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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민준의 서(書) #4 한글 고전 서체 이야기 ‘판본필사체’

    서예가 오민준의 캘리그래피 시론 ― 한글 고전 서체로 꾀하는 다양한 자형의 감성 표현 ② 판본필사체


    글. 오민준

    발행일. 2013년 01월 03일

    오민준의 서(書) #4 한글 고전 서체 이야기 ‘판본필사체’

    훈민정음 창제 당시 한글 창제의 주역인 집현전 학자들이 한자 행초서가 갖고 있는 필사의 필속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자의 전서, 예서, 해서 등이 실용과 필사에 있어서 행초서보다 신속 편리하지 않음을 일상에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자방고전(字倣古篆)’ 즉 한자의 고대 서체로서 실용 및 서사에 비경제적인 전서와 닮은 형태로 하였음은 한자와 구별되는 한글 스스로 고유한 모양을 갖도록 하려는 함축된 뜻이 담겨 있다.

    한글 판본고체의 고유한 특성과 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기에 알맞은 서체에서 세종은 곧바로 일반 백성의 한글 사용 실용화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글 보급에 중점을 두고 언해를 대량으로 간행하여 많은 사람에게 한글을 접하게 하였고, 또한 한글 사용을 권장하여 그 성과를 가지게 된다. 세종 이후의 왕들도 한글 보급에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세조, 성종, 선조에 이르러 한글 사용의 정착을 한글 고전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대량의 언해 간행은 서체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전의 딱딱하고 곧은 형태의 필선으로 쓰인 판본고체는 필사의 어려움이 크기 때문에 필사에 용이한 서체가 필요하게 되어 서체의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그렇게 변화되어 나타난 서체가 판본필사체이다. 판본필사체는 주로 목판본에 나타나며 거의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고 있어 ‘국한문 혼서체’라고도 하며, 궁체로 발전해 가는 과도기의 글씨체라고 볼 수 있다. 창제 당시의 특징인 수직과 수평이 깨지고 점획에 기울기나 강약이 생기는 등 한글 서체의 뚜렷한 변화를 보이게 되며, 자연스럽게 붓을 대고 누르는 모양으로 변하여 필사적 느낌의 서체가 나타나게 된다. 또한, 한글의 사용이 더욱 활발해지고 당시 송설체의 영향으로 전서보다는 해서를 많이 썼기 때문에 자체(字體)가 해서의 필법으로 자연스럽게 변화된 것이다.

    대표적인 판본필사체에는 <홍무정운역훈>, <월인석보>, <세종어제훈민정음>,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 <목우자수심결>,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분류두공부시언해>, <여씨향약언해>, <양주 영비각자>, <송강가사>, <조웅전> 등 많은 사적이 주를 이루며 유교나 불교의 경서들을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들이 많다.

    판본 문화는 필사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문학뿐만 아니라 한글 서체를 발전시켰으며 서민 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글 판본필사체의 고전자료

     [좌] 홍무정운역훈  [우] 월인석보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세종의 명에 따라 명나라 운서(韻書)인 <홍무정운>에 한글로 표음하고 주석을 붙인 것으로 신숙주 성삼문, 조변안, 김증, 손수산 등이 10여 년에 걸쳐 편찬한 것이다. 한자의 중국음을 정확히 나타내기 위하여 편찬한 ‘중국음에 대한 한글 표기 책’으로 간행 시기는 신숙주의 서문에 따라 단종 3년(1455년)으로 추정된다. 중국 자음을 소리글자인 한글로 기록한 점에서 중국 음운사 연구는 물론 한글 서체 변천사 연구와 활자 연구에 있어서도 소중한 자료가 된다. 목활자인 한글의 자형은 붓글씨의 영향을 받아서 둥근 원점이었던 아래아(ㆍ)까지 점획으로 바뀌었으며, 한자의 필획을 차용하고 있다. 이전의 한글 판본고체에서는 한자와 한글의 필의가 일치하지 않았으나, 자형과 필획이 한자의 형태와 거의 유사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가로획과 세로획의 기필, 수필을 보면, 한자 ‘十’, ‘正’ 자에서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필획에서 비수(肥瘦)의 변화가 나타나며, 세로획의 수필 부분을 왼쪽으로 가볍게 뽑아 쓰는 변화가 보인다. 이러한 필법의 변화는 후에 궁체 형성의 영향으로 미치게 된다.

