시 전주를 거닐다

    태조 이성계, 동학농민운동, 완판본, 그리고 『혼불』을 기억하는 도시 전주


    글·사진. 한동훈

    발행일. 2023년 02월 23일

    한동훈의 글자발견 #12 ‘풍(豊)’의 도시 전주를 거닐다

    명실상부 전라북도 중심 도시로 꼽히는 전주(全州)의 ‘전’은 온전하다는 뜻이다. 전주의 옛 지명은 완산(完山)인데 여기서 ‘완’도 완전하다는 뜻을 지닌 글자다. 그러니 전주는 예로부터 좋은 조건을 가진 도시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마지막 왕조인 조선 왕조를 건국한 중심 세력은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전주 이씨 가문이니, 전주가 전통과 저력을 지닌 입지라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특히 풍남동 일대 수백 채의 근대 한옥이 군락을 이룬 전주한옥마을 주변은 여행지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주말마다 캐리어와 함께 기차에서 내리는 수많은 외지인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전라선 KTX, itx-새마을, 무궁화호가 정차하는 전주역

    전주에 ‘풍(豊)’이 많은 이유

    전주한옥마을 서북쪽은 조선 시대 전주부(全州府)의 중심이었던 전주읍성 영역에 해당한다. 성벽과 동·서·북문은 세월의 흐름에 헐려 없어지고 남문인 풍남문이 유일하게 복원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풍남문은 고려 시대에 처음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의 문은 1978년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거친 것으로 숭례문, 흥인지문 등 서울 도성의 성문 규모에 익숙했던 눈에는 어쩐지 아담한 느낌을 준다.

    풍남문 현판에 쓰인 글자는 앞뒤가 다른데, 한쪽은 ‘豊南門(풍남문)’, 다른 쪽은 호남 지역 제일의 중심지란 자부심을 드러내는 ‘湖南第一城(호남제일성)’이란 문구가 쓰여 있다. 보물 제308호로 지정되어 있는 풍남문은 조선 후기 다른 문루(門樓, 궁문이나 성문의 바깥문에 지은 다락집)에서 볼 수 없는 건축 양식을 지닌 문화재로 평가받는다. 정유재란, 동학농민운동 등 굵직한 역사를 지켜본 귀중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풍남문 앞에는 작은 광장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고 있다.

    풍남문

    그런데 이름의 ‘남’은 남문이니까 그렇겠지만 ‘풍’은 어디서 온 것일까? ‘풍’은 ‘풍패(豊沛)’에서 온 말이다. 중국 진나라 이후 혼란에 빠졌던 중국 대륙을 재통일한 인물이 『초한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고조 유방이다. 그는 현재 중국의 강소성 패현에 해당하는 풍패 지역 출신이었고, 그 후 풍패라는 단어는 제왕의 고향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 풍패지향(豊沛之鄕). 조선 태조 이성계의 관향인 전주를 일컫는 또 다른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전주 시내에 ‘풍’자가 들어간 이름이 있다면 대부분 여기서 왔다고 보면 된다. 청주 시내에 많은 ‘주성(淸州, 청주의 풍수지리적 형세가 물위에 배가 떠 있는 모습 같다 하여 붙여진 별칭)’과 비슷한 경우다.

    풍남문 맞은편은 전주의 전통 시장인 남부시장과 바로 연결된다. 남부시장은 조선 시대 상설 시장의 발상지이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시장이라 한다. 남부시장 주변 거리는 1980~1990년대 간판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요즘 시장 내부는 정비 사업을 통해 디지털 폰트 일색인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시장 건물을 나와 바로 인근에 있는 주변 골목을 살피면 미처 정리되지 않은 귀한 글자꼴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 촬영을 하다 보면 목적을 궁금해하는 현지 상인들이 많은데 취지를 설명하면 곧 고개를 끄덕인다. 외부의 풍파를 견디며 원래 모습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상인들에게 글자꼴 수집 이유가 공감대를 형성하는 모양이다.

