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제작 현장에서 일하다 보니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들로부터 저작권 관련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중 하나가 ‘짧은 문구(short phrases)’도 저작물에 해당하느냐는 것이다. PD들은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대중 사이에서 유명해진 책 제목이나 광고 문구를 그대로 갖다 쓰고 싶어 한다. 노래나 책 제목, 광고 문구, 상품명, 슬로건, 캐치프레이즈 같은 ‘짧은 문구’는 항상 이슈가 되곤 한다.
짧은 문구 #1. ‘내가 제일 잘 나가’
필자가 저작권 강의를 할 때 ‘내가 제일 잘 나가사끼 짬뽕’ 이야기를 들려주면 다들 재미있어 한다. 손해배상 소송까지 간 당사자들에겐 심각한 일이었겠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엔 ‘이런 일도 있네’라는 정도로 신기해 하는 해프닝이다.
‘내가 제일 잘 나가사끼 짬뽕’을 처음 알았을 때는 노래 제목을 라면 상품으로 연결하는 아이디어에 놀랐다. 2011년 그룹 투애니원(2NE1)이 부른 ‘내가 제일 잘 나가’라는 노래는 당시 음원차트 1위를 휩쓸었다. 공교롭게도 그해, 삼양라면은 국물이 하얀 ‘나가사끼 짬뽕 라면’을 처음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본래 포장지에 적힌 제품명은 ‘나가사끼 짬뽕’이었는데, 투애니원 노래가 인기를 끌자 삼양라면은 ‘내가 제일 잘 나가사끼 짬뽕’이라는 홍보 카피와 함께 제품 광고에 나섰다.
이 곡을 작사·작곡한 P씨는 ‘내가 제일 잘 나가사끼 라면’이라는 문구를 본 소비자들은 투애니원을 떠올릴 것이고, 그렇다면 이는 P씨 자신의 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라고 판단했다. 결국 P씨는 “이 광고는 투애니원 노래의 저작권을 침해하고 상품을 혼동하게 하는 행위”라며 광고 문구의 사용을 금지해달라고 법원에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P씨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①‘내가 제일 잘 나가’라는 제목 자체에는 창작성이 없고, ②곡명이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며, ③노래와 라면은 서로 유사한 상품도 아닌 데다 고객층도 중복되지 않기 때문에 서로 혼동을 일으킬 우려가 없다는 것이었다.
짧은 문구 #2.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2005년 12월 개봉한 영화 〈왕의 남자〉는 연극 〈이〉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궁중 광대들의 삶과 그들을 둘러싼 음모, 왕과의 애틋하고 미묘한 관계를 다뤘다. 천만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았고, 극중 ‘공길’을 연기한 연기한 배우 이준기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두 주인공 공길과 ‘장생’(감우성 분)은 장님 놀이를 한다. 이 장면에서 둘은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는 말을 주고받는다. 지팡이를 두드리며 맛깔나게 이 대사를 표현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를 〈왕의 남자〉의 명대사로 뽑기도 했다. 나중에는 신문 만평에도 이 말이 등장했다. 영화를 빛낸 이 대사는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의 창작의 산물이 아니다. 감독 스스로 언론에 솔직히 밝힌 바대로, 희곡작가 윤영선 씨의 〈키스〉라는 작품에서 빌려온 것이다.
윤 씨의 1996년작 〈키스〉는 이듬해 초연을 시작으로, 〈왕의 남자〉 개봉 해인 2005년 10년째 공연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윤 씨는 희곡 첫 부분에 나오는 대사와 영화 속 초반부 및 결말부 대사가 같다며 영화 상영을 금지해달라고 신청했다. 윤 씨는 허락 없이 대사를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저작권 침해 행위이고, 관객들이 〈키스〉가 〈왕의 남자〉를 표절한 것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영화의 멋진 장면을 잊는다면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라는 글귀 자체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어떤 글귀가 특정 상황에서 감동을 준다 해서, 그 글귀에 ‘창작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예술적 차원에서는 글의 길고 짧음만으로 창작성 유무를 단정할 수 없다. 대표적으로 시(詩)와 같은 문학작품은 ‘짦음’을 속성으로 한다. 창작성 유무는 글귀가 얼마나 인기를 끌고 있는지, 또는 대중을 어떻게 감동시키고 있는지와는 무관하다. 예전부터 쓰인 표현인지, 누구나 생각해낼 만큼 간단한 글귀인지가 중요하다. 이런 시각에서 법원은 윤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짧은 문구 #3. ‘난 우리가 좀 더 청춘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내가 제일 잘 나가사끼 짬뽕’과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짧은 글귀가 창의적 저작물로 인정받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최근 정반대인 하급심 판결이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기존 판결과 상식을 뒤엎는 내용이라 많은 언론들도 기사로 다루었다.
