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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원의 한글 이야기 #6 한글에 대한 조상들의 인식

    한글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인식은 어떠했을까? 한글을 언문 내지는 ‘암클’이라 하여 멸시했다는데 이게 사실일까? 이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 글을 작성한다.


    글. 박창원

    발행일. 2014년 04월 03일

    박창원의 한글 이야기 #6 한글에 대한 조상들의 인식

    한글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인식은 어떠했을까? 한글을 언문 내지는 ‘암클’이라 하여 멸시했다는데 이게 사실일까? 이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 글을 작성한다.

    1. 임금이 창조하여 문자의 역사를 바꾼 글자이다

    세종이 창제하다

    한글은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이 재위 25년 12월(1444년 1월)에 창조한 문자이다. 당시 조선은 조선어의 특징을 잘 표기할 수 있는 고유한 문자가 없어서 그 의사 표시를 한문으로 하거나,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표기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한자와 한문을 알아야 변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이 활용하기에는 매우 어렵고 불편하였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문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고유한 문자를 창제한 것이다. 새로운 문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세종실록(세종 25년 12월조)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다. 그 글자는 고전과 흡사하다.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지만, 이를 합친 연후에 글자가 이루어진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우리 말에 관한 것은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요하지만 전환하는 것은 무궁하다. 이 문자는 훈민정음이라고 이른다.

    是月上親製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爲訓民正音.

    문자의 역사를 바꾼 문자이다

    한글이 창제되는 15세기에 지구 상의 인류가 사용하는 문자는 뜻글자이면서 단어문자인 중국의 한자. 한자를 변형시킨 일본의 음절 문자, 소리글자이면서 음소문자인 로마 문자와 키릴 문자, 셈 족의 문자가 동쪽으로 전해져 티베트나 몽골에서 사용하던 음소문자인 티베트 문자와 몽골 문자, 셈족의 문자가 또 다른 경로로 동쪽으로 전해져 인도와 동남아 등지에서 발전되어 음소 문자 등등이었다. 이러한 문자의 역사는 단어문자로 출발한다. 고대 문명을 일으킨 5,000년에서 7,000년 전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등에서 완성된 문자는 모두 단어 문자에 기반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자 중 메소포타미아 문자와 인도 문자는 소멸하고, 중국 문자는 인근 국가에 전해져 변개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본국에서는 여전히 단어 문자로 사용되고 있고, 이집트 문자는 인근의 셈족에 전해져 음절 문자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셈족의 일파인 페니키아 종족이 그리스 종족에게 문자를 전파하여 지금으로부터 대략 3,000년 전쯤에 음소 문자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 문자가 로마 종족과 슬라브 종족에 전파되어 지금까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고 있다.

    지금부터 대략 600년쯤 전에 조선에서 훈민정음을 만들게 되는데, 이는 음소를 구성하고 있는 조음 기관들의 모양이나 방식(음소의 자질이라 함) 등을 관찰하여 이를 문자의 제자에 반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음소의 조음 위치나 방식 등 자질이 문자에 모양에 반영된 자질 문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는 인류가 만든 문자의 역사를 바꾸는 것이다. ‘단어문자 ⇒ 음절 문자 ⇒ 음소 문자’의 단계에 있던 문자의 발달사를 ‘단어문자 ⇒ 음절 문자 ⇒ 음소 문자 ⇒ 자질 문자’로 변화시키는 창제를 한 것이다.

    이렇게 한글은 그 자형으로 그 음가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문자학자 샘슨(Sampson)은 한글은 자질체계문자(featural system writing)라고 하였고, 유네스코에서는 1989년 문맹 퇴치에 애쓴 사람한테 상을 주기 시작했는데, 그 상 이름을 ”세종대왕 문맹퇴치상’이라 하였다. 그리고 1997년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올려놓았다.