    월인석보(月印釋譜)

    <월인석보>는 목판본으로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과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을 개고(改稿)해 합편한 것으로 신미, 수미, 홍준, 학열, 학조 등 고승과 유학자 김수온이 석가의 일대기를 쓴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 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내용은 <월인천강지곡>의 각절(各節)은 본문이 되고, 그에 해당하는 내용의 <석보상절>은 주석(註釋)과 같이 엮었으며, 연대는 세조 5년(1459년)으로 추정된다. <월인석보>는 판본고체에서 판본필사체형으로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인 자형의 변화는 크게 없으나, 아래아(ㆍ)의 둥근 점이 길어지고 한글의 원점도 없어졌다. 또한, 기필과 수필의 부분에서 한문 해서의 필의가 나타나면서 가로획과 세로획에서 약간의 동적인 느낌을 느낄 수 있다.

    [좌] 세종어제훈민정음  [우]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

    <세종어제훈민정음>은 새로 창제한 훈민정음을 설명한 한문해설서로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강희안 등 집현전 학자들이 지은 목판본이다. 언해본은 본디 한문으로 되어 있던 것이 1459년(세조 5년) 간행된 <월인석보>에 실린 훈민정음의 어제 서문과 예의(例義) 부분이 한글로 번역되어 〈세종어제훈민정음〉으로 합본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상 <언해본>이라고 한다. 훈민정음 원본의 한자가 정자에 가까운 행서체인데 반해 이 언해본의 한자는 필선의 강약과 굵기를 알맞게 나타낸 해서체이다. 한글의 자형은 해서의 필법으로 쓰여 기필, 행필, 수필의 단계가 분명하고 굵기 변화가 뚜렷하여 필사본의 느낌이 많이 나타난다. 한글 부분은 큰 글자와 작은 글자가 있는데 큰 글자는 글자길이가 짧아 정방형에 가깝고 아래아의 점이 길게 쓰였다. 모음의 가로획이나 세로획의 길이가 길어져 정방형의 자형을 벗어나게 된다. 특히 세로획은 좌상의 방향에서 기필하여 방향을 수직으로 바꾸어 내려그었고, 수필 부분에서는 가늘게 뽑아 쓰는 경향이 나타난다. 또한, 가로획의 기필, 행필, 수필에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며 오른쪽으로 가면서 약간 가늘어지고 수필은 둥글게 썼다. <훈민정음 해례본>, <동국정운>, <월인천강지곡>과는 달리 국한문이 통일된 필획을 이루고 있다. 이는 <홍무정운역훈>에서 시작된 필획 변화가 더욱 가속화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해석되어 진다.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

    세조 10년(1464년)에 혜각존자 신미가 학열, 학조 등과 함께 세조를 위하여 오대산 상원사를 중수할 때 지은 글로 세조와 상원사 및 신미와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역사적인 사료이며, 훈민정음을 제정한 이후에 필사한 가장 오래된 자료로, 조선 초기의 한글 서체를 살피는 데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세조 양전(兩殿)이 상원사 중창 때에 내린 권선문으로 1책은 한문으로 쓰였고, 다른 책은 국한문 혼용의 필사체로 썼으며 한글에 방점이 찍혀 있다. 한문 해서의 필법을 기필과 수필에서 볼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필획이 오른쪽으로 약간 올라가고, 기필, 행필, 수필의 단계를 분명하게 표현하면서 필세가 느껴진다. 또한, 초성의 크기가 대체로 작아지고 세로획이 길어지면서 공간감이 나타나며 자간과 행간의 조화는 물론 한자와의 조화가 잘 구성되어 있다. 판본고체가 이미 필사체로 변화하여 안정된 자형과 유려함, 그리고 세련미까지 느낄 수 있다.

