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발표된 한글 폰트들을 통해
누군가에겐 당시의 초심을,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디자인 크리에이티비티를!
폰트에도 스타일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스타일이란, 고딕 스타일, 명조 스타일과 같은 형태적 분류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지칭하는 ‘스타일리쉬(stylish)’를 일컫는다. 폰트 스타일에 대한 설명은, 저자가 저술한 『한글 디자인 품과 격』에서도 다룬 바 있어 일부 인용한다.
똑같은 옷을 입어도 어떤 이는 ‘멋스럽다’는 말을 듣고, 어떤 이는 ‘안 어울린다’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몇몇 셀리브리티들에게 옷 잘 입는 방법을 물어보면 그들은 하나같이 “많이 입어보면 내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말하는 ‘어울리는 스타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폰트와 패션은 참 닮은 꼴이 많다. 물론 그 자체의 물성이 전혀 다르기에 결코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쓰임’에 있어서는 이 둘의 비슷한 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똑같은 폰트라도 어떤 디자인 작업물에 쓰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멋스럽다’거나 혹은 ‘안 어울린다’거나) 평가된다. 그래픽 디자인이나 광고, 영상물 등을 보다 보면 ‘참 잘 어울리는 폰트’를 사용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 패션계에서 말하는 ‘스타일이 좋다’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스타일이 좋다, 이 말을 나는 ‘시각적으로 멋스러우면서도 안정감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흔히 말하는 기본이 되어 있으면서 적재적소 어울리는 나만의 멋을 표현하는 것, 다시 말해 폰트에 필요한 기본(자모음의 시각 변별성, 가독성, 디자인 완성도 등)을 갖추면서도 어떤 미디어에 적용해도 절대 뒤쳐지지 않는 폰트들은 ‘스타일이 좋은 폰트’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스타일이 좋은 폰트가 좋다. 유행에 휘둘리는 스타일이 아니라 당당하게 오늘의 트렌드를 대변하며 앞장설 수 있는, 그런 스타일이 좋다. 『한글 디자인 품과 격』 82~84쪽 일부 인용
‘햇살’체를 이야기하기 전에 스타일부터 거론한 이유는, 햇살체가 바로 ‘스타일이 좋은 폰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떤 미디어에 적용해도 결코 뒤쳐지지 않는 폰트, 당당하게 오늘의 트랜드를 대변하는 폰트’ 중 하나가 바로 햇살체다.
새로운 조합형 스타일의 서체, 햇살
1995년에 발표된 햇살체는, 회상체 이후에 조합형 스타일의 고딕체를 다시 시도한 서체다. 햇살체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 빨랫줄 글씨의 조합형 서체와는 다른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햇살체는 기획 당시부터 기존의 조합형에서 보여지는 딱딱한 네모꼴 고딕체에서 벗어나, 다른 형태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햇살체의 콘셉트는 ‘글자 하나 하나에 아이 같은 표정을 담아 귀여운 느낌을 주고, 동화적인 조형미를 최대한 살리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아침 햇살과 같은 밝고 산뜻한 이미지의 서체를 만들고자 했다. 여러 시안을 검토한 결과, ‘ㅅ’과 ‘ㅇ’꼴을 주축으로 하여 어린아이처럼 머리가 무겁고 다리가 가는 형태를 표현한 시안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세로획에도 무게 변화를 두어 윗부분이 넓고 아래로 갈수록 가늘게 만들어가면서 새로운 조합형 스타일의 서체가 완성되었다.
『윤서체 아카이브』에 설명된 햇살체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빨랫줄 구조의 독특함을 디자인 메인 콘셉트로 삼아, 글자 획의 폭을 다르게 하여 독특한 느낌의 동화적인 조형미를 살려 밝고 산뜻한 느낌을 주는 서체다.”
폰코(FONCO)의 설명도 함께 덧붙여본다. “햇살을 받으며 거리를 걸으면 마음이 한없이 순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그때 우리의 표정, 햇살체의 생김새와 닮지 않았나요? 햇살체는 이른 아침 햇살처럼 맑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얼굴을 떠올리게 하는 귀여운 폰트입니다. 글자 하나, 하나. 각기 다른 표정을 그려 넣듯, 글자마다 폭과 길이를 다르게 조정해 올망졸망한 감성을 연출하였답니다.”
햇살체와는 다른 균형과 조형으로 업그레이드된 ‘햇살2’
햇살체 자체가 워낙 좋은 서체이기는 했지만, 좀더 확장성과 미래성을 내포하면서 즐거움과 안정감을 강조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이러한 기획 의도를 디자이너에게 전달했고, 2018년 업그레이드 버전인 ‘햇살2’가 출시되었다. 기존 햇살체는 Light, Medium, Bold 3종으로 구성되었다면, 햇살2는 Regular와 Semibold를 추가함으로써 총 5종의 굵기 표현으로 더욱 풍성한 표현이 가능하도록 했다.
햇살체와 햇살2는 동일한 빨랫줄 구조와 조형감을 가지고 있지만 각각 다른 인상을 표현한다. 햇살체는 직선의 획으로 깔끔하고 선명하게 표현했다면, 햇살2는 부드러운 모서리의 굴림 표현을 더해 동화적이고 생동감 있는 표현을 돋보이게 했다. 또한, 햇살체는 ‘ㄱ, ㅅ’의 삐침을 직선으로 내려주어 속공간이 일반적 형태보다 훨씬 크게 보인다면, 햇살2는 직선에서 곡선으로 완만하게 내려주어 부드러운 느낌을 강조했다.
아래는 폰코(FONCO)에 소개된 햇살2에 대한 설명이다. “아침 햇살처럼 명랑한 표정을 지닌 폰트입니다. 기존 햇살체의 빨랫줄 구조와 조형감에 부드러운 모서리 표현을 더해 더욱 동화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업그레이드했어요. 다섯 단계의 굵기 표현으로 더욱 풍성해진 햇살2, 매일매일 일상의 빛을 표현해 볼까요?”
이처럼 햇살2는 언뜻 보기엔 햇살체의 뼈대를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이지만, 햇살체와는 다른 균형과 조형을 가질 수 있도록 각각의 글자마다 수정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세심한 작업 덕분에 햇살2 역시 ‘스타일이 좋은 폰트’가 되었고,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폰트가 될 수 있었으리라 본다.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 저서로는 『한글 디자인 품과 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