    남부시장은 본 시장뿐 아니라 그에 딸린 청년몰의 시초이기도 하다. 낙후되어 버려졌던 아담한 면적의 2층을 청년가게로 개발한 남부시장 청년몰은 모르고 지나치면 아까운 곳이다.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붐비는 아래쪽 시장과 달리 생각보다 안정된 분위기가 마치 다락방에 올라온 것 같다. 서점에 들러 책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바에 가도 좋겠다. 위치상 근처 한옥마을과 도보로 연계되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한옥 안에서 콘크리트 건물을 기억하다

    옛 전주읍성 자리의 중심에 전라감영 터가 있다. 전라감영은 조선 시대 지금의 전라도와 제주도 지역을 모두 관할했던 통치 관서로 조선의 존립 기간 내내 자리를 지킨 유서 깊은 기관이다. 옛 전라감영과 부속 건물은 1921년 전라북도청사 건립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소실됐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선화당도 1951년 불의의 화재로 모두 불타버렸다.

    이후 2005년 전북도청이 신청사로 이전하면서 전라감영 복원 문제가 대두됐다. 전주시와 전라북도는 논의 끝에 2015년 구 전북도청사를 철거하고 이 터에 전라감영 선화당, 연신당, 행랑, 응청당 등 7개 주요 건물을 복원하는 사업을 진행하여 1단계를 2020년 완료했다. 정면 기준 서쪽 부지는 터만 남아 있는데 추가 복원을 검토 중이라 하니 후에 더욱 많은 전라감영 전각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라감영 선화당
    옛 전북도청 건물이 있던 자리

    기존 전북도청은 철거 후 이전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아무리 근현대 건축물일지라도 60여 년간 도민과 호흡한 역사의 흔적을 이대로 지워버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전라감영 선화당 뒤편 연신당에서 옛 전북도청의 모습을 아카이빙한 작은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한옥에서 콘크리트 건물을 기억하는 전시라⋯. 그 반대인 현대식 건물에서 한옥류를 기억하는 전시에 익숙한 우리에겐 흔치 않은 구도다. 오랜 시간 전북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시간의 무게가 느껴졌다. 복원된 전라감영 정문 안쪽 잘 보지 않으면 모를 위치에 전북도청사의 벽돌 외벽 일부를 존치시키고 있다. 기왕 존치를 택했다면 마치 짓고 남은 벽돌더미가 쌓인 양 외부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보다 지붕 같은 별도 시설을 마련해 보호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성계의 호연지기 서린 오목대 / 전주객사와 ‘객리단길’

    한옥마을을 산책하다가 답답한 마음이 들면 근처 동쪽 언덕의 오목대에 올라가 보는 것도 좋겠다. 한옥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다. 고려 말기인 1380년, 이성계가 이끈 고려군은 전라북도 황산에서 왜구의 기세를 꺾고 승리를 거뒀다. 그 유명한 황산 대첩이다. 승장 이성계는 바로 이곳, 오목대에 직접 들러 승리를 자축했다고 한다.