현대백화점 신촌점은 2017년 4월 말부터 6월 1일까지, 지하 2층 지하철 연결로에 마련된 상품 판매 공간에 네온사인을 걸었다. ‘난 우리가 좀 더 청춘에 집중했으면 좋겠어’라는 문구로 제작된 것이었다. 이 글귀의 본디 출처는 ‘1984’라는 인디밴드의 음반이었다. 2009년 발매된 1984의 첫 앨범 〈청춘집중〉 속지에 이 문구가 있었고, 당시 밴드 멤버였던 김정민 씨가 직접 쓴 것이었다. 그의 팬 한 명이 해당 글귀로 네온사인을 만들어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 안에 걸었고, 이를 본 손님들이 사진을 찍어 SNS에 게시하면서 이 문구는 온라인상에 퍼져나갔다.
일반인들이 게시한 ‘난 우리가 좀 더 청춘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네온사인 사진들을 볼 수 있다.
현대백화점 신촌점이 영리적 목적으로 ‘난 우리가 좀 더 청춘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네온사인을 제작한 사실을 안 김정민 씨는 법원에 1,000만 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현대백화점 측은 맥주 광고 카피였던 ‘최상의 맛을 유지하는 온도, 눈으로 확인하십시오’라는 문구가 저작물로 인정받지 못한 판례를 제시하며 저작권 침해를 부정했다. 그러나 1심 법원은 네온사인에 사용된 문구는 선택이나 리듬감, 음절의 길이, 문장의 형태 등에서 독창적인 표현 형식이 포함되기에 창작성이 인정된다고 판단, 김정민 씨의 손을 들어줬다. 이 판결은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소개됐고, 어느 기사에는 ‘단 한 줄의 문장에도 저작권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이 달리기도 했다.
보통 단독으로 쓰인 한 문장의 글은 저작권 보호에 필요한 창작성이 부족하다. 그러나 광고 문구, 하이쿠, 농담 등의 경우, 간결성·단순성·위트·재치를 동반한다면 저작권 보호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제로 미국에선 ‘I may not be totally perfect, but parts of me are excellent’(나는 완전하지 않지만 나의 일부는 훌륭하다), ‘I have abandoned my search for truth and am now looking for a good fantasy’(나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했고 좋은 환상을 찾고 있다)라는 글을 티셔츠에 새겨 판매하는 행위에 대해 저작권 침해라는 판결이 있었다.
짧은 문구 또는 이름(제목)이 디자인 요소로 쓰여 해당 문구·이름의 출처, 즉 원작을 연상시켰다면 많은 경우 미국에선 저작권 침해로 인정됐다. 일례로 미국 법원은 ‘E.T. Phone Home’이라는 글귀가 각인된 머그잔이 저작권 보호를 받는 캐릭터 이름(E.T.)을 연상시킨다 하여 머그잔 제작사의 저작권 침해 행위를 인정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선 짧은 문구가 그 자체로 저작권 보호를 받기도 한다. 기업의 광고 카피인 ‘Why are we giving away SOLEX Electric Toothbrush Sets For Only $3?’(왜 우리가 SOLEX 전기 칫솔세트를 겨우 3달러에 팔려고 할까요?), ‘This is NOT a misprint’(이것은 오자가 아닙니다) 같은 짤막하고 평범한 광고 문구가 저작물로 인정받은 판례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쟁사들의 모방 광고를 방지한다는 차원이다.
