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디자인 품과 격』(편석훈 저, 윤디자인그룹, 2020) 내용 일부를 재구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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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정체는 1990년 윤디자인연구소에서 출시한 첫 번째 제목용 서체다. 당시 제목체로는 드물게 4종 굵기(Ultra light, Light, Medium, Bold)를 지원했다. 이 점이 시장에서 셀링 포인트로 작용하며 머리정체는 윤디자인연구소의 베스트셀러 서체로 자리잡았다.
여기서 잠깐,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의 우리나라 미디어 환경 변화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는 머리정체의 개발 배경이기도 하다. 90년대 초 매킨토시가 국내 출판계에 본격 도입되면서 인쇄 환경은 크게 변화했다. 아날로그 방식인 사진식자(寫眞植字)에서 전자 출판 시스템, 즉 DTP(Desk Top Publishing)로 진일보한 것이다. 디지털화 된 서체라는 뜻의 ‘폰트’ 개념이 정착한 시점도 이때다.
이후 우리나라의 여러 출판사, 잡지사, 언론사 등은 DTP를 속속 도입하기 시작했다. 기존 편집·조판 시스템의 대대적인 판 갈이가 이루어진 셈인데, 요컨대 출판 환경이 완전히 디지털로 전환된 것이다. 인쇄매체 시장에서는 새로운 니즈가 발생했다. 디지털 환경과 호환되는 다양한 한글 폰트의 개발이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윤디자인연구소를 비롯한 폰트 회사들이 태동했다.
시장 상황을 주시하며 세운 전략적 행보
다시 머리정체 이야기로 돌아오면, 당시 윤디자인연구소는 본문용 폰트뿐 아니라 제목용 폰트 개발에도 주력했다. 본문용 한글 폰트 개발이 시대적 요구에 발맞춘 행보였다면, 제목용 한글 폰트 개발은 당시 시장 상황을 주시하며 세운 전략적 행보였다. 오늘날 시점에서 80~90년대는 인쇄 시장의 번성기로 구분되곤 하는데, 나 역시 동감하는 바다.
다종다양한 총서와 잡지가 등장했고, 독자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한마디로 ‘많이 읽고 읽히던 시대’였다. 그중에서도 꽃은 잡지였다고 생각한다. 거짓말 조금 보태 눈 뜨고 일어나면 새 잡지가 창간하던 때였다. 잡지 시장이 활성화됨에 따라 인쇄 광고물도 쏟아졌다.
머리정체는 90년대 초반 디지털 환경의 광고 시장을 겨냥한 기획물이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엔 지금처럼 폰트 가짓수가 많지 않았고, 광고마다 똑같은 폰트가 쓰이기 일쑤였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머리정체는 감각적 디자인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4종 굵기 지원 등 메시지(광고 카피) 전달의 표현 다양화까지 주도했다. 헤드라인(headline)의 ‘헤드’, 즉 ‘머리’를 붙여 제목용 서체임을 부각한 직관적 네이밍도 머리정체의 인기에 한몫했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났다. 80년대 후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변화 못지 않게, 2000년대 디지털 기술의 고도화 또한 미디어 환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은 나뿐만 아니라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도 인지하고 있었다. 머리정체의 ‘변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90년대 초반의 머리정체는 2015년 ‘머리정체2 베이직’과 ‘머리정체2 스페셜’, 2019년 ‘머리정체2 배리어블(variable)’ 등 세 가지 버전으로 재탄생했다. 3단 변신인 셈이다.
2015년 베이직·스페셜의 경우, 사내에서는 ‘머리정체 개선 프로젝트’라 명명했다. 이 ‘개선’이라는 말이 참 오묘하다. 고치고(改) 나아지게(善) 한다는 뜻인데, 고치기와 나아지게 하기 모두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현역 장병들이 ‘훈련’이라는 단어에 바짝 긴장하듯, 나 역시 ‘개선’ 앞에선 꽤나 예민해진다.