    국사에서 왜구는 어쩐지 하찮아 보이는 명칭과 더불어 귀찮은 해적 집단 정도의 비중으로 다뤄지지만, 이 시기 고려를 침공했던 왜구들은 고려 정규군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조직적 약탈을 자행하는 등 그 세력이나 전투력에서 일개 도적떼로 보기 어려운 준 군사 집단이었다. 남원시 운봉읍에 있는 황산에서 벌어진 황산 대첩은 그런 왜구의 수십 년에 걸친 침입을 한 판의 회전(會戰)으로 결정적으로 꺾어버린 유의미한 전투였다. 대승을 이끈 이성계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흉흉한 난세와 이를 타개할 영웅의 탄생. 그리고 이를 보좌하는 강력한 병사의 존재. 어쩌면 고려 종말과 조선의 건국은 이때부터 서서히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오목대에 오르니 한국 보통 도시에서 볼 수 있는 풍경 대신 한옥 여러 채가 펼쳐진 것이 마치 시곗바늘을 돌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현대식 건물이 오히려 낯설어 보였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객사(客舍)는 외국 사신을 영접하거나 관리들이 국가 중대사를 집행하는 곳이었다.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활달한 초서체의 대형 현판이 인상적인 전주객사는 전주 지역에서 그런 역할을 했던 장소다. 객사 앞 문화재임을 알리는 표지판 제목이 [Yoon 고구려] 서체로 쓰여 있다. 받침이 초성·중성보다 크게 넓은 이 서체가 주는 당당함이 장소와 어울려서 채택된 것이 아닐까 가볍게 추측해 본다. 전주객사 주변 객사길에는 골목 상권이 발달해 있다. 이 일대는 어느새 ‘객리단길’이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객리단길에 들어선 각종 카페와 이자카야, 포차는 주말 약속을 즐기려는 객들로 붐빈다. 어깨를 부딪힐 정도는 아니지만 가게마다 빈 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천편일률적인 ‘-리단길’ 작명이 좋든 나쁘든, 이제 이 명칭은 작지만 번화한 거리를 일컫는 고유 명사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전주객사 ‘풍패지관’

    『동의보감』·『심청전』·『춘향전』·『홍길동전』 출판·보급했던 전주

    한옥마을 남쪽에는 완판본문화관이라는 전시관이 있다. 완판본(完板本)은 완산(完), 즉 전주에서 출판(板)된 고서를 말한다. 전라감영 내에는 종이 생산과 인쇄가 가능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여기서 『동의보감』을 비롯한 60여 종의 책을 출간하게 된다. 이외에도 『심청전』, 『춘향전』, 『홍길동전』 등 여러 한글 고전 소설을 출판·보급하는 등 전주는 과거 지역 인쇄 문화의 중심이었다. 완판본문화관은 이런 전통을 보존하고 재조명해 나가는 곳이다. 한 지역의 인쇄물이 한 카테고리로 묶여 특징적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쉽게 볼 수 없는 사례로, 완판본이 미친 영향력을 보여준다.

    문화관에서는 〈천자문, 천 개의 글자를 담다〉 전시가 열리고 있다. 주 전시물은 대장경문화학교 회원인 시민 각수(刻手) 24명이 천자문을 전통 판각 방식으로 새긴 목판이다. 이 책판은 전주 한지로 인쇄해 한자 학습 교과서로 출간할 예정이라 한다. 메인 아이덴티티는 가로세로 획 두께 차이가 큰 현대적 명조 계열 서체 [Sandoll 설야]를 활용해 디자인되었다. 이 서체가 지닌 삼각형 맺음이 목각과 어울린다.

    완판본문화관

    완판본이란 이름은 인쇄물에 그치지 않고 디지털 폰트에도 계승되었다. 2014년 처음 선보여 2017년 한글 고어를 더해 판올림된 [전주완판본체]가 그것이다. 옛 완판본 속 글자체에서 모티프를 얻어 디자인된 이 서체는 현대 한글 온자 조합인 11,172자를 전부 포함하고 있어 활용도가 높은 편이다. 한옥마을 같은 소수 시설에 한정되지 않고 공공 표지판과 시설 간판, 박물관, 종량제 봉투에 이르기까지 도시 곳곳에서 쓰이고 있다. 잡지에 나올 법한 멋진 브랜딩의 일환으로 기능하는 것도 좋지만, 전용서체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널리 쓰이는 것에 있다고 하겠다.