그래서, 짧은 문구는 저작물이라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
방송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PD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 소설 제목을 프로그램 타이틀로 써도 되느냐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우리 법원의 세 가지 판례로 대신할 수 있겠다.
①〈또복이〉는 1970년대 출간된 만화인데, 당시 ‘또복이’라는 빵이 시중에 나왔다. 만화의 원작자 정운경 씨는 해당 빵의 제조사를 대상으로 판매 금지와 사죄 광고를 법원에 청구했다. ②1989년 개봉해 큰 인기를 끈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경우, 1987년 발표된 무용극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와 제목이 같다. 이에 해당 무용극을 만든 모 대학 무용과 교수와 영화 제작자 간에 저작권 분쟁이 불거졌다. ③2003년 고원정 작가의 소설 〈불타는 빙벽〉이 발표되자, 이듬해 손장순 작가가 이 작품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자신의 1977년 창작집 제호인 ‘불타는 빙벽’을 함부로 썼다는 이유였다.
1970, 1980, 2000년대에 차례로 일어난 이 저작권 분쟁의 결말은 어땠을까? 아마 예상하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세 제목(또복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불타는 빙벽) 모두 우리 법원은 저작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제목 자체가 저작물이 아니므로, A와 B가 아무리 똑같은 제목을 사용한다 해도 법적 판단으로는 별도의 저작물인 것이다. 마치 표지만 동일하고 내용물은 다른 상품처럼 말이다. 물론 제목뿐 아니라 스토리나 플롯까지 동일했다면, 표절이라는 비난과 함께 저작권 침해 문제가 제기됐을 것이다.
간략하거나 짧은 글은 아무래도 저작물로 인정받기 위한 창작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하이쿠(俳句) 같은 시는 저작물로 인정을 해주는 것 같다. 하이쿠는 일본의 전통 정형시다. 5·7·5조, 17자가 기본이며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로도 불린다. 극도의 압축과 함축으로 촌철살인의 미학을 느끼게 한다. 아래는 17세기 시인 마쓰오 바쇼의 한 작품이다.
파 하얗게 / 씻어서 세워 놓은 / 추위여 『바쇼 하이쿠 선집』(류시화 옮김, 열림원, 2015) 중
그렇다면 두 문장 정도로 이루어진 특징 있는 글귀는 어떨까? 미국 법원은 사실을 설명하는 문장과 그 사실에 대해 익살스럽게 논평하는 문장으로 구성된 두 문장의 재담은 저작권으로 보호를 받는다고 판결했다. 다만, 약한 저작권 보호(Thin copyright protection)를 적용했다. 약한 저작권 보호의 경우에는 사실상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유사한 경우에만 저작권 침해가 인정된다.
트위터 문구(트윗) 같은 140자 이내의 글이라면, (만연체가 아닌 이상) 세 문장 정도 길이가 된다. 국내에는 트윗의 저작물성을 인정한 판례가 있다. 한 출판사가 소설가 이외수 씨의 트윗을 무단 복제한 사건이다. 이 출판사는 이외수 씨가 트위터에 남긴 글 56편을 갖고 『이외수 어록 24억짜리 언어의 연금술』이라는 전자책 파일을 만들어 도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배포했다. 우리 법원은 이외수 씨의 트윗에 촌철살인의 표현이나 독창적 표현 형식이 포함돼 있다며 저작물성을 인정했다.
시처럼 문학적 표현이 다분한 글귀, 추상적 단어나 사전에 없는 낱말들을 조어한 문구는 비록 길이는 짧더라도 독창성을 충분히 인정받을 것이다. 반면, ‘밥을 먹었다’ 내지 ‘친구를 만났다’ 같이 일상사를 평범히 표현한 글이나 사실을 전달하는 문구라면 긴 문장이라도 저작물에 해당하지 않는다. 결국 저작권 보호 여부는 글의 길고 짧음이 아니라, 사상과 감정을 독특하게 표현한 것인지를 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 KBS 공영미디어 연구소 연구원(법학박사)이자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등에서 강의 활동을 하였다. 동 대학원에서 「공연권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믿기 힘든 저작권 이야기』, 『디지털 콘텐츠 저작권』, 『음악 저작권』 등 저작권과 관련한 다수 저서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