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전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경상북도 경주(慶州). 고구려·백제와 더불어 삼국 시대의 한 축을 이루었던 고대 국가 신라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천년 고도로, 사찰이나 고분 같은 수많은 유적이 주 생활권에 산재한 도시다.
경주처럼 한 도시가 1,000년 가깝게 수도 역할을 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봐도 찾기 어렵다. 물론 현재의 위상은 그 시절에 미치지 못하지만 도시 전체에 축적된 문화의 힘은 여전하다. 아직 제대로 된 발굴 조사가 끝나지 않은 곳도 많아 그 고고학적 잠재력을 다 파악하기 어렵다.
신라는 삼국 통일을 이룬 삼국 시대 최후의 승자인 데다 수도 경주의 위치도 깊숙한 내륙이다. 그런 만큼 경토(境土)의 대부분이 휴전선 위쪽에 위치해 있다. 답사조차 어려운 고구려·발해 유적과 달리 일반인도 그 흔적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경주는 신라 시대에 ‘서라벌’, ‘금성(金城)’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현 지명인 ‘경주’는 고려 시대인 935년 처음 등장했다. 당연하게도 경주시의 심벌은 첨성대와 신라 금관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다시 본 신라, 신라인
경주에 왔다면 꼭 한번 들러야 할 국립경주박물관은 1945년 세워져 1975년 현 위치로 신축 이전했다. 건축 연대를 말해주듯, 익숙한 어떤 전직 대통령의 글씨가 현판에 적혀 있다. 아마 역대 대통령 중 전국에 자신의 필체를 가장 많이 남겨 두었을 이 인물의 글씨는 받침 [ㅇ]이 종성과 연결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초성이 크며 중성 가로줄기를 사선으로 내려쓰는 경향이 특징이다. 같은 필체를 더 보고 싶다면 남산1호터널처럼 1960~1970년대 만들어진 주요 국가 시설 주변을 살피면 된다.
박물관 본관(신라역사관·신라미술관·월지관·신라천년보고·옥외전시 등 5개관)과 특별전시관은 2층 높이 콘크리트 건물이다. 한국 전통 건축을 재현한 일명 박조건축(朴朝建築)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도기를 바로 연상시키는 계단 난간과 디테일이 좀더 은유적이면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들게 하지만, 신라 유산을 품은 호젓한 보고(寶庫)로서의 분위기는 충분하다.
크지 않은 경내에 의외로 여러 시설이 산재해 있다. 간단한 일정으로 둘러볼 계획이었다면, 실제 관람을 하면서 놀랄 수 있다. 외부 잔디밭에 놓인 석탑이나 불상 하나하나의 설명을 읽기만 해도 시간이 훌쩍 흐른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박물관 중 소장품이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방대하다고 하니 그 밀도를 짐작할 수 있다.
본관의 신라역사관은 크게 4개실로 나뉘어 신라의 건국·성장·번영·쇠퇴를 다루고 있다. 신석기, 청동기, 철기 순의 도구로 본 관점과 신라 연표로 본 관점이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되어 펼쳐진다. 보편적인 국사 교육을 받은 한국인이라면 신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라의 화려한 중요 유물도 이름은 몰라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 눈으로 마주한 방대한 유물과 자세한 설명은 ‘우리는 신라를 얼마나 알고 있었나?’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그 유명한 얼굴무늬 수막새(‘천년의 미소’, ‘신라의 미소’로 불린다) 실물도 관람했다.
1실, 2실, 3실에 이어 신라역사관을 이루는 네 번째 전시실은 ‘국은기념실’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국은 이양선(菊隱 李養璿, 1916~1999) 박사가 기증한 중요 유물을 따로 모아 놓은 전시실이다. 고대 한반도 무사의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이 특히 인상적이다. 요즘 유행하는 아트토이나 피규어를 생각나게 했다.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 나름의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와 비교해 신라를 폄하하는 의견도 한편에는 존재한다. 삼국 통일 과정에서 옛 고구려의 강역을 온전히 보전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도 그 이유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대인이 보는 관점이다. 역사는 그 자체로 흐를 뿐이다. 명확한 민족 의식이 지금보다 희박했을 당시 신라인들은 주어진 조건 하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고 힘쓰며 국가를 이뤄 나간 것밖에 없다.