    [전주완판본체]는 완판본 원형에 충실한 완판본 각체, 특징을 순화하여 활용성을 더 좋게 만든 완판본 순체로 나뉜다. 각체와 순체 각 3종씩 총 6종의 두께를 가진다. 가장 먼저 보이는 둘의 차이는 [ㅇ] 꼴이다. 각체는 오각형에 가까운 반면 순체는 각진 부분을 둥글려 부드럽게 만들었다. [ㅅ] 꼴 내리점과 [ㄱ] 꼴의 맺음도 눈에 띄는 차이점이다.

    오래 걷느라 다리가 아프다면 근처 남천교 위의 정자 청연루에서 잠시 쉬어 가도 좋다. 한옥마을 남쪽을 흐르며 시가지와 한옥마을의 일종의 경계 역할을 하는 전주천에는 남천교라는 다리가 있다. 조선 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지금의 다리는 전해지는 옛 다리 형태를 바탕으로 2009년 완전히 새로 복원한 것이다. 다리 자체는 평범한 편이나 중간에 전통 한옥 형태의 청연루가 지어져 마지막 운치가 완성됐다. 청연루는 전주 8경 중 하나로 불린 한벽청연(寒碧晴烟)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한벽청연은 전주천을 굽어보는 정자인 한벽당 앞 바위에 부딪히며 피어오르는 물안개 풍경을 묘사한 말이다. 신발을 벗고 청연루에 올라 평화로운 전주천을 바라본다.

    남천교와 청연루

    역사는 박물관으로 승화되고

    전주 외곽 완산구 효자동에 위치한 전주역사박물관은 존재 자체로 도시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곳이다. 1층 로비에서 소소하게 목판 지도 인출(印出, 책판에 박아 냄) 체험을 하고 있어 도구를 두드려 종이에 먹을 찍는 소리가 박물관에 울려 퍼졌다.

    전주역사박물관

    전주역사박물관은 크게 고대부터 현대까지 전주 땅에 있었던 사건을 살펴볼 수 있는 전주역사실, 전주 한지와 완판본으로 대표되는 출판·음식·소리 등을 다룬 전주문화예술실, 구한말 역사의 격동기 속에서 전라도를 주 무대로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동학농민혁명실로 구성되며, 기획전시실이 따로 있어 일정 기간에 따라 전시가 바뀐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민화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독특한 부분은 동학농민운동이 상설 전시실을 따로 둘 정도로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반외세, 반봉건,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한울(하늘)이다.’ 운동은 실패했지만 역사가 그 주역을 인정하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을 떠올리면 1894년 12월 벌어진 우금치 고개 혈전을 빼놓을 수 없다. 전주 화약을 맺고 해산했건만 어리석은 중앙 정부는 기어코 호시탐탐 조선 정복의 기회를 노리던 외세에게 참전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다시 봉기했다. 공주 점령을 위해 진격하던 농민군은 12월 초 공주로 가는 관문인 우금치 고개를 지키던 관군 및 일본군과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전장식 화승총으로 무장한 농민군은 연합군이 지닌 후미장전식 소총과 단 몇 정의 개틀링 기관총에 총 병력의 약 70퍼센트가 넘는 사상자를 내고 대패, 붕괴되기 시작했다. 1890년대 중반 한반도 남부를 달군 동학농민운동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농민군의 패배는 예견된 것이었다. 우금치 고개는 기관총을 거치하고 지키기에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천혜의 지형이다. 조악한 무기만을 갖춘 대병력을 완전한 개활지에 배치된 자동화기 앞으로 밀어넣는 것은 전투라고 칭하기 어려운 학살 행위나 다름없다. 공주를 넘어 한성으로 진공해야 하는 농민군은 40~50회에 걸쳐 거듭거듭 돌격했지만 방어선에 근접하지도 못하고 대부분 전사했다. 당시 농민군뿐 아니라 중기관총이 계획에 따라 배치된 전선을 돌파할 수 있는 군대나 전술은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20여 년 후 전차의 발명 이후 비로소 가능해졌다. 그런 선진 무기가 외세도 아닌, 폭정에 견디다 못해 봉기한 자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사용됐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며 다시 있어선 안 될 비극적 역사라 하겠다. 관군을 지휘하며 동학농민군을 제압한 일본군은 곧 침략 본능을 드러내며 조선의 처리를 놓고 갈등을 빚던 청나라를 기습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동아시아의 정세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전주역사박물관 옆에는 국립전주박물관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다. 1990년 개관한 국립전주박물관은 전북 지역의 대표적인 박물관이다. 박물관이 소장한 전북의 중요 문화재는 4만 점을 헤아린다. 정문의 ‘국립전주박물관’ 현판 글자는 보통 공공시설처럼 붓글씨 기반 글자로 생각하기 쉽지만 가까이 가 보니 의외로 현대적인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부리를 수평으로 눕히고 세로기둥 맺음을 사선으로 자른 이 서체는 1986년 선보인 국립중앙박물관 로고타입을 기반으로 파생한 결과물이다. 건립 연대를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앞선 모습으로 선보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또한 시각 유산이 되었다. 본관의 파사드 양식은 왠지 천안 목천읍에 있는 독립기념관을 연상케 했다.