    목우자수심결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세조 13년(1467년)에 고려 시대의 보조국사 지눌이 마음을 닦는 비결을 적은 선(禪) 이론서 <수심결>을 간경도감(세조가 불경간행을 위하여 설치)에서 국역하여 간행한 목판본으로 글씨는 당대의 명필 안혜, 유환, 박경 등이 썼다. 판면을 사주 쌍선으로 나타내고 한쪽을 9칸의 계선으로 그어 한문 원문은 한 칸에 쓰고, 해석은 한글과 한문으로 두 줄씩 배자 하였다. 한글의 자형은 긴 장방형으로 필획이 가늘어졌으며 이것은 한 줄에 두 행을 써야 하는 공간상의 제약을 받은 결과로 보인다. 전체적인 자형은 판본고체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나, 기필과 수필의 필획에서 필사체의 형태가 나타난다. 가로획, 세로획의 기울기는 보이지 않고 수평과 수직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한글에 방점과 아래아(ㆍ) 점을 표기하였다.

    [왼쪽부터]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 분류두공부시언해, 여씨향약언해

    몽산화상법어약록언해(蒙山和尙法語略錄諺解)

    중국 원나라 말기의 고승인 몽산의 법어 중 고려 승려 보제존자가 초록한 6편의 법어와 보제존자 자신의 법어 1편을 조선 초기의 고승 신미가 한글로 구결을 달고 언해하여 성종 3년(1472년)에 처음 간행한 목판본이다. 한문 원문 글씨의 아래 중앙에 한글 독음을 작은 글씨로 쓰고 국한문을 혼용하여 언해하였으며, 언해를 시작할 때에는 아무 표시 없이 한 칸을 낮추어서 시작하였다. 전체적인 자형은 판본고체와 큰 차이는 없으나, 자음과 모음의 기필과 수필 부분에서 한자 해서의 필의가 조금 나타나며, <월인석보>와 같이 가로획과 세로획은 수직과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방점과 아래아(ㆍ) 점을 사용하고 있다. 한자는 행서의 필의가 들어간 유려한 해서이지만 한글은 곧은 선으로 딱딱한 느낌이다.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의 시를 홍문관의 유윤겸이 언해하여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세종 25년(1443년)에 착수하여 38년 만인 성종 12년(1481년)에 간행된 것으로 전 25권이며, 활자체(금속활자본)로 편찬한 책이다. ‘두공부시’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두보가 ‘공부원외랑’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이며 ‘분류’는 중국 송나라의 ‘분문집주두공보시'(分門集注杜工甫詩)를 참고하여 따온 것이며, 흔히 <두시언해>로 통칭한다. 시문에 능한 학자들이 국역에 참여하여 한글로 표현된 유창한 문체와 풍부한 어휘 등이 다른 한시를 능가하는 국어 한시로서 당시의 국어사 및 한시 번역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글씨 서체는 한글과 한문의 서체가 유사하며 한시의 원문은 한 줄로 크게 쓰여 정방형으로 안정감이 있지만, 주석문과 언해는 두 줄로 쓰여 작고 긴 장방형으로 글꼴의 차이가 있다. 기필과 수필에서 한문 해서의 필의가 보이고 한글에는 사성의 방점이 표기되어 있다.