신라 하면 멸망 직전 쇠퇴기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아 있던 차에, 생활 전반에 걸친 유물들은 한동안 기억 저편에 있었던 청년기와 중장년기 신라의 모습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한마디로 한반도 동남쪽 경주에서 출발해 번영했던 고대 국가 신라의 모습을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월지관의 일부 전시물을 빼면, 박물관 전체를 통틀어 글자 관련 유물을 찾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월지관은 흔히 안압지(雁鴨池)로 알려진 궁중 호수 월지(月池)에서 나온 유물을 전시한 공간인데, 신라인들의 실생활을 유추해볼 수 있는 유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와 달리 신라역사관이나 신라미술관에는 (불교가 흥했던 국가였던 만큼) 부처, 사천왕 조각 같은 불교 유적이 압도적으로 많다.
본관 옆 특별전시관에선 〈금령: 어린 영혼의 길동무〉 전시가 진행 중이다. 전시 디자인에 [안삼열체]를 활용하여 주요 전시물인 금제 장식품과 조화를 이뤘다. ‘금령(金鈴)’은 금방울을 뜻한다. 금령이 출토된 신라 능묘 금령총의 유물을 소개하는 전시인 것이다. 1924년 이루어진 금령총 발굴 과정과 당시 출토된 부장품을 관람할 수 있다. 당시 최초 발굴은 22일 만에 끝났지만, 94년 후인 2018~2020년 이루어진 3년간의 재발굴에서 무덤의 전체 규모가 새로 밝혀지고 유물이 추가로 출토되는 성과가 있었다.
금령총, 즉 무덤의 주인이 신분은 높지만 일찍 사망한 신장 1미터 내외의 어린아이로 추정되기에 전시명에 ‘어린 영혼의 길동무’라는 부제가 붙었다. 부장품들에서 시대를 초월한 ‘정성’이 느껴졌다. 외로운 길을 홀로 떠나야 하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지극한 마음일 것이다.
박물관 광장에는 경주 불국사의 명물인 다보탑과 석가탑 복제품이 서 있다. 처음 보면 화려한 다보탑에 현혹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고하게 뻗은 담백한 석가탑의 선에 끌리기도 한다. 디자인 방향에서 대척점에 서 있으나 상호 보완적 성향을 지닌 두 탑이 한글 서체의 명조와 고딕을 생각나게 했다. 신라미술관 뒤뜰에 서 있어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오리지널의 웅장한 힘을 자랑하는 고선사지 3층 석탑도 빠질 수 없다. 한글 서체로 치면 [AG 초특태고딕] 정도의 인상이 되겠다. 이 석탑은 옛 고선사지가 덕동댐 건설로 수몰됨에 따라 관련 유적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밤빛이 아쉬운 첨성대
경주 월성에 올라 도심을 내려다본다. 첨성대를 비롯한 주요 유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월성은 신라 수도인 경주에서도 왕이 직접 생활했던 궁성 역할을 한 토성이다. 위에서 보면 반달을 닮아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한다. 파사왕 22년(101년)에 쌓아 경순왕까지 52명의 왕이 머무른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주변의 남천을 자연 해자로 삼고 다른 방면은 인공 해자를 파서 방어의 기초를 갖추었다. 나라가 점차 발전함에 따라 성곽 안쪽뿐 아니라 월지와 첨성대를 비롯한 주변 시설까지 모두 아우르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왕성인 만큼 가장 화려한 전각과 유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는 모두 사라져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현재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라 하니 웅장한 원래 모습을 보려면 훗날을 기약해야 할 듯하다. 그 중요도를 감안하면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더라도 졸속으로 진행하면 안 될 일이다.
월성 동북쪽 경주역사유적지구 내에 위치한 신라 시대 천문 관측소인 첨성대. 아마 한국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고적을 꼽으라면 열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화강석 기단 위에 1년 365일을 나타내는 부채꼴 모양의 돌 365개 내외를 쌓아 만든 것으로, 아랫부분은 넓은 원통형이나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며 개방된 꼭대기가 우물 정(井) 형태로 마감되는 여러모로 특이한 조형물이다.