    국립전주박물관 현판 글자

    국립전주박물관 상설 전시실 중 하나인 선비서예실은 서예와 서예 용품 등 관련 문화의 발전 과정 전반을 방대한 유물을 통해 다루고 있다. [명필과의 만남 법첩], [조선 선비의 서예], [조선 왕실 서예], [선비 서화가 석정 이정직] 등 4개 섹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첩(法帖)은 옛 사람들의 유명 필적을 탁본하여 글씨를 익히고 감상할 목적으로 만든 책을 말하는데 서예 작품의 정수를 모아 놓은 베스트 앨범이라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조선 왕실의 본산 전주에 위치한 곳이다 보니 조선조 유물이 주를 이룬다. 서예는 매력 있는 분야다. 먹을 적당히 머금은 붓이 가진 기운과 탄력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다. 유물을 살피며 좋은 글씨를 향한 사람들의 열망은 무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붓 같은 연필(軟筆) 시대가 저물고 딱딱한 경필(硬筆)이 대세가 된 지금이라고 크게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조선’이란 단어를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일간지를 비롯해 적지 않은 곳에 그 이름이 남아 있고, 생활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점도 많으니 조선을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다. 조선 왕조의 본산 전주에 자리한 박물관의 전시품들은 피상적으로만 접했던 국가 조선을 온전히 마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주 오목대 비석 글자 해석과 파생

    오목대 앞, 이곳이 전라북도 기념물 16호 유적지임을 표시하는 비석에 새겨진 ‘오목대’ 글자는 다른 붓글씨 기반 음각 글자와 차별화되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위치 특성상 개발의 바람이 미치지 않고 표현 수단도 단단한 돌인 덕분에 제작 당시의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이 비석 글자의 주요 DNA를 살펴보자.

    ▷ 온자 전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상승하는 일정한 경사를 갖고 있다. 다만 그 정도는 온자마다 다르다.
    ▷ [오]와 [목]의 가로보가 불규칙적인 손글씨의 영향으로 경사와 모양이 서로 다르다.
    ▷ 세로줄기가 전체적으로 오른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져 있다.
    ▷ [대] 초성 [ㄷ]의 획이 두 개로 분리되어 있다.
    ▷ [ㅇ] 꼴의 상투가 날카롭지 않고 둥글며 거의 다른 획에 묻혀 있다.
    ▷ 가로보의 맺음이 살짝 아래로 떨어지면서 끝난다.
    ▷ [목] 초성 [ㅁ]의 경사가 심하여 거의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를 띤다.
    ▷ 온자 내에서 초성의 크기가 작다.
    ▷ [대] 중성 [ㅐ]에서 두 세로기둥 길이 차이가 많이 난다.
    ▷ [대] 초성과 중성이 만나는 부분의 각도가 거의 45도에 가까울 정도로 기울어져 있다.