머리정체 개선 프로젝트는 기획부터 개발까지 총 3년이 걸렸다. 그만큼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었다. 기존 머리정체의 장점을 유지하면서도 최신 미디어 환경과 트렌드를 반영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당시 이 프로젝트에 투입된 서체 디자이너 네 명이 무척 고생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개선이라는 말에 걸맞게 머리정체의 시안 작업은 수 차례 앙케트를 통해 사내외 의견을 적극 반영했다. 윤디자인그룹 서체 디자이너들, 그리고 실무직에 종사하는 외부 전문가 패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그렇게 머리정체2 베이직의 최종 시안이 완성되었다.
머리정체2 스페셜은 베이직의 재해석 버전이다. 머리정체 자체의 주목성 강한 시각 특성은 유지하되, 시장의 사용성과 트렌드를 고려해 개성을 가미한 것이다. 개선된 머리정체, 즉 머리정체2의 형태를 바탕으로 4종의 스페셜 서체들을 파생한 것이 머리정체2 스페셜이다.
촘촘한 자간과 두꺼운 세로 획으로 주목도를 키운 ‘카카오’부터, 군더더기 없이 굵고 간결한 ‘네이비’, 가로세로 획 대비(굵기 차이)를 크게 처리한 ‘올리브’, 장식성을 강조한 ‘바이올렛’까지. 머리정체2 스페셜 4종은 제목용 서체로서의 사용성을 극대화한 결과물이다. 상품명, 신문 및 뉴스의 헤드라인, 광고 카피, 포스터 디자인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시각 표현 요소로써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제목체인 것이다.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베이직과 스페셜 그 이상의 머리정체가 우리에겐 필요했다.
머리정체2 배리어블을 시장에 출시한 이유
머리정체2 베이직·스페셜 출시 1년 뒤인 2016년 9월, 주목할 만한 폰트 관련 해외 뉴스가 있었다. 국제타이포그래피협회(ATypI, Association Typographique Internationale)가 개최한 컨퍼런스 ‘AtypI Warsaw’(에이타입 바르샤바) 소식이었다. 이 행사에서 이른바 ‘오픈타입 폰트 배리어블(OpenType Font Variables)’이라는 기술이 소개됐다. ‘OT 1.8’이라고도 명명된 이 기술은, 사용자가 직접 폰트의 스타일(굵기, 폭, 세리프/산세리프 등)을 조절하게 해준다.
이렇게 조절된 폰트는 ‘배리어블 폰트(Variable Fonts)’라 불린다. 해외 디자인 매체 〈type.today〉는 배리어블 폰트에 대해 “새로운 디지털 폰트의 시대로 안내하는(ushering in a new era in digital fonts)”이란 수식어를 붙이기도 했다.
머리정체2 베이직, 머리정체2 스페셜에 이은 머리정체의 또 다른 변신 형태는 바로 배리어블 폰트였다. 머리정체2 배리어블은 ‘내 마음대로 내 취향대로 폰트를 가지고 놀다’라는 콘셉트를 표방하며 2019년 출시됐다. 세리프(명조), 산세리프(고딕), 인라인, 글자 선·면의 색상을 사용자가 직접 변형해 쓸 수 있는 폰트다.
출시 당시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배리어블 폰트는 아직 범용화 단계로는 진입하지 않았다고 본다. 어쩌면 배리어블 폰트라는 개념 자체가 낯선 이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일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반응형 타이포그래피 같은 특정 작업 시 드물게 사용되는 듯한데, 그마저도 보기는 드물다.
그럼에도 머리정체2 배리어블을 시장에 내놓은 까닭은, 오랜 기간 폰트를 연구하고 개발해온 기업으로서 하나의 사례를 남기고 싶어서였다. 신서체 개발을 통한 수익 창출에만 급급한 기업이 아닌,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 변화를 연구하고 기존 서체를 끊임없이 최신화시키는 기업, 폰트의 품질뿐 아니라 폰트 시장의 품질까지 높이는 기업. 내가 생각하는 윤디자인그룹은 그런 기업이다.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