고지대가 아니라 평지에 위치했다는 점, 높이가 관측용으로는 낮다는 점 때문에 다른 용도였다는 설도 있지만 그래도 여러 정황 증거로 볼 때 천문대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능적 의문은 현대의 관점이고, 별자리로 국가의 길흉을 점치던 왕궁 주변 특수 시설이라는 상징성이 더 강했다는 얘기다.
1960년대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기념 사진을 보면, 반 학생 전체가 첨성대의 벽돌을 밟고 올라가 찍은 컷들이 있다. 보존 의식이 희박하던 시절의 산물이다. 지금은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출입을 통제한다. 야간에는 사방에 조명을 설치해 이를 비추는데, 어찌된 일인지 조명이 조형물의 본래 색을 보여주지 못하고 붉은 기가 강하게 돌도록 만든 것이 의아하다. 낮에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대한 본래의 옅은 황갈색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게 좋지 않을까?
황리단길과 중앙시장
서울 이태원 부근 육군경리단 주변 상권이 ‘경리단길’이란 이름으로 화제가 되면서 마포구 망원동의 망리단길처럼 유사한 ‘-리단길’이란 별칭이 붙은 길이 전국에 많이 생겼다. 경주 포석로 인근에 위치한 황리단길도 그중 하나다. 황리단길은 2030 세대에게 경주 관광의 메인 코스라 할 수 있다. 셀프 스튜디오와 서점, 카페, 테이크아웃하기 좋은 각종 먹거리 가게가 젊은 여행객을 유혹한다. 간판은 대부분 범용적인 디지털 폰트를 써서 특기할 사항이 없다.
그 가운데 몇몇 이자카야가 눈에 들어온다. 당위성을 따졌을 때 왜국과의 교류 산물이라고 하면 둘러대지 못할 것은 없겠으나, 기왕이면 타국 느낌보다 신라 문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새롭고 깔끔한 술집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전통 증류주에서 기원을 찾은 ‘원소주’처럼 치밀한 기획력이 뒷받침되면 SNS에서 화제가 될 수 있다. 술집뿐 아니라 지금의 인기를 살리면서 경주의 지역성을 더 녹일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히트 상품을 분별 없이 섞어 놓은 상권은 위기에 약하기 때문이다.
먹거리를 찾는다면 황리단길 근처 중앙시장에서 열리는 야시장도 돌아볼 만하다. 1983년 건립된 상가형 전통시장인 중앙시장은 의복부터 침구, 철물점, 야채, 식품, 건어물 등 웬만한 품목은 전부 취급하는 경주의 중심 시장이다. 중심 복도는 디지털 폰트로 꽉 차 있지만 안쪽으로 한 칸만 들어가면 이전부터 존재했던 수작업 글씨의 흔적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버스를 타고 생각 없이 지나다가도 뭔가 ‘거리’가 될 만한 간판을 발견하면 눈이 번쩍 뜨인다. ‘경주체육관’이라 쓰인 옛 간판을 철거하지 않고 아이덴티티의 일부로 그대로 활용하고 있는 카페 향미사가 그렇다. ‘경주체육관’ 서체는 네모 틀에 꽉 차고 획과 획을 연결한 모습이 1980~1990년대 양식 그대로다. 자형이 엄청 특이하진 않지만 오래된 간판을 의외로 찾기 힘든 경주 도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케이스다. 체육관이란 이름이 붙었으나 장충체육관 같은 거대한 규모는 아니다. 건물 크기로 봤을 때 복싱 체육관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향미사 고유의 블렌드인 ‘균형’과 ‘단아’ 중 하나를 선택해 마셨다. 멀리 고분이 보이는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경험은 흔치 않다. 그야말로 ‘경주스럽다’. 카페 한쪽 매대에서 로고가 박힌 노트를 판매하는 등 향미사 브랜드를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렇다면 평범한 로만 세리프 ‘HYANGMISA’로 된 로고타입 대신 바깥의 ‘경주체육관’에서 모티프를 얻어 디자인한 고딕 서체를 적극 활용하는 게 나을 것이다.