    DNA를 분석했다면 파생 원리에 의해 다른 낱자도 만들 수 있다.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원본 글자를 정제하고 ‘글자발견 / 풍류의 도시 예향 전주’라는 문자열을 파생해 보았다. 좋은 글자본이 워낙 많아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한옥마을 인근에서 주를 이루고 또 주변 상인들에게 필요할 것이라 여겨지는 서정적인 명조 시안을 우선 만들어 보았다.

    굵기는 원본에서 가로세로 두께를 대폭 줄여서 레귤러에 가깝게 했다. 글자 폭은 온자 간 너비 차이가 없는 고정 폭, 각 940유닛(Unit)으로 설정했다. 판독이 신속하고 빨라야 하는 급한 글자가 아니라 여유 있는 호흡이 중요한 만큼 글자면 내에서 빈 공간의 비율을 크게 만들었다. 대표적 온자의 파생 방법을 설명한다.

    ▷ 가로모임꼴 민글자: [대], [시], [예], [자]

    [대]는 경사가 과한 부분을 수직 수평에 가깝도록 펴고 길이를 조정해준다. 초성 [ㄷ]과 중성 [ㅐ]가 닿는 부분은 굳이 붙이지 않고 다른 온자에서 보이는 아이덴티티를 살려서 띄어줌으로써 숨길을 만들어준다. 이렇게 정한 아이덴티티는 파생 시 다른 온자를 관통하는 콘셉트가 된다. [ㅐ]의 기둥 사이 가로줄기는 원본에 존재하는 경사를 유지하면서 필획 느낌을 살려 표현했다. 초성과 중성이 각각 차지하는 좌우 면적에 거의 차이가 없는 원본과 달리 파생할 때는 초성 면적에 비해 중성을 작게 잡아줌으로써 시각적으로 정리한다. [대]가 완전히 붙은 한 덩어리가 아니라 ‘[ㄷ] + [ㅐ]’의 결합으로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시]의 초성 [ㅅ]은 원본에 없으므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 원본의 가로보를 보면 시작하는 부분과 맺는 부분에서 돌출이 심하지 않고 부드럽게 마무리되고 있다. 따라서 [ㅅ]의 양쪽 빗침도 획 두께 차이가 심하지 않게 맺어준다. 다만 너무 둥글게 마무리하지 말고 적당한 각을 만들어서 얇은 명조가 가질 수 있는 맛을 살려준다.

    [예]의 기본 글자 틀은 [대]와 비슷하나 초성 [ㅇ]이 정원에 가까운 형태기에 온자 자체를 [대]보다 미세하게 넓혀준다. [ㅖ]의 가로줄기는 아래 줄기의 경사를 위쪽보다 크게 하여 상승하는 흐름을 살렸다.

    [자]의 초성 [ㅈ]은 [ㅅ]에서 따오되 차분하게 쓴 느낌을 살리고자 꺾임지읒보다 갈래지읒을 택했다. 중성 [ㅏ]의 짧은 가로줄기는 가로보를 잘라서 만들어도 되지만 특별한 느낌을 주기 위해 통일하지 않고 나뭇잎을 살짝 얹은 느낌으로 따로 만들었다.

    ▷ 가로모임꼴 받침 글자: [전], [발], [향]

    [전]의 초성 [ㅈ]은 [자]에서 따와서 받침만큼 위치를 높이고 좌우 폭을 줄여 만든다. 종성 [ㄴ]의 맺음은 가로보와 비슷하게 만들면 처져 보일 수 있어 획을 위쪽으로 빼서 마무리했다. 온자의 아래쪽은 평평하게 받쳐 주는 것이 안정적으로 보인다.