    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

    조선 중종 13년(1518년)에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이 그곳 인심, 풍속을 교화하기 위하여 송나라 여씨 형제가 만든 <향약>에 주자가 첨삭한 <여씨향약>을 한글로만 언해하여 간행한 활자본이다. 원전을 정확히 익히기 위한 ‘경서’ 언해와는 달리 이해가 쉽고 우리 실정에 맞도록 내용에 변화를 주었으며 주도 첨가하였다. 또한, 방점, ‘ㅿ’, ‘ㆁ’ 등이 모두 나타나는 중세 국어 자료로서, 또한 구결(口訣) 표기의 차자(借字)로서 국어사 연구에 가치가 있다. 특히 원간본이 지방에서 이루어진 점과 여러 차례 재간행되어 정서법과 어휘의 변화 상황을 확인할 수가 있다. 당시 중종반정 이후의 서풍은 사림파들에 의해 송설체에 회의를 느껴 왕희지체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던 때로 연미함보다는 단아하고 탈속한 서풍을 추구하던 때이다. 자형은 필사체의 형태로 글자의 중심을 오른쪽 서선(書線)에 두면서 자유분방한 장법을 취하였다. 받침 ‘ㄴ’, ‘ㄹ’은 마지막 획을 오른쪽으로 길게 하여 안정감을 취하고 있으며, 모음 ‘ㅓ’, ‘ㅕ’, ‘ㅣ’ 등에서는 세로획 기울기의 변화를 주어 세로획의 다양함을 느낄 수 있고, 초성의 자음보다 가로획과 세로획이 길어져 시원스런 자형을 취했으며, 획의 굵기 변화에서 유려함도 느낄 수 있다.

     양주 영비각자(클릭하세요)

    양주 영비각자(楊州 靈裨刻字)

    <양주 영비각자>는 현존하는 최초의 한글로 쓰인 묘비로 당대 문필이자 명필인 묵재 이문건이 부친인 이윤탁의 묘를 모친인 고령 신씨의 묘와 합장하면서 1536년(중종 31년)에 묘 앞에 세운 묘비로 이문건이 직접 찬(撰), 서(書), 각 (刻)을 하였다. 이 묘비는 앞면과 뒷면에 각각 묘주의 이름과 그 일대기가 새겨져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도 한글과 한 문으로 경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의 특징적 가치는 비석 왼쪽 면에 쓰인 한글 경고문인데, 당시 일반 백성의 한글 사용의 범위를 알 수 있으며, 이 시기의 한글 자료는 언해문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나 짧은 문장이기는 하지만 한문의 번역 표기가 아닌 순 한글로만 표현되어 국문학은 물론 한글 서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이나 <용비어천가> 등 훈민정음 반포 직후의 판본고체의 기본을 따르면서 이후 <월인석보>처럼 필사체의 초기 글씨로 가로획과 세로획의 기울기 변화는 크지 않지만, 초성은 작아지고 세로획의 길이가 길어졌의 굵기 변화가 보인다.

    송강가사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시인인 송강 정철(1536∼1593)의 가사와 시조 작품을 모아 엮은 가집(歌集)이다. 목판본으로 여러 이본(異本)이 있으나 그중에서 이선본, 성주본, 관서본의 세 판본이 전하고, 의주본과 관북본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 밖에 필사본이 가끔 발견되나, 완전한 모습을 갖춘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한자와 한글을 혼서한 것으로 한자로 된 것은 그 밑에 같은 크기의 한글 음을 달았다. 외형은 세로가 긴 직사각형의 자형을 이루고 있고 아래아(ㆍ), 세로획, 모음의 점 등을 해서체 형태로 쓴 것을 볼 수 있으며 방점은 없다. 또한, 한글의 종성은 글자의 가로 크기보다 작게 쓰여 있고, 세로획은 기필과 행필, 수필이 각기 다른 운필을 보이는데 기필은 짧고 가늘게 하고 행필은 굵게 수필은 전체적으로 둥글게 표현하면서 다양한 변화가 보인다. 육필(肉筆)을 방불케 할 정도로 유려하다.