하늘을 나는 말들의 무덤
경주 대릉원은 거대한 고분이 유난히 많은 경주 시내에서도 대형 고분이 밀집된 구역이다. 대릉원에서 가장 잘 알려진 고분으로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들 수 있다. 1970년대 경주시 전체를 관광 지구로 개발하는 사업을 추진하면서 그때까지 민가에 섞여 방치되거나 관리가 부족했던 고적을 체계적으로 발굴·조사하여 구역을 정리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그 일환으로 추진된 천마총 발굴(1973)은 더 규모가 큰 황남대총 발굴에 앞선 테스트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수백 년간 도굴꾼의 검은 손길을 피한 결과, 기대를 뛰어넘은 유물 11,500여 점이 나왔다. 그 정점으로 대형 금관과 더불어 자작나무 껍질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진 말다래[백화수피제(白樺樹皮製), 죽제(竹製), 칠기제(漆器製) 등 세 종류]가 출토됐는데 여기서 천마총(天馬塚, 하늘을 나는 말들의 무덤)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일설에 의하면 말이 아니라 기린이다, 왕릉이 확실하니 왕릉으로 불러야 한다 등 설왕설래가 있지만 현재로선 천마총이란 고유 명칭이 굳어져 있다. 양식은 신라 고분 대표적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대릉원 고분 중 유일하게 내부를 출입 가능하게 조성하여 시신이 안치됐던 공간과 내부 전시품을 관람할 수 있다. 유물도 유물이지만 필자의 눈에는 1976년 세운 천마총 사적비나 입구의 ‘天馬塚’ 석재 현판, 입구에 걸린 주의 문구가 들어왔다.
1970년대도 현 시점에선 어느덧 40여 년을 지나 50여 년을 향해 가고 있다. 원형이 보존된 70년대 서체 역시 그 자체로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시각 유물이라는 생각이다. 천마총 발굴 성과를 안고 후속 작업으로 진행된 황남대총 발굴(1974)에서는 더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이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다. 황남대총은 따로 관람 시설을 만들지 않고 발굴 후 원형 그대로 보존 처리하여 외부에서 그 웅장함을 짐작할 뿐이다.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동궁과 월지
도시 중심부의 주요 고적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동궁(東宮)과 월지(月池)는 전각과 인공 호수가 함께 자리한 별궁 터로 경주의 대표적 왕실 유적이다. 조선 시대에는 쇠락한 도성의 폐허에 내려앉은 오리와 기러기를 보고 기러기 안(雁)에 오리 압(鴨)을 써서 ‘안압지’라 했다. 안압지는 꽤 오랫동안 이곳을 일컫는 정식 지명으로 통용됐다.
월지 주변 복원 공사 개요와 그 과정을 건축적 측면에서 다룬 월간 『건축문화』 1986년 3월호 「안압지와 복원건물」 제하 기사를 보면 “연못의 명칭은 기록된 바가 없어 신라 시대에는 무엇이라 불렀는지 알 수 없으나” 하는 부분이 있어, 이때까지 학계에서 ‘월지‘라는 이름이 통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토기 파편에 쓰인 ‘월지’라는 글자를 통해 원 이름이 밝혀진 지금은 왕자가 거처하는 곳을 의미하는 ‘동궁’과 ‘월지’를 합쳐 ‘동궁과 월지’로 부른다. 안압지가 워낙 유명한 명칭이었던 만큼 아직 그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월지가 기록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674년이다. 『삼국사기』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또한, 같은 왕 19년에는 궁궐을 화려하게 중수하고 동궁을 지었다“는 서술이 있다. 이것이 동궁과 월지가 문헌에 최초로 등장한 부분이다. 이후 1970년대 발굴 조사를 거쳐 주요 전각 세 채를 부분적으로 복원했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아 각각 1호, 3호, 5호 복원 건물로 부른다. 안압지와 월지의 관계처럼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이름도 바뀔 것이다. 주요 전각 세 채를 제외한 부분은 무리한 복원을 하지 않고 터로 조성해 놓았다.
호수는 어느 쪽에서 보아도 전체 모습이 보이지는 않도록 만들었다. 또한 호수 전체 모습은 당시 동아시아의 지형을 형상화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지나친 비약으로 넘길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월지를 다룬 여러 설명에 등장하는 진지한 학설이다. 이 경우 왼쪽 넓은 대지가 중국, 가운데 반도는 한반도, 오른쪽 섬이 일본을 뜻하며 가운데 작은 섬은 제주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설이 사실이라면 신라인들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거대한 자료가 되겠다.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출토 유물과 전체 복원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가위나 목간 같은 생활용품, 호수에 띄워 놓고 뱃놀이 용도로 썼던 소형 목선이 인상적이었다.