    [발]의 [ㅂ]은 세로기둥을 내리고 안에 가로획을 넣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만들되 가운데 가로획은 띄어서 개방감을 줌과 동시에 필기감을 강조한다. 받침 [ㄹ]을 ‘[ㄱ] + [ㅡ] + [ㄴ]’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을 때 [ㄱ]은 [목]의 받침을, [ㅡ]는 [목] 초성 [ㅁ]의 아랫부분을, [ㄴ]은 종성 [ㄴ]을 각각 참고하면 좋다. 다만 종성 [ㄴ]이 올 때보다 종성 [ㄹ]이 올 때 받침이 살짝 아래로 내려가는 경향이 있다. 공간을 더 많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향] 초성 [ㅎ]은 새로 만들어야 한다. 꼭지는 세우거나 눕히는 방식에서 벗어나, 『오륜행실도』 전용 활자체(일명 ‘오륜체’)의 경우처럼 얇게 시작하여 오른쪽으로 떨어지는 점 형태로 만들어 보았다. 이를 통해 고전적이면서도 기존 명조와 차별화되는 인상이 만들어진다. [ㅡ]와 [ㅇ]이 만나는 부분의 상투는 다른 [ㅇ]에 쓰인 상투보다 줄여주어야 어색하지 않다. 공간의 답답함도 그렇고, 좀더 작은 자소이기에 획도 소극적으로 그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성 [ㅑ]의 가로줄기는 [ㅏ]의 것을 반복하여 만들어주되 위치가 너무 올라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 세로모임꼴 민글자: [오], [도], [주], [류]

    [오]의 중성 세로줄기는 원본의 경사를 유지하되 자유 곡선에 가까웠던 획을 다른 획과 비슷한 정도의 곡률을 갖도록 만들어 통일성을 부여한다. 가로보 역시 곡률을 더욱 각지게 다듬어 먹이 적은 붓으로 쓴 느낌이 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와 함께 지나치게 높았던 경사를 낮추어 긴 글줄에서 안정성을 강화했다. 이 경사는 다른 온자에서도 모임꼴을 불문하고 통일시켜야 글줄이 어지러워 보이지 않는다.

    [도]의 중성 [ㅗ]는 [오]와 위치를 맞추고, [대]에서 보였던 획 분리를 [도]의 [ㄷ]에 동일하게 적용했다. 분리된 정도가 심하면 자소가 하나로 묶여 보이지 않을 수 있으므로 ‘특징’이라고 느낄 정도까지만 띄어 주면 된다.

    [주]의 초성 [ㅈ]은 [자], [전]의 특징을 그대로 적용하되 이 서체가 초성 크기가 작은 편이므로 양옆으로 지나치게 넓어지지 않도록 한다. [오], [도]의 초성 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한다.

    [류]의 초성 [ㄹ]은 [발]에서 보였던 요소를 활용해서 만들되 좌우 너비를 [ㅇ], [ㄷ], [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맞춰준다. 맨 아래 맺음 부분은 [발]의 [ㄹ]이 위쪽으로 맺은 것과 달리 가로보에 맞춰 아래쪽으로 마무리해준다. 온자의 아래쪽은 안정성을 가져야 하지만 [류]의 [ㄹ] 맺음은 온자 내 위치로 볼 때 중간이라 굳이 올려줄 이유가 없다. 물론 위쪽으로 맺는 것으로 통일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인접한 가로보 방향과 달라 시각적으로 충돌할 위험이 있다. 중성 [ㅠ]의 왼쪽 세로 줄기는 아래로 정직하게 내리는 대신 왼쪽으로 살짝 틀어 내림으로써 붓으로 쓴 듯한 맛을 살리고 명조체가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강조했다.