     [좌] 송강가사  [우] 조웅전

    조웅전(趙雄傳)

    조웅전은 조선 후기에 널리 유행했던 한글소설 중의 하나로 저자와 창작 연대를 알 수 없으나, 18세기 후반이나 19세기 초로 보고 있다. 필사본은 물론 판각본으로도 경판, 완판, 안성판으로 간행된 바 있으며, 활자본은 10여 종가량이나 알려졌다. 내용은 송나라 조웅의 활약상을 그린 것으로 임금과 신하 간의 충의를 주제로 한 군담소설이다. 글자의 가로 서선(書線)은 오른쪽을 다른 서체에 비해 많이 올려 운필하였고, 흘림체형으로 자간의 연결화가 나타난다. 특히 부분에 따라 흘림 정도를 약하게 표현하기도 하고 강하게 표현하기도 하여 쓰는 등 시기에 따라 각기 다르게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징을 살펴보면 종성 ‘ㄹ’에서 대부분 흘림의 형태가 나타나지만, 초성 ‘ㄹ’에서는 정자의 형태로 표현하였다. ‘ㅇ’은 둥근 형태가 아닌 삼각형에 가까운 형태를 취한 특징이 있다. 모든 글씨에 강한 방필화가 나타나 판본의 맛을 더해준다.

    한글 판본필사체의 막대한 영향을 준 조맹부

    조맹부의 글씨

    조맹부(1254~1322)는 정치, 경제, 시서화에 넓은 지식을 가졌으며, 특히 서화에 뛰어났다. 중국 송나라 종실 출신으로 원나라의 화가 서예가이며, 자는 자앙(子昻)이고, 호는 집현(集賢), 송설도인(松雪道人)이다. 서예에서는 안진경의 박력 있고 균형 잡힌 서체를 따르던 주류를 넘어 왕희지의 우아하고 서정적인 서체를 본받아 자신만의 ‘조체’ 또는 ‘송설체’를 만들었으며, 글씨와 그림은 근원이 같다는 ‘서화동원(書畵同源)’을 주장하였다. 그림에서는 남송의 원체화 화풍을 배격하고, 북송의 화풍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림은 산수, 화훼, 죽석, 인마 등 모든 부분에 뛰어났으며, 서예는 특히 해서, 행서, 초서의 품격이 높았으며, 당시 복고주의의 지도적 입장에 있었다. 조맹부의 ‘송설체’는 고려 말에 수용되어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 성행하였고,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서체로 쓰였으며 토착화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송나라 태조의 후손이면서도 원나라를 섬겼던 조맹부이기 때문에 후세에 명분상의 비난을 면하지 못했으며, 정치 세력의 교체와 함께 ‘송설체’에서 왕희지 중심의 서풍으로 변하게 되었다. 조맹부의 ‘송설체’의 수용은 신라 이후 왕희지, 구양순 중심의 서풍에서 벗어나 일대 전환을 하게 된 점과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서예가인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최초의 서예유파를 탄생시킨 부분은 서예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글 판본필사체를 정리하며

    한글 창제 당시의 서풍은 고려 말에 수용된 조맹부의 ‘송설체’가 유행하고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서체로 쓰였다. ‘송설체’는 한글 서체에도 많은 영향을 주어 한글 창제 당시의 판본고체에서 판본필사체로 빠른 시기에 서체변화를 하게 되었다. 또한,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대부들 사이에 시조와 가사문학이 유행되어 판본필사체가 다양하게 발전하게 된다. 판본필사체의 특징을 살펴보면 정사각형에 가까운 자형에서 직사각형 또는 사다리꼴을 세워 놓은 모양의 자형으로 바뀌었고, 획의 굵기와 가로획의 기울기가 생겨 판본고체보다 동적인 느낌이 생겨 생동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획의 운필 방향이 판본고체보다 다양하여 단순한 맛에서 다양한 조화미를 느낄 수 있으며, 획이 모가 나지 않고 원만하여 원숙한 느낌을 준다. 판본필사체는 판본고체에서 일정한 굵기를 유지하던 획이 필사본의 필의를 살려 기필, 행필, 수필의 뚜렷한 변화가 보이면서 운필상의 다양함을 가져왔다. 이러한 판본류 서체가 필사화되고 붓글씨의 맛이 가미되어 아름다움이 한껏 더하게 되었고, 정돈된 멋과 자연스러움을 표출해내기도 한 궁체나 민체의 형성을 가져오게 된다.

    오민준
    현재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에서 대학정통서예를 공부한 후 신고전주의 캘리그라피/서예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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