    플리커 Republic of Korea(CC BY-SA)

    2.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과목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다

    국가의 각종 문서를 한글로 간행하다

    완성된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세종 27년 4월(1445년)에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 세종 29년 5월(1447년)에 간행하였다. 목판본 10권 5책 모두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로서, 한자와 훈민정음을 병용한 것인데, 훈민정음으로 엮어진 최초의 책이 된다. 그 후 세종은 “어리석은 남녀노소 모두가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세종실록〉(세종 26년),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도록 했으며, 세종 이후의 문종, 단종, 세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운서와 불경서, 문학 작품 등 다양한 종류의 책이 번역된다.

    과거의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다

    과거(科擧)란 옛날에 국가를 관리할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실시한 시험이다. 관리를 채용할 때 시험을 보게 된 것은 중국에서 시작하였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원성왕 4년(788)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실시하여 인재를 선발하기 시작하였고, 고려 시대에는 광종 9년(958) 때 과거 시험을 실시하여 인재를 뽑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의 과거 제도에는 문신을 뽑는 문과와 무신을 뽑는 무과 등 양과가 있었다. 문과에는 소과와 대과가 구분되는데, 소과는 하급관리를 뽑는 것이고, 대과는 소과에 합격한 사람 중에서 고급 관리가 되기 위한 사람을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소과는 다시 일반 관리를 뽑는 생원·진사과와 기술인을 뽑는 잡과로 구분되는데, 잡과에는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등이 있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한 직후인 28년 12월에 “이조(吏曹)에 임금의 명령을 전하기를 ‘이제부터는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에서 인재를 선발할 때에는 훈민정음을 함께 시험하여 뽑되, 비록 그 뜻과 이치가 통하지 않더라도 능히 합자할 수 있으면(낱자를 합하여 음절로 운영할 수 있으면) 채용하라’고 하였다.(傳旨吏曹 今後吏科及吏典取才時 訓民正音並令試取 雖不通義理 能合字 取之)”하여 과거의 시험과목으로 채택되는데, 이와 관련된 실록의 기록을 뽑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듬해인 세종 29년(1447년) 4월에는 각종 시험에서 훈민정음에 대한 시험을 강화하게 된다. “이조에 전지하시기를 ‘지금부터 이과와 이전취재 시에는 훈민정음을 같이 시험하여 뽑아라. 비록 뜻과 이치가 통하지 않더라도 능히 합자할 수 있으면 채용하라.’고 하셨다.” 傳旨吏曹 今後吏科及吏典取才時 訓民正音 並令試取 雖不通義理 能合字者取之(세종 28년 12월)

    세조 6년 禮조에서 계하기를 훈민정음은 선왕이 만드신 책이고 동국정운과 홍무정운은 선왕이 찬정한 책이고 이문은 사대에 절대적인 것입니다. 청하건대 ‘지금부터는 문과 초장에 세 책을 강론하는 것이 시험하고 사서와 오경의 예에 의하여 등급을 매기고 종장에는 이문을 같이 시험하여 대책의 예에 의하여 등급을 매기겠습니다.’고 하여 그대로 따르다. 禮曹啓 訓民正音 先王御製之書 東國正韻洪武正韻 皆先王撰定之書 吏文又切於事大 請自今 文科初場 試講三書 依四書五經例級分 終場並試吏文 依對策例給分 從之

    세조 7년 예조에 전지 하시길 임오년 문과 시험에서는 운서 등 잡서를 시험하지 말고 이전의 예에 따라 시험을 치라 傳旨禮曹曰 壬午年文科試取時 勿用韻書等雜書 依前試取

    3. 궁정에서부터 한글이 사용되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훈민정음은 과거의 시험과목으로 채택되기도 하고,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훈민정음의 사용 범위를 넓히는 효과를 봐왔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문은 창제 초기부터 광범위하게 그 사용 영역과 범위를 넓혀 간다. 임금이 정무를 보기 위한 내리는 지침에도 사용되고, 임금에게 아뢰는 말씀이나 궁인들끼리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으로 훈민정음은 그 사용 영역을 넓히게 되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임금의 업무와 관련된 한 예를 보기로 한다.

