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디자인 품과 격』(편석훈 저, 윤디자인그룹, 2020) 내용 일부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더 많은 내용은 책 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미디어는 정보다’ ‘미디어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미디어는 담론이다’ 등등 미디어를 정의하는 말은 수도 없이 많다. 미디어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도 한마디 거들자면 ‘미디어는 기록이다’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리고 그 기록은 반드시 진정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윤디자인그룹이 미디어를 운영하는 이유 역시 ‘기록’ 때문이다. 윤디자인그룹을 운영하면서 늘 중요하다고 판단해온 한글과 타입, 그리고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기록. 하지만, 개인 소유물이 아닌 공공을 위한 정보 공유의 목적으로, 게다가 수익 창출도 전혀 되지 않는 이 전문 분야를 공공기관이나 교육기관도 아닌 곳에서 꾸준하게 운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윤디자인그룹은 미디어 전문 회사도 아니다. 그럼에도 윤디자인그룹이 『정글』을 필두로 『타이포그래피 서울』까지 여전히 미디어를 운영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글 타입과 타이포그래피 분야의 과거와 현재의 기록,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미디어를 운영함으로써 역사적으로도 교육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기록들은 곧 대한민국의 자존심으로 남게 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러한 의지를 알아봐준 수많은 독자들이 계속해서 윤디자인그룹의 미디어를 ‘열독’해주고 있다.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한글 타이포그래피, 정글
『정글』은 1996년 윤디자인연구소에서 ‘한글 타이포그래피 매거진’을 표방하며 창간한 계간지다. 디지털 폰트가 이제 막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할 즈음인 1990년대 중반, 윤디자인연구소는 새로운 고민에 맞닥트렸다. “DTP(Desk Top Publishing) 시대에 발맞춰 신문과 잡지 등의 인쇄매체에서 다양한 폰트가 질적·양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마치 정글(Jungle)과 같은 이 디자인 시장에서 올바른 폰트의 사용은 어떻게 제시할 수 있을까?”가 주된 고민이었다.
이러한 고민을 하던 차에 눈에 띈 잡지가 바로 『에미그레(Emigre)』였다. 당시 이 잡지는 전세계에서 수많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폰트 디자이너로 평가받는 동시에 악평을 받는 주자나 리코(Zuzana Licko)와 대단히 유명하면서도 악명 높은 아트디렉터로 평가받는 루디 반데란스(Rudy VanderLans)에 의해 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습적인 문화 경계를 벗어나 늘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 『에미그레』는, 두 사람의 편집 취향에 따라 무지막지하게 조합된 이해 못할 결과물들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반데란스의 편집 기획은 수많은 ‘에미그레 추종자’들을 만들어갔으며, 리코가 제작한 오클랜드(Oakland), 모듈라(Modular), 매트릭스(Matrix) 등의 폰트는 『에미그레』를 ‘독창적이고 새로운 스타일’의 최전방에 올려놓았다.
당시 윤디자인연구소 대표였던 윤영기 소장과 폰트사업부 수장이었던 나는 이처럼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타이포그래피 매거진’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90년대 중반만 해도 국내 디자인 시장에서 타이포그래피란,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해외 디자인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국내 디자인 대학의 교수들은 해외에서 학위를 받고 온 이들이 대다수였던 시절이라, 그들이 교육받은 방식 그대로를 한국에 전하고 있었다.
즉, 라틴 알파벳을 위주로 레터링을 수업하고 바우하우스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라틴 알파벳 위주로 타이포그래피 작품을 만들게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실제로 수많은 학생들은 “알파벳을 기반으로 한 타이포그래피는 왠지 ‘뽀대’가 나고, 한글 타이포그래피는 왠지 촌스러워 보인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것은 나와 같은 기성 세대의 잘못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그들에게 ‘뽀대가 나는’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으니까.
‘Jungle 같은 디자인 시장에서 正·글 같은 한글 폰트를 보여주자’
그래서 제대로 된 판을 한 번 깔아보기로 했다. ‘Jungle과 같은 디자인 시장에서 正·글과 같은 올바른 한글 폰트 활용을 보여주자’고 시작한 『정글』은 창간과 동시에 디자인계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96년 봄호부터 1999년 봄호까지 총 12호가 발행된 『정글』은 당시 혁신적인 디자인을 갈망하던 디자이너들에게 설렘과 가능성을 안겨주었다.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한글 타이포그래피 매거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답게 도전적이고 신선한 편집 디자인과 폰트 사용으로 국내 디자인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미쳤던 것이다.
『정글』 초기의 편집 디자인은 한글 글꼴의 조형화에 초점을 맞췄다면, 『정글』 5호부터는 게스트 디자이너들과 함께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제시해 반향을 일으켰다.
무자비하게 조각된 내지 디자인, 흰 여백을 무시한 보색 대비 바탕 컬러, 16도 인쇄에 추가한 은박 인쇄 실험 등, 지금은 쉽게 볼 수 있는 디자인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다른 잡지에서는 보기 힘든 디자인 작업들이 게스트 디자이너—김준호·가슴시각개발연구소·홍동원·송종현·장윤희·김기현·유정미·최민호·조현·이철민·김욱—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비록 당시 내가 깊숙이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정글』의 실험 정신에 함께 동참해준 게스트 디자이너들, 그리고 귀한 글을 보내준 필자들에게 지금도 고마움을 느낀다.
90년대만 해도 ‘독자 엽서’가 참 많이 왔었다. 『정글』을 응원하던 수많은 독자 엽서는 윤디자인연구소가 『정글』을 제작할 수 있게 한 지지대이기도 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독자 엽서들은 “역시 윤디자인”이라는 평가였다. 『정글』을 통해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가능성, 그리고 ‘윤디자인 스타일’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IMF 위기와 웹진(webzine)으로 전환되는 이유 등으로 폐간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정글』을 기억하는 여러 디자이너들을 만날 때마다 그때의 열정들이 떠올라 반갑고 또 그립다.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