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종이책을 읽기는 하지만 짧은 시간에 독파할 수 있는 책은 전자책으로 구매한다. 약 2년 전 전자책을 처음으로 샀을 땐 그만 한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직접 사서 읽어보니 전자책 단말기(e북 리더기)가 종이책보다 가볍고, 여러 권을 담아 놓으면 개인 서재와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단말기에는 책들이 퍽 많이 쌓여 있다.
10년 전만 해도 전자책이 종이책 판매를 따라오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디지털 플랫폼의 선두가 모바일로 변모하고 전자잉크(e잉크) 기술을 이용한 전용 단말기 판매가 늘어나면서 매년 전자책 시장은 지속적으로 성장해 오고 있다.
미국 기업 아마존은 이미 2007년 킨들(Kindle)이라는 전자책 단말기를 내놓으며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우리나라 시장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전자책의 종류와 숫자가 아직은 종이책에 비해 부족한 상태다. 그럼에도 점점 국내에서도 종이책과 전자책으로 동시에 발매되는 책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교보문고의 SAM, 리디북스, YES24 등 몇 개 대형 서점이나 전문 출판사가 전자책과 단말기를 판매한다.
전자책이 처음 시장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종이책보다 아주 쌀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종이책 가격에서 보통 70~80% 정도이어서 생각만큼 싸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베스트셀러일수록 전자책 가격은 높다. 예를 들어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사피엔스』의 경우, 아마존에서 종이책 가격은 $13.59이고 킨들용 전자책 가격은 $9.99이다.
종이책의 배포권 / 전자책의 배포권
나와 같이 전자책을 잘 활용하는 친구가 어느 날 이렇게 물어 왔다. 다른 종류의 단말기를 구매했는데, 기존에 쓰던 제품과 전자책들을 ‘중고’로 팔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독자들은 다 본 종이책을 어떻게 보관할까 궁금하다. 필자는 여러 번 봐야 하는 전문서적은 책장에 넣어 보관하고, 소설처럼 한 번 읽으면 다시 보지 않게 되는 책은 중고서점에 판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요즘 중고서점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듯하다. 온라인 서점과 연동되는 오프라인 매장이 곳곳에 있기 때문에 필요한 책을 저렴하게 살 수 있게 됐다. 온라인 서점의 안내에 따라 소장 도서 정보를 입력하면 중고서점 매입 가능 여부와 매입 예상 가격까지 표시해준다. 과거에도 중고서점(헌책방)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서점 안에 쌓인 책을 찾기도 어려웠고 보관 상태도 좋지 않아 찾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종이책처럼 전자책도 중고로 파는 것이 가능할까? 전자책을 중고로 파는 일은 디지털 음원을 사서 되파는 것과 유사한 거래 방식이 될 듯하다. 내 컴퓨터에 보관된 디지털 파일을 판매하는 것은 파일을 복제해 주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메일이나 SNS로 보낼 수도 있고, USB 같은 저장 장치에 담아 건네거나 상대방 컴퓨터로 복제해줄 수도 있다.
방법이야 어떻든 내가 원본 파일을 삭제하지 않는 이상 내 컴퓨터에 파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원파일이 삭제되도록 하는 정교한 시스템이 없다면 무한정 복제가 가능하다. 불법 복제물이 퍼지면 전자책이든 종이책이든 팔리지 않게 되고 저작권자인 작가나 출판사는 손실을 입게 된다.
책을 판매의 형태로 양도하는 것을 저작권 용어로는 ‘배포’라 한다. 저작권자는 자신의 저작물을 배포할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배포권을 갖는다. 종이책이나 CD 같은 유형물의 경우, 구매자(소유자)가 중고로 판매할 수 있는 당연한 거래 상식을 저작권법은 이렇게 어렵게 설명을 한다. 구매자가 저작물을 양도(배포)하는 중고 거래를 하더라도 저작권자는 판매하지 말라고 할 수 있는 권리(배포권)를 행사할 수 없다, 라고 말이다. ‘권리소진의 원칙’이라고도 부른다. 쉽게 말해 배포권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자책은 종이책 같은 유형물이 아니므로 배포권은 여전히 저작권자에게 남아 있게 된다.
