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발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폰트를 만드는 서체 디자이너로서, 그것을 ‘단문 또는 장문의 재미있는 글자를 포착하여 일정 자수 이상의 서체 집합 혹은 디지털 폰트로 확장시키는 일’로 정의하고 싶다. 어쩌면 발견이란 말은 지나치게 협소한 관점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몰랐을 뿐 그것들은 언제나 그곳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만이 알았던 것을 온라인이나 폰트 파일이라는 광역의 매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널리 소개한다는 점에서 분명 ‘발견’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발견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간판 글자의 독창적인 해석 [배달의민족 을지로체]
을지로 3가와 4가 주변, 저층 건물이 밀집해 있고 각종 자재 상가가 영업 중인 일명 ‘을지로’로 통칭되는 지역에 가면,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붓으로 쓴 간판 글자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간판의 수량은 많아도 그 글자체를 자세히 보면 몇몇 경우로 한정되어 있다. 아마 그 일대 간판 장인 몇 팀이 돌아다니면서 고객의 주문을 받아서 작업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간판 글자 중 하나를 ‘발견’해서 디지털 폰트로 만든 것이 배달의민족에서 선보인 [배달의민족 을지로체](이하 을지로체)다.
손으로 쓰인 하나의 글자본은 디자이너마다 그리고 디자인 방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여기서 해석이라 함은 손으로 쓰여 통일되지 않은 요소를 어떻게 통일하고, 개성이 부족한 쪽은 어떻게 강조할 것이며 지나친 쪽은 어떻게 평범하게 다듬을 것인가 하는 고민을 말한다. 글자틀을 넓게 바꿀 것인가 좁게 바꿀 것인가 아니면 유지할 것인가. 애매한 빗침 끝을 날카롭게 키울까 아니면 아예 무디게 바꿀까, 이대로는 읽히기에 부족하니 받침 닿자를 키워 가독성을 높일 것인가 하는 모든 고려가 일종의 ‘해석’이다.
을지로체 디자이너는 ‘커다란 함석판 위에 밑그림 없이 힘차게 팔을 움직여 써 내려가는 장인’의 모습을 상상했다고 한다. 해석 또한 그런 장인의 쓰기 습관에 가까운 방향으로 결정될 것이다. 간판용으로 쓰일 커다란 이응[ㅇ]을 두 번에 걸쳐 그릴 것으로 예상하고 디자인한 초성 [ㅇ]이 대표적인 예시다. 오른쪽 끝이 열린 종성 비읍[ㅂ], 반면 지나치게 뻗은 붓 끝은 도톰하게 다듬었다. 그런 발견과 해석의 과정을 거친 결과 페인트 붓의 흐름을 살린 을지로체가 탄생했다.
을지로 일대의 붓글씨 간판은 규격화된 소재의 간판에 비해 사라지기 쉬운 재료로 쓰인 만큼 온전한 것과 지워지기 시작한 것, 거의 다 지워진 것, 지워진 위에 덧칠된 것들이 섞여 있다. 지워지기 시작한 간판과 거의 사라진 간판은 페인트가 뭉치거나 힘을 많이 받은 부분이 마지막까지 남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여준다.
여기에 착안해 추가적으로 선보인 을지로체 패밀리가 [을지로 10년후체], [을지로 오래오래체]다. 을지로 10년후체는 점차 지워지기 시작한 간판을, [을지로 오래오래체]는 거의 전부가 지워져 글자 윤곽만 남은 간판을 형상화했다. 실제 간판에 남은 붓의 결은 이를 모델로 한 폰트에도 해석과 유형화를 거쳐 그대로 남았다.
최근 한글 폰트에서도 종래의 천편일률적인 라이트, 레귤러, 볼드 등을 벗어난 여러가지 폰트 패밀리 구분법이 연구되고 있다. 웨이트[weight, 무게]라는 용어에서 착안해 서체 두께를 그램[g]으로 분류한 ‘HG꼬딕씨’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배달의민족 을지로체]는 여기에 ‘시간의 흐름’을 축으로 한 분류라는 독특한 예시를 하나 더 남겼다. 배달의민족은 이미 도깨비불 현상을 창의적으로 활용한 ‘한나체 Pro’ 같은 독창적 결과물을 선보인 바 있다. 앞으로 다양한 발상을 기반으로 한 배민 폰트 패밀리의 등장을 기대해볼 만하다.
