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디자인 품과 격』(편석훈 저, 윤디자인그룹, 2020) 내용 일부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더 많은 내용은 책 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사석에서 만난 한 디자이너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본인 작업에 일부러 ‘예스러운 느낌’을 주고 싶을 때 굴림체를 사용한다는. 공감하는 바가 없지는 않았으나, 폰트 업계에 오랫동안 종사한 입장으로서는 완전히 동의하기 어려웠다. 얘기를 곰곰 곱씹어보니, 굴림체 자체를 ‘옛날 서체’로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일종의 인상 비평이다. 내 생각은 달랐다. 굴림체 자체가 예스러운 게 아니고, 그 디자이너가 최신 트렌드에 어울리는 굴림체를 접하지 못했던 것이다.
시간이 흘렀다. 굴림체에 대한 생각은 내 머릿속 깊은 데로 밀려나 있었다. 다른 많은 일들이 이미 우선순위를 차지해버린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오래된 광고 문구 같은 표현이지만) 굴림체가 내 가슴속으로 또 들어왔다. 우리 회사 디자이너가 굴림체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며 제안을 해 온 것이었다. 그 순간 ‘예스러운 느낌의 굴림체’ 얘기가 다시금 떠올랐고, 이는 자연스럽게 ‘완성도 높은 굴림체를 시장에 내놓겠다’라는 의지로 이어졌다.
기존 굴림 업그레이드 vs. 처음부터 새로 ‘굴리기’
굴림체 프로젝트가 거론된 때는 2014년 초였다. 이미 다른 폰트 기업들이 출시한 이런저런 굴림체들이 존재하던 상황이었다. 고민이 깊어졌다. 시장 조사를 어떤 목적과 범위로 진행할지를 두고 직원들끼리 오랜 시간 의논했다.
시장 조사를 통해 기존의 굴림체들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버전업 굴림체’를 만든다? 아마도 가장 무난한 기획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진행한다면, 결국 ‘기존 굴림체의 업그레이드 버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서체 개발의 출발점이 윤디자인그룹만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타 기업들의 기존 사례가 되는 셈이다. 거칠게 말하면 유지·보수 차원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는 더 새로운 것을 원했다. 요샛말로 ‘찐’을 찾아야만 했다.
이런 고민의 연속 속에서 마침내 ‘찐’ 아이디어가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것은 바로 윤고딕 시리즈를 굴림체로 변신시켜보자는 것이었다. 새로운 굴림체가 왜 꼭 기존의 굴림체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느냐는 역발상이었다. 윤고딕 시리즈는 이미 폰트 시장에서 그 품질과 범용성이 검증된 ‘우수 제품’이다.
이 훌륭한 견본을 토대로 굴림체를 만든다면 완성도와 시장성은 어느 정도 보장될 것이라는 게 당시 직원들의 중론이었다. 또한, 윤고딕 사용자 혹은 애호가들을 끌어모아 ‘윤서체’(윤디자인그룹에서 만든 서체들을 통칭하는 말로, 폰트 업계 및 사용자들 사이에서 흔히 쓰인다) 고객층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시안 작업이 시작됐다. 디자이너 열 명이 몇 달간 꼬빡 매달렸다. 기존 굴림체들의 분석 결과를 반영한 시안 말고, 윤고딕의 굴림체 버전 시안들이 속속 나왔다. 윤고딕 시리즈 중 굴림체 재해석에 용이하다고 판단된 100·200·500·700번대가 견본으로 선별됐고, 디자이너들은 4종 각각의 굴림체 작업물들을 발표하고 보완해 나갔다. ‘n차’의 시안 검토를 거친 결과, 윤고딕 700번대의 재해석 작업이 최종 낙점됐다.
윤고딕 700은 윤디자인그룹 서체 디자이너들이 전원 투입돼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이전 시리즈(윤고딕 100·200·300·400·500)에 비해 조형성과 사용성 면이 보강됐다. 굵기 체계 또한 이전 시리즈의 6종에서 9종으로 늘어, 본문용 및 제목용으로서의 활용성까지 더해졌다. 윤고딕 700의 굴림체 버전, 그러니까 ‘윤굴림 700’은 윤고딕 700번대의 장점과 특징을 고스란히 이식받았다.
고객 요구에 응답한 윤굴림 700: 3차 분할 출시의 배경
윤굴림 700은 2018년 1·2차, 2019년 3차, 이렇게 세 차례로 나뉘어 출시됐다. 1차에선 3종 굵기로 선공개, 2차에선 6종 굵기를 추가해 9종 굵기를 모두 완성했고, 3차에선 한글 11,172자 지원 및 한자 4,888자까지 포함시킨 완전체로서 사용자들과 만났다. 이렇게 2년간 1·2·3차 분할 출시를 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윤굴림 700 개발이 한창이던 2015년, 윤디자인그룹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제작 과정을 공개한 적이 있다. 영화로 치면 티저 트레일러(teaser trailer) 개념인 셈이다.
그런데 이때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다. “윤굴림이라길래 루머인 줄 알았더니 사실이라서 충격 먹었습니다” “답답했던 굴림에 희망이 오는 건가요” “굴림체마저.. 700! 신의 한 수일 듯” 같은 기대에 찬 댓글들이 주를 이뤘다. ‘윤고딕 700번대의 굴림체화’ 콘셉트가 잠재 구매층에 충분히 어필된다는 방증이었다.
이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윤굴림 700 출시일 문의까지 이어졌다. 소비자들이 이렇듯 열렬한 지지 메시지를 발신했으니, 기업 입장에선 고객 소통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답신을 해야 했다. 그 응답이 바로 2년에 걸친 분할 출시였다.
윤굴림 700은 디지털 미디어 및 출판 인쇄 환경 모두에 적합하며, 9종 굵기 체제 덕분에 제목에서 본문까지 다채로운 글자 표현을 구현한다. 굴림체로서는 드물게 한글, 라틴알파벳, 한자, 윈도 및 맥용 특수문자까지 지원함으로써 섞어짜기(각기 다른 문자를 혼합해 조판하는 것) 활용도 또한 뛰어나다.
윤굴림 700의 정체성은 모노가 아니라 스테레오다. 굴림체라고만 규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윤굴림 700은 윤고딕 700의 새로운 파생이고, 그래서 새로운 굴림체일 수 있는 것이다. 굴림체에서 시작되지 않은 굴림체, 이 발상의 전환이야말로 굴림체의 변신을 가능케 한 원리다.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