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디자인 품과 격』(편석훈 저, 윤디자인그룹, 2020) 내용 일부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더 많은 내용은 책 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디자인계 종사자라면 한 번쯤 ‘모두를 위한 디자인’에 대해 고민해봤을 것이다. 전 세계, 전 인류를 향한 거창한 업무까지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내가 작업한 디자인이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쓰인다면 그만큼 보람 있는 일도 없을 테니까. 여러 디자인 분야에서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조금씩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실행한다면 이 사회는 더 나은 모습이 되어갈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디자인이 그리고 디자이너가 해야 할 사회적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전제를 윤디자인그룹의 전문 분야인 폰트에 적용해보았다.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폰트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에 대한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던 차에 2009년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일본의 폰트 회사 이와타(Iwata)에서 작업한 유니버설 디자인 폰트(Universal Design Font, 이하 UD폰트)였다.
다종다양한 가전제품에 동일하게 적용된 UD폰트는, 노안이 있는 노인이나 글자를 잘 못 읽는 어린아이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손쉽게 제품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모두를 위한 폰트라고 여겨졌다. 곧바로 윤디자인그룹에서도 UD폰트 연구에 착수했고, 2010년 첫 번째 UD폰트를 발표했다.
고령화 시대 소비자를 위한 UD폰트
윤디자인그룹에서 발표한 UD폰트는, 장애의 유무나 연령 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제품·건축·환경·서비스 등을 보다 편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유니버설 디자인 개념을 폰트에 적용한 것으로, 남녀노소 쉽고 편하게 식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였다.
또한, 어느 상황에서도 명확하게 읽히기 위해 개발된 UD폰트는 고령화 시대에 따른 소비자들을 배려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윤디자인그룹의 UD폰트는 자형에 영향이 없는 범위에서 가급적 자폭을 넓혀 같은 글자 크기에서 더 크고 선명히 보이게 디자인했고, 불필요한 요소를 최대한 삭제했다.
윤디자인그룹 UD폰트의 가장 큰 성과는, 2010년 지식경제부와 한국디자인진흥원(kidp)에서 주최한 ‘굿디자인’에 선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TV, 휴대폰, 가전제품 등 주로 제품 디자인에 선정되던 굿디자인에 디지털 폰트가 선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UD폰트는 ‘개발 콘셉트 및 시인성(視認性, 모양이나 색이 눈에 쉽게 띄는 성질)에 특화된 디자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각종 디지털 기기에 활용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한중일 3개국에서 공동 개발한 UCD폰트
UD폰트에 대한 오랜 연구와 결과를 반영하여 윤디자인그룹에서 새롭게 제안한 폰트가 바로 UCD(Universal Communication Design)폰트다. UCD폰트는 UD폰트와 맥락을 같이 하되, UD 개념에 폰트의 기본 속성인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기능할 더한 것이다.
UCD폰트는 공간을 최대한 넓게 활용할 수 있어 글자가 크고 또렷하게 보이며 가독성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고령자, 저시력자 등 눈이 불편한 사람을 비롯해 일반인들도 편안하게 정보를 파악할 수 있어 눈의 피로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또한, 다국어 조판 시 시각적 안정감을 높여 제품, 건축, 환경, 서비스 등에 적용할 수 있도록 활용도 또한 넓혔다.
UCD폰트의 또 하나 특징은 한중일 3개국 폰트회사가 세계 최초로 공동 개발한 UCD CJK 폰트라는 것이다. 기존 아시아 한자 문화권 국가에서 폰트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한중일 각각 서로 다른 기준의 라이선스 협약을 통해야만 했다.
이에 반해 UCD CJK폰트는 한국의 윤디자인그룹과 중국의 파운더(Founder), 일본의 폰트웍스(FontWorks)가 협약을 통해 유니버설 디자인 개념을 적용한 UCD폰트를 공동으로 개발하여 하나의 라이선스로 3개국의 폰트를 제공하기 때문에 경제적이고 편리하다는 이점을 갖고 있다.
내가, 그리고 윤디자인그룹이 ‘UCD’에 이토록 열중한 데에는 일종의 사명감이 작용했다. 다양한 기기와 환경에 하나의 통일된 코드로 폰트를 탑재하는 것, 말 그대로 남녀노소 모두가 불편함 없이 텍스트 정보를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 나는 이러한 기술적 노력이 글자를 다루는 기업의 당연한 사명이라 생각한다. 이 사명을 나 스스로는 ‘민간 외교’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만큼 UCD 분야의 R&D에 상당한 책임감을 느낀다는 의미다.
국내 기업에서도 이러한 선순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일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국내 여러 기업과 기관에 UCD폰트 도입과 연구의 필요성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진 곳은 없었다.
아직까지 대다수 국내 기업들이 소비자들을 위한 폰트 연구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 후속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아쉽지만, 앞으로 여러 기업과 기관에서 유니버설 디자인과 UD폰트에 관심을 가질 것으로 기대한다.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