‘산호장여관’ 글자 해석과 파생
경주 노서동 시내 주택가에 위치한 숙박 시설인 ‘산호장여관’ 간판 글자는 붓의 흐름을 힘 있게 해석한 독특한 느낌을 준다. 제작 연대는 최소한 1990년대 초반이나 그 이전으로 보인다. 주변 건물의 현대화된 디지털 폰트 속에서 오랫동안 보존돼 온 것은 아마 ‘황리단길’로 대표되는 관광객의 발길이 여기까지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시간이 지나 표면이 벗겨지고 색이 바랜 부분도 있지만 전체 외곽선을 파악하기에 무리는 없다. 이 간판 글자의 주요 DNA를 살펴보자.
▷ 부리와 가로획 맺음의 변화가 심하고 날카롭다. 전체 글자의 인상을 정의할 만큼 크게 돌출되어 있다.
▷ [관]에서 중성과 종성이 붙되, 한 획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종성이 그대로 수직으로 뻗어 종성과 만나는 투박한 형태를 취한다.
▷ 명조의 변형이면서도 종성 [ㄱ]과 [ㄴ], 초성 [ㅁ]의 꺾이는 형태에선 [순명조]의 특징도 보인다.
▷ 초성 [ㅅ] 왼쪽 빗침이 획의 마지막 순간에 힘 있게 꺾이면서 끝난다.
▷ [장], [탕]에서 [관]과 마찬가지로 중성과 종성이 붙는다. 별도의 처리가 없이 획과 획을 바로 붙였다.
▷ [우]에서 초성과 중성도 붙여 일체형으로 만들었다. 제작의 난이도를 낮추려는 시도로 보인다.
▷ [관]의 중성에서 획과 획이 만나는 지점을 안쪽으로 둥글게 깎았다. 중성 가로줄기 [ㅏ]에도 비슷한 처리가 보인다.
▷ [여]와 [욕]에서 초성 [ㅇ]의 거대한 상투가 두드러져 보인다. [장], [탕]을 보면 종성으로 쓰일 때는 상투가 생략됐다.
▷ [욕]과 [우]에서 가로보 디테일이 다르다. 이 경우 디테일이 더 상세한 글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 전체적인 자소의 꺾임마다 미세한 굴림 처리가 되어 있다.
DNA를 분석했다면 파생 원리에 의해 다른 낱자도 만들 수 있다.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원본 글자를 정제하고 ‘글자발견 / 신라 천년 번영의 중심지 경주’라는 문자열을 파생해 보았다. 이 경우 글자의 모양과 지역적 특색을 연결시킬 수 있다. 간판 원본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우면서 당당한 이미지에서 화려한 신라 금관을 연상하여, 두 이미지를 연결시켜 디자인하기로 했다. 글자폭은 온자 간 너비 차이가 없는 고정폭, 각 960유닛(Unit)으로 설정했다. 대표적 온자의 파생 방법을 설명한다.
▷ 가로모임꼴 민글자: [여], [라], [자]
[여]의 지나치게 큰 초성 [ㅇ]을 줄이고 자소와 자소 사이에 들어간 굴림을 제거한다. 중성 세로기둥의 부리를 과장하여 캐릭터를 부여하고, 세로기둥 맺음은 수직으로 떨어져 심심한 감이 있는 원본과 달리 왼쪽으로 끌리면서 끝나는 듯한 특징을 주었다. 초성 [ㅇ] 상투는 크기를 줄인 후 부족했던 방향성(오른쪽에서 찍고 왼쪽으로 진행)을 강화했다.
[라]는 원본에 없으므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 자소 [ㄹ]을 속성상 ‘[ㄱ] + [ㅡ] + [ㄴ]’으로 나누어, [ㄱ] 부분은 [관]의 초성 [ㄱ]에서 가져온다. 수평 획의 맺음은 중성 가로줄기 맺음에서 힌트를 얻어 위쪽으로 치켜올리며 끝낸다. [ㄴ] 부분은 [관]의 종성 [ㄴ]에서 가져오되 초성과 중성을 평이하게 수평으로 결합시키면 지루한 감이 있으므로 오른쪽으로 올리며 변화를 준다.