    임금이 업무 지시를 한글로 하였다

    임금의 업무 지시서로서 언문이 사용되는데, 세종이 신하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교서를 언문으로 작성하여 보내었다. 임금이 대간(臺諫)의 죄를 일일이 들어 언문(諺文)으로써 써서, 환관(宦官) 김득상(金得祥)에게 명하여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이게 하였다. 甲辰/上數臺諫之罪, 以諺文書之, 命宦官金得祥, 示諸義禁府承政院。세종 28년 병인(1446, 정통 11) 10월 10일 (갑진)

    신하가 임금에게 한글로 글을 보냈다

    신하가 임금에게 보내는 글에서도 언문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양녕대군이 문종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다음의 기록이 있다.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가 언문(諺文)으로써 짧은 편지를 써서 아뢰니, 그 뜻은 김경재(金敬哉)로 하여금 상경(上京)하여 그 딸을 시집보내도록 하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정부(政府)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讓寧大君禔, 以諺文書, 短簡以啓, 其意則請使金敬哉上京, 嫁其女子也。 下政府議之)(문종 1년 신미(1451) 11월 17일)

    4. 임금이 백성과 대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대에 오면 한글은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정조대에는 많은 한글 문헌이 간행된다. 특히 정조는 흉년이 들거나 도적 떼가 창궐하는 등 일반 백성들에게 안 좋은 일이 있을 경우 임금이나 조정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려 민심을 수습하는 방편으로 한글로 윤음을 내렸다.

    경기도 백성에게 내리는 윤음

    경기도 백성에게 내린 윤음 〈유경기대소민인등윤음〉은 정조 6년(1782년) 8월 13일에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해에는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등에 흉년과 홍수 등으로 피해가 많았는데, 유독 경기도가 더 심해 경기도 백성에게 윤음을 내렸다고 한다. 그중 일부를 현대어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왕이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아, 너희 기전(경기 지방)의 백성들아, 나의 마음으로 이르는 것을 잘 들으라. 내 일찍이 주례를 보니 흉년에 행하는 열두 가지 정사 중에 정부(세금을 문다는 말)를 가볍게 함이 그 순서로 두 번째에 있는데, 조세를 가볍게 하는 요체는 세금을 더는 것과 환곡을 감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여섯 도의 백성에게 내리는 윤음

    1782년에 이어 1783년에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등에 큰 흉년이 들자, 때마침 원자의 돌을 맞이하여 왕실의 경사를 백성들과 함께하여 민심을 수습하려고 정조가 윤음을 내린다. 내용 일부를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왕이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이날은 곧 내 원자의 첫돌로 좋은 시절이다. 오직 하늘과 조종이 묵우하시고 음즐(묵우와 음즐은 가만히 도우신다는 말씀이라)하시어 이에 원자의 채복을 입고 구슬을 가지고 놂으로써 우리 자전과 자궁께 즐거움을 드리는 것을 보니 이 어찌 홀로 내 한 사람의 경사리오.

    맺음말

    위에서 보듯 훈민정음은 창제 후 몇 가지 시련을 겪기도 하지만, 임금이 창조하여 궁 안에서부터 사용되었기 때문에 지속적해서 사용영역을 확산하여 우리 민족의 공용의 보편적인 문자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한글을 ‘암클’이라 한 것은 한자를 사용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글을 폄하하고, 또 한자 쓰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논리의 정당성을 역사적인 것에서 찾기 위해 왜곡시킨 것이다.

    박창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어학을 연구하고 교육하고 있으며,
    한국어세계화재단 운영이사, 국립국어원 어문규범연구부장을 지냈다.
    〈훈민정음〉, 〈중세국어자음연구〉 등 100편 내외의 연구업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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