    ▷ 세로모임꼴 받침 글자: [풍]

    [풍]의 [ㅍ]은 원본에 없으므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 [ㅍ]의 가운데 세로획을 제작하는 방법은 통상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리점과 줄기로 만드는 것, 다른 하나는 줄기 두 개로만 만드는 것이다. 전자는 기존 명조체에서 많이 활용된 고전적 형태이며 후자는 서체 [본명조]처럼 작은 크기에서의 판독성을 중시하거나 나눔명조처럼 현대적인 명조를 만들고 싶을 때 주로 쓰인다. 여기서는 고전적인 형태를 채택했다. 내리점은 아래쪽 가로획에 살짝 걸치되 너무 합쳐져 답답해 보이지 않도록 약간의 공간을 만들어준다.

    원본의 요소를 어떻게 해석하여 적용하는가에 따라 갖가지 개성 있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이번에는 원본 특징을 그대로 살려 파생하는 대신 원본의 모티프만 가져와서 도시 분위기에 어울릴 수 있는 서체를 새로 개발하였다. 도시를 여행한다면 도시에서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거리에 맞는 서체를 구상해도 좋겠다. 이는 서체 디자이너가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한옥마을 중심부에 티 나지 않게 위치하여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최명희문학관은 전주 태생 소설가 최명희(1947~1998) 선생 생전의 원고와 일대기를 전시해둔 곳이다. 근처에 최명희 선생의 생가 터도 있는데 문학관과 생가 터를 잇는 길은 ‘최명희길’로 이름 지어졌다. 작가가 태어나서 중고등학교를 모두 다녔고 전북대학교 졸업 후 교사 생활을 한 곳이니 고장의 작가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최명희 선생의 육필 원고

    최명희 선생이 이름을 알린 계기는 일생에 걸쳐 집필한 대하소설 『혼불』이다. 전라도 방언 ‘혼불’은 사람의 혼을 이루는 바탕을 뜻하는데 사람의 몸에서 빠져나갈 때 맑고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고 한다. 인물이 가진 힘을 모두 그러모은 단단한 정수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런 의미가 책 표지의 ‘혼불’ 타이틀 캘리그래피에서도 느껴진다.

    1981년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 당선을 계기로 전업 소설가로 전향하여 작품 집필을 시작한 선생은 1996년 말 『혼불』 전 5부 10권의 출간을 보았다. 1930년대 전북 남원과 전주, 그리고 만주를 주요 배경으로 몰락해 가는 양반가 며느리 3대의 이야기를 그려낸 이 소설은 이야기 자체의 완성도와 더불어 당대 풍속, 명절, 음식, 노래 등의 고증에도 충실한 예술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전시실 한편에 선생의 친필 사인이 담긴 책이 펼쳐져 있다. 무심한 듯 정성 들인 티가 나는 필치가 아름답다. 글씨는 그 사람 정신의 지문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인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욱 강화된다. 잉크의 농담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맛은 역시 만년필을 따라갈 필기구가 없다.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사용자로서 선생이 원고 작성에 주로 사용했다는 ‘마이스터스튁 149’의 모습을 내심 기대했으나 전시된 만년필은 몽블랑의 그것과는 거리가 먼 모조품이었다. 진품이 두 개일 수는 없으니, 남원시에 있는 혼불문학관의 만년필이 진품으로 보인다.

    최명희 선생의 친필 사인과 만년필

    우연의 일치지만 비슷한 연대를 산 한글 디자이너 김진평(1949~1998) 선생의 일생이 떠올랐다. 분야는 달라도 삶 전체를 바쳐 좋은 결과물을 내놓았지만 그 때문인지 너무 일찍 떠난 비운의 창작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최명희 선생은 『혼불』 출간 후, 이 작품은 완간이 아니며 향후 한국사의 격동기를 이어 다룰 것이라 했지만 그 1막을 제외한 나머지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쓸 수도 없고 쓰지 않을 수도 없는 삶. ‘숙명’이라는 단어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서체 디자이너.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산돌을 거쳐 ㈜티랩에서 근무했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 등에 글을 기고했으며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 온라인 플랫폼 클래스101, 이도타입에서 서체 디자인을 가르쳤다.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donghoonha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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