디지털 저작물 ‘중고 거래’와 관련한 해외 판례들
네덜란드에 ‘톰 캐비닛(Tom Kabinet)’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일종의 ‘전자책 헌책방’으로, 사이트 가입자들의 전자책을 구입한 뒤 재판매하는 서비스를 제공했던 곳이다. 이용자들은 이 사이트에서 ‘헌 전자책’을 구입한 뒤 되팔면 다른 책 구입 시 할인 혜택을 받았다. 또한 이 사이트는 전자책을 되파는 개인들에게 전자책 사본 삭제를 요구하고, 자사가 판매하는 전자책 사본이 합법적인 사본임을 확인하기 위해 디지털 워터마크도 삽입했다.
톰 캐비닛의 존재를 알게 된 네덜란드 출판사 두 곳은 저작권 침해를 주장하며 소를 제기했다. 네덜란드 항소법원은 ‘톰 캐비닛이 개인들에게 전자책 사본 삭제를 요구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고, 다운로드한 전자책을 되파는 기존의 온라인 서비스를 금지했다.
이와 반대로 중고 소프트웨어 판매를 허용한 유럽 사법재판소 판결도 있다. 온라인 전송방식으로 구매한 소프트웨어를 오프라인에서 판매한 사건이었다. 유럽 사법재판소는 CD와 같은 유형물 형태의 거래와 다운로드 방식의 판매는 경제적·기능적으로 다르지 않고, 다운로드 방식에 대해 권리소진의 원칙을 배제하는 것은 저작권자가 다운로드 방식의 재판매를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것이어서 지적재산권의 보호 범위를 넘어선다고 판단했다.
다만, 다운로드 방식의 컴퓨터 프로그램에 권리소진의 원칙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권리자가 시간적 제한이 없는 라이선스를 허용해야 하고, 재판매하는 사람이 해당 컴퓨터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다시 이용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미국 법원도 비슷한 판례를 남긴 바 있다. mp3 파일을 합법적으로 구입한 이용자가 해당 파일을 재판매하는 서비스에 관한 내용이다. 해당 mp3 파일 원구매자의 컴퓨터로부터 새로운 구매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mp3 파일이 먼저 재판매 서비스 사이트의 서버에 저장되고, 이어서 새로운 구매자의 기기에 저장되므로 음반 제작사의 복제권이 침해된다고 미국 법원은 판단했다. 따라서 권리소진의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이런 논리라면, 중고음악 파일 거래 사이트가 신규 구매자에게 클라우드 서버에 저장된 음악파일의 접근권을 이전하는 방식으로 서비스를 변경할 경우 권리소진의 원칙이 적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콘텐츠는 ‘무형물’인가 ‘유형물’인가, 이 구분이 핵심
그렇다면 필자의 친구가 궁금해 한 전자책 단말기 판매는 어떨까? 친구가 갖고 있는 킨들에는 지금껏 아마존에서 산 책 100권이 저장되어 있다. 중고 킨들 가격은 몇 만원 정도에 불과하지만 킨들 안에 저장된 책의 정가는 2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디지털 파일 판매는 저작권 침해가 된다고 했는데, 이건 유형물을 파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킨들 안에 들어 있는 전자책 파일을 별도로 저장하지만 않으면 저작권 침해는 아니지 않을까?