[자]의 세로기둥 위치는 [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맞춘다. 초성 [ㅈ]은 원본에 맞춰 갈래지읒으로 만들었다. 급격하게 꺾이며 돌출된 왼쪽 빗침은 원본 그대로 두고, 오른쪽 빗침은 원본과 다르게 아래로 끌리는 듯한 흘림을 부여하며 마무리했다. 이는 심심한 획에 흐름을 더하는 포인트가 된다. [ㅈ]과 유사한 [ㅅ], [ㅊ]의 같은 부분에도 같이 적용한다.
▷ 가로모임꼴 받침 글자: [신], [심], [년], [번]
[신]의 초성 [ㅅ] 디자인은 [자]의 [ㅈ]을 바탕으로 하되 획 시작 부분은 중성 부리에서 가져온다. 중성 [ㅣ]와 종성은 원본을 따라서 잇되 평이하게 잇는 대신 획을 안쪽으로 깎아 준다. 이로써 답답해 보이는 공간을 해소하고 오른쪽으로 전진하는 흐름이 생겼다.
종성 [ㄴ]의 시작 부분은 수직으로 잘려 지루한 원본 대신 중성 부리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고, 끝부분은 중성 가로줄기 [ㅏ]에서 힌트를 얻어 살짝 과장되게 처리함으로써 온자 전체의 무게중심을 잡아 준다. 무게는 위쪽보다 아래쪽에 두는 것이 안정되어 보인다.
[년] 초성 [ㄴ]은 종성 [ㄴ]과 같은 디자인으로 처리하되 중성 [ㅕ]를 의식하여 가로획을 짧게 만든다. 공간이 적어 겹칠 수 밖에 없는데, 판독에 지장 없는 선이라면 괜찮다.
[번] 초성 [ㅂ]은 원본에 없으므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 속성상 ‘[ㄴ] + [ㅣ] + [ㅡ]’로 나누어, [ㄴ] 부분은 초성 [ㄴ]에서 가져온다. [ㅣ] 부분은 [ㄴ]의 세로획에서 따오되 부리가 화려하여 윗부분이 막혀 보일 수 있으므로 부리 크기를 줄여 준다. [ㅡ] 부분은 이미 온자 내에 개성적 요소가 많으므로 평범한 가로획으로 처리한다.
▷ 가로모임꼴 받침 글자: [탕], [경], [영], [발]
[탕] 초성 [ㅌ]은 원본에 없으므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 속성상 ‘[ㄴ] + [ㅡ] + [ㅡ]’로 나누어, [ㄴ] 부분은 초성 [ㄴ]에서 가져온다. 위쪽 [ㅡ]의 끝부분은 [ㄴ]의 끝부분 특징을 살짝 줄여서 만들고 가운데 [ㅡ]는 거기서 더욱 줄여서 만든다.
보통 동아시아권 서체 디자인에서 가로획 세 개가 연속될 경우 맨 아래 획이 특징이나 두께가 가장 강하며 맨 위쪽 획을 두 번째, 가운데 획을 가장 약하게 만든다. 다만 자소가 일정 두께를 넘어가 획 두께를 수정해야 할 때 그렇다는 것이며 보정이 필요 없는 얇은 서체라면 이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 종성 [ㅇ]은 원본보다 줄여서 넣는다.
[경] 초성 [ㄱ]은 [관]과는 달리 모임꼴이 달라지므로, [관]에 쓰인 초성 [ㄱ] 윗부분에 [ㅅ]에 쓰인 빗침을 결합해 만든다. 전체 서체의 조합 가짓수를 되도록 단순하게 잡았으므로 [영]은 [경]의 글자 틀에 초성만 바꾸는 것으로 처리할 수 있다.
[발]의 초성 [ㅂ]은 [번]에서 따오며 종성 [ㄹ]은 초성 [ㄱ]의 윗부분에 초성 [ㅌ]의 아랫부분을 결합시켜 만든다. 어떤 것과 어떤 것을 결합시켜 자소를 만들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한글 기초 자소 [ㄱ], [ㄴ], [ㅁ], [ㅅ], [ㅇ]이 각각 어떤 자소로 변용되는지 그 제자 원리를 숙지해야 한다.