귀중한 서체 유산의 재탄생 [Sandoll칠성조선소]
강원도 속초 교동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칠성조선소는 1952년 세워진 이래 3대째 운영하면서 소형 목조 어선 등을 주문받아 건조하던 말 그대로 ‘조선소’였다. 재래식 조선업이 흥하던 시절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조선 트렌드의 변화와 불경기로 조선업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2017년 사업 분야를 변경, 60여 년만에 공간을 새롭게 단장했다. 작업장 건물, 선박 인양 철로 등 기존 터와 시설을 유지하면서 용도를 전시관, 놀이시설, 북살롱, 카페로 바꿨다. 건물 터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바뀐 무분별한 ‘SNS 명소’로서의 개발이 아니다. 시설 개조를 최소화하고 내부에 장인이 제작한 목선을 재현해 놓는 등 칠성조선소가 간직한 조선이라는 전통을 간직한 진화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전통적인 작업 공간에 신개념 문화 공간의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리브랜딩이다. 시각 소통의 핵심이자 브랜딩의 기본 뼈대가 되는 것은 폰트다. 그런데 칠성조선소는 천혜의 자원을 이미 갖고 있었다. 조선소 시절 완성된 선박의 뱃머리에 쓰던 두꺼운 붓글씨는 마름모꼴 부리, 미음[ㅁ] 같은 독특한 자소와 두께가 특징인데, 건물이나 차량 등 에 쓰인 붓글씨와는 다른 고유성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현시대 각종 매체에서 무리 없이 쓰일 수 있도록 가공하여 디지털 폰트로 재탄생시킨 것이 [Sandoll칠성조선소]다.
[Sandoll칠성조선소]는 붓글씨 원도가 가지고 있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되, 가독성과 두께 등을 수정하여 사용에 무리가 없도록 디자인했다. 원본 글자에서는 세로 기둥 끝이 획의 한가운데로 길고 날카롭게 떨어지는데 이를 살렸다. 세로 기둥의 부리와 치읓[ㅊ], 히읗[ㅎ]꼴 꼭지는 두꺼운 붓으로 비스듬하게 쓰다 보니 마름모꼴에 가깝게 되었는데 이 또한 살렸다.
반면 극단적인 가로세로 획 대비를 가지고 역사다리꼴에 가깝게 떨어지는 가로모임꼴 초성 [ㅁ]은 좌우상하에 맺음을 가진 보다 전통적인 붓글씨 모양으로 다듬었다. 손글씨 원본은 같은 글자라도 변수가 많은데, 이를 기반으로 폰트를 만들 때 낱자에 모든 변수를 다 담을 수는 없다. 한데 모으고 분류해서 챙길 것은 챙기고 삭제할 것은 삭제하는 편집 작업이 이뤄진다.
전국 단위 프랜차이즈가 아닌 곳에서 전문 회사에 의뢰해 전용 폰트를 만든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Sandoll칠성조선소]는 전통 계승에 대한 창업주 일가의 뱃사람처럼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새 공간에서도 제 기능을 충실하게 해내고 있다. 화면상에서 기하 도형을 그려 깎고 조합하여 폰트를 만드는 것과 배를 만드는 일이 어쩌면 비슷한 결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목수의 숨결을 디지털로 옮겨 놓은 칠성조선소체는 그래서 더욱 친근하게 다가온다.