그런데, 판매자가 킨들 아이디를 바꾸지 않는 이상 구매한 책에 대한 재 다운로드는 가능하다. 그렇다면, 판매자가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함께 양도함과 동시에 판매된 전자책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 한다면 저작권 침해가 아니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들에 답을 하기 앞서, 물음표 하나만 더 추가해보도록 하자. 전자책 파일이 아니라, 정보가 담긴 파일이라면 어떨까? 최근의 기사 한 편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A씨는 최근 경찰로부터 저작권법을 위반했다며 출석요구를 받았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A씨는 온라인에서 한 학원의 동영상 강의를 다운 받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돈을 받고 재판매 했다가 적발됐기 때문이다. 학원 측은 A씨에게 수백 만원의 합의금을 요구했고, A씨는 당장 목돈을 마련할 수 없어 큰 고민에 빠졌다. (중략) 최근 중고등학교 학원을 비롯해 토익 등 각종 시험에 대비한 학원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며 학원 강의 자료에 대한 저작권 법 위반 사례가 느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수강한 학원의 강의 자료를 재판매 하거나 학원 수강료가 부담되는 일부 학생들이 강의 자료만 저렴하게 구하려는 식이다. 서울 종로와 강남 등지에서 영어 학원 강사로 일하는 윤모(34)씨는 "학원이나 강사들이 자체적으로 만드는 강의 자료에 저작권법과 관련한 내용을 적어 놓음에도 무단 배포하는 이들이 자주 적발된다"고 전했다. 윤씨는 "대부분 '내 돈 내고 얻은 자료를 다시 파는데 무슨 문제냐'라고 여기는 것 같다"라며 "이는 명백한 저작권법 위반이고, 학원과 강사들이 꾸준히 모니터링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용 출처: 「강의자료 불법공유했다간 범죄자 ··· 학원가 저작권법 위반 증가」, 아시아경제, 2019. 12. 3.
위 기사가 간과한 점은 ‘유형물’과 ‘무형물’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형물인 종이책의 경우, 소유자가 해당 책을 판매할 정당한 권리를 갖는다. 상술한 바와 같이 “판매로 인해 저작권자의 배포권이 소멸(권리소진의 원칙)”하기 때문이다. 유형물을 판매한 후에는 저작권자가 재판매 행위에 대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원리이다. 유형물에는 종이책, CD 등 모든 ‘물건’이 포함된다.
그러나 디지털 파일은 유형물로 보지 않기 때문에 내가 파일을 샀다고 하더라도 재판매할 수 없다. 만약 누군가에게 판매를 하더라도 저작권자의 복제권이나 전송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된다. 누군가의 이메일로 전송했다고 한다면 복제본이 상대방 컴퓨터에 남기 때문에 복제권 침해가 될 수 있다.
왜 현행법은 유형물과 무형물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일까? 유형물의 경우, 구매자에게 현물을 넘기고 나면 판매자는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해진다. 반면 무형물은 판매자의 컴퓨터나 노트북, 모바일 기기에 ‘파일’이 그대로 남는다. 이 같은 근거로 현행법은 유형물과 무형물을 구분하고 있다. 또한 무형물의 판매자는 횟수에 관계없이 무한정 해당 파일을 복제하여 판매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은 결국 저작권자로 하여금 해당 파일의 판매 기회를 사라지게 하므로 저작권자에게 피해를 준다.
학원에서 구입한 강의 자료 인쇄물을 되파는 것은 저작권과 무관하지만, 다운로드 방식으로 구매한 강의 자료(파일)의 재판매는 저작권 침해가 될 수 있다. 특히 동영상 강의는 파일 그 자체를 수강생에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만 이용할 수 있는 권한(라이선스)만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위 기사는 유형물과 무형물을 구분하지 않고 있어 독자에게 혼동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재판매 금지가 항상 저작권자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닐 터이다. 전자책, 음악, 정보를 담고 있는 파일과 같은 디지털 콘텐츠는 경제적 가치를 가진다. 그렇기에 재판매가 가능할 경우 오히려 원본의 가치가 높아질 수도 있다. 잠재적 판매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는 손실과 원본 가치의 향상이라는 두 가지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방법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디지털 콘텐츠를 중고로 판매해도 저작권을 침해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국내 현행법상 판매자가 원본 파일을 보관하는지 여부에 따라 달라질 듯하다. 개인의 경우, 원본 파일의 삭제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개인이 구매한 디지털 콘텐츠를 중고로 판매하는 행위는 대부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콘텐츠 구입에서 재판매까지 모든 프로세스를 통제하는 온라인 콘텐츠 거래 서비스가 있고, 판매를 위한 등록 절차에서 구매자가 소유한 콘텐츠가 삭제되는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경우라면 디지털 콘텐츠의 중고 판매도 가능할 것 같다.
현재 KBS 공영미디어 연구소 연구원(법학박사)이자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등에서 강의 활동을 하였다. 동 대학원에서 「공연권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믿기 힘든 저작권 이야기』, 『디지털 콘텐츠 저작권』, 『음악 저작권』 등 저작권과 관련한 다수 저서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