▷ 세로모임꼴: [주], [욕]
[주] 초성 [ㅈ]은 [지]를 기초로 하되 위아래 높이를 낮추고, 오른쪽 빗침의 방향을 바꾼다. 가로모임꼴에서는 공간이 충분하여 아래쪽으로 흘리며 끝낼 수 있지만 여기서는 애매해지기에, 빗침을 위쪽으로 흘리며 맺는다. 이로써 아래 [ㅜ]가 들어갈 공간을 확보하고 다른 자소와의 통일감을 살렸다.
[욕] 초성 [ㅇ]은 이 서체의 [ㅇ]이 비교적 정원에 가까운 콘셉트이므로 위아래 높이를 늘려도 괜찮다. 납작한 [ㅇ]은 [ㅁ]과 거의 같은 면적을 차지하나 정원에 가까운 [ㅇ]은 심하면 [ㄹ]과 거의 같은 면적까지도 차지할 수 있다.
[ㅇ]이 정원에 가까워지면서 좌우 너비는 좁아진다. 이 경우 [ㅇ]과 결합되는 [ㅛ] 세로줄기의 처리가 애매해진다. 답답함을 피하기 위해 왼쪽 세로줄기는 부리에서 디자인을 차용해 날카롭게 빼고 오른쪽 세로줄기는 결합되는 부분을 안쪽으로 깎았다. 이로써 단조로움이 해소되고 왼쪽에서 시작하는 듯한 방향성이 생겼다.
원본의 요소를 어떻게 해석하여 적용하는가에 따라 개성 있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이번에는 원본의 특징을 그대로 살리면서 몇 가지 포인트를 잡아서 강화하는 쪽으로 파생 방향을 잡았다. 드러난 특징을 소극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과장에 가깝게 해석할 것인가? 판단은 디자이너의 몫이다.
맑은 하늘 속 ‘신라의 달밤’을 원했지만 여행 내내 날씨가 좋지 않아 기대했던 달은 볼 수 없었다. 얇은 비가 미스트처럼 뿌리던 조용하고 깜깜한 밤. 국립경주박물관 입구 오른쪽에 난 길로 남천을 끼고 걷다 보니 저 멀리 조명을 밝힌 월정교(月精橋, 달의 기운이 내리는 다리)가 나타났다.
월정교는 신라 경덕왕 19년(760년) 경주 월성과 남산 사이에 흐르는 남천을 건너기 위해 건설한 교량이다. 신라 이후 긴 시간 교량의 기능을 유지했지만 특정할 수 없는 시기에 유실되어 교각 기초 석재 일부만 남게 되었다. 1975년 조사를 시작으로 1980년대 대대적인 자료 수집과 복원 조사를 거쳐 2018년 최종 복원되었다.
복원된 월정교는 양쪽 출입구가 2층 누각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상부 구조 역시 전각으로 된 대단히 화려한 모습이다. 통일신라의 번영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다만 전해지는 자료가 부족한 만큼 복원된 모습에 대한 진위 논쟁이 있다.) 남천에 비친 월정교의 실루엣은 저절로 카메라를 꺼내게 만든다. 어느 편에서 보아도 아름답지만 월정교 측면 전체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조망하고 싶다면 바로 옆에 있는 징검다리 중앙이 가장 낫다.
월정교를 건너면 교촌한옥마을이 있다. 신라 최초의 국립대학 ‘국학’이 있었고 조선시대엔 향교가 위치해 ‘교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는 최부자 고택을 중심으로 한 전통 한옥이 많이 남아 있는데, 사이사이 공방이나 음식점 등으로 쓰이고 있어 월정교와 함께 돌아보기 좋다.
국립경주박물관을 시작으로 월정교, 교촌한옥마을, 황리단길을 거쳐 경주 일대 고적지, 그리고 월지와 동궁 탐방을 끝으로 신경주역에 도착하니 이틀 내내 뿌렸던 비는 사라지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천년 고도는 흐린 모습만을 보여 주었으나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맑은 고도의 또 다른 모습이 기대된다.
서체 디자이너.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산돌을 거쳐 ㈜티랩에서 근무했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 등에 글을 기고했으며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 온라인 플랫폼 클래스101, 이도타입에서 서체 디자인을 가르쳤다.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donghoonha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