부활한 그래픽 유산 ‘CDR’ 7080
발견은 꼭 ‘길거리에서’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힌 과거 그래픽 디자이너의 유산 역시 그 가치가 재발견될 수 있다. 아이덴티티 전문회사 CDR어소시에이츠(CDR Associates)는 2018년 폰트 전문 회사와의 협업으로 과거 자사에서 작업했던 3종의 로고타입을 더욱 확장하여 각각의 디지털 폰트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로고타입이 아예 로만 알파벳 로고타입으로만 구성되는 경우도 있는 지금과 달리 과거엔 한글의 사용 빈도가 더욱 높았다. 많은 아이덴티티 전문 회사에서 한글 로고타입을 개발했지만 사명이 바뀌거나 흡수 합병 혹은 이미지 교체 등 여러 이유로 사장된 것들이 있다. 그들의 일부는 오래된 거리 혹은 제품에 남아 있지만 발견되지 않은 것들이 더 많다.(아래 CDR어소시에이츠 관련 이미지들 출처: Korean Design Heritage)
[CDR제스트]는 1978년 처음 선보인 제일합섬 로고타입과 전용서체(현재 같은 전용서체 개념이 아닌 로고타입의 디자인에 맞춰 빈출자를 드로잉한 것)를 바탕으로 만든 폰트다. 모태가 된 제일합섬 로고타입은 가로세로 획 대비가 심한 두꺼운 고딕을 바탕으로, 직각으로 마무리되는 자음의 왼쪽 모서리를 사선으로 깎아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글자다. 세로모임꼴에서 종성 [ㅇ]이 위쪽 가로보와 거의 한 자소로 보일 만큼 붙는 것이 특징적이며, 초성 피읖[ㅍ]은 수직 획의 왼쪽 아래를 깎아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고 있다.
[CDR플라우어]는 1983년 작업된 화장품 브랜드 피어리스의 로고타입과 전용서체를 바탕으로 만든 폰트다. 얇은 둥근 고딕 형태를 주조(主潮)로 네모틀에 꽉 찬 형태를 통해 주목성을 높였다. 피어리스 로고타입의 최대 특징은 획의 맺고 끊음에 있다. [ㅁ], [ㅇ]꼴을 닫힌 채로 마무리하지 않고 터준 모양이 독특하며 하나로 만나지 않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ㅊ]꼴도 일반 둥근 고딕과 다르다. 어찌 보면 최근 디자이너들의 레터링에서 등장하는 네온사인 분위기의 선구자격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소에 따라 중성과 종성을 이어준 디자인 방향은 [멋]자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CDR석류]는 1982년 처음 선보인 한국투자신탁 로고타입과 전용서체를 바탕으로 만든 폰트다. 모태가 된 한국투자신탁 로고타입을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명조체의 형태를 취하되 명조체의 바탕이 되는 ‘붓’의 1차원적인 흔적을 제거하여 명조와 고딕의 중간에 가까운 표정을 얻었다. 획의 각도를 수직과 수평 위주로 맞추고, 모서리를 둥글리며 시옷[ㅅ]꼴의 오른쪽 빗침이 물방울 형태의 맺음으로 끝나는 등 부드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특히 전통적인 붓의 움직임이라면 사선으로 시작하기 쉬운 [ㅅ]의 맨 위쪽 부리를 수직・수평이라는 전체 흐름에 맞추기 위해 수평으로 눕힌 것이 눈에 띈다. [영]이나 [형] 등 중성 기둥 밑에 받침 [ㅇ]이 올 때 획과 획을 연결해준 것도 특징이다.
이들 로고타입은 독창성이 돋보이지만 시대와 도구의 한계로 조형적인 면에서 현재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아쉬운 점도 있다. 예를 들어 특정 획과 획이 가깝게 붙어 있다든지, 자소 간 크기의 균형이 애매한 부분, 낱자의 한 쪽에 무게중심이 쏠리고 다른 쪽은 비어 보이는 것 등이 있다. 로고타입이 가진 기본적인 개성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 이런 아쉬운 점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졌고 결국 2,350자의 한글과 영문, KS코드 특수문자로 구성된 각각의 폰트 한 벌로 완성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폰트 3종을 만든 것에서 벗어나 과거의 수작 로고타입을 지속적으로 ‘발견’하여 디지털 폰트로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 범위는 대기업뿐 아니라 각종 중소기업이나 프로 스포츠 구단까지 미친다는 점에서 발견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위 사례에 해당되지 않더라도 사람마다 목소리나 자아가 다양한 것처럼 나타나는 글자체도 다양하다. 손으로 직접 썼든, 아날로그 도구를 사용했든, 아니면 디지털 도구를 사용했든 양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필자는 앞으로 그런 발견과 해석을 위한 소소한 여정을 떠나 보려 한다. 여정의 목적지는 바다 건너일 수도 있고 집 앞일 수도 있다. 글자는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산돌을 거쳐 ㈜티랩에서 근무했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 등에 글을 기고했으며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 온라인 플랫폼 클래스101, 이도타입에서 서체 디자인을 가르쳤다.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donghoonha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