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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석훈의 백 투 더 90 #8 ‘여름’

    윤디자인그룹 편석훈 회장의 1990년대 ‘윤폰트’ 리뷰 — 사계절 서체 [여름]


    글. 편석훈

    발행일. 2022년 07월 21일

    편석훈의 백 투 더 90 #8 ‘여름’

    90년대 발표된 한글 폰트들을 통해
    누군가에겐 당시의 초심을,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디자인 크리에이티비티를!

    ‘여름’체는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순차적으로 발표한 ‘봄·여름·가을·겨울’ 시리즈 서체 중 하나다. 지난 겨울체에서는 필기체에 대한 설명을, 봄체에서는 제작 과정에서도 글자 표현에 대한 설명을 주로 했다면, 이번 여름체에서는 구체적인 제작 과정에 주안점을 두고 폰트 제작 과정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탈네모꼴 필기체의 느낌으로 제작한 여름

    여름체는 ‘여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시원하고 가볍게 디자인하자는 기획자의 제안에 따라, 처음에는 디나루체 스타일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여려 우여곡절 끝에 3차 시안까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디나루체 성격을 기본 콘셉트로 하고자 했던 것을 과감히 포기하게 되었고, 새롭게 콘셉트 설정부터 다시 하게 되었다.

    이처럼 여름체는 콘셉트 설정에 있어서는 봄체 보다도 쉽게 시작했는데 반해, 표현 방법에 있어 그 어느 서체보다도 어려움을 겪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후의 여름체 제작 과정은 1996년 가을에 발간된 타이포그래피 전문지 『정글』 기사를 통해 소개한다.

    『정글』 제2호(1996년 가을호)에 소개된 여름체, 28~29쪽
    아래 글(여름 하면 떠오르는 ~ ‘여름’은 만들어졌다)은 해당 지면의 전문을 옮긴 것이다.

    여름 하면 떠오르는 보편적 이미지는 시원한 바다, 바람, 산, 계곡 바캉스, 가벼운 옷차림, 작열하는 태양, 강렬한 원색, 넘치는 에너지, 젊은이 등이다. 봄철에 이은 제2의 성장기로서, 완숙미보다는 생동감 그 자체에 의미가 있고, 가식 없이 솔직하고 시원스럽게 표출하는 시간대이기도 하다.

    이렇게 기본 이미지들을 연상해가며 표현을 이끌었고, 현재 시중에 사용되는 평범한 필기체와는 구조나 획의 모양, 방향성 등에서 성격이 다른 신선한 필기체를 제작하고 싶었다. 다행히 한 종의 필기체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어서 ‘보편성’과 ‘차별화’라는 상충되기 쉬운 이중적 부담에서 벗어나 여름체 자체의 성격에 충실할 수 있었다.

    한글은 ‘그’나 ‘뢸’, ‘뺀’처럼 구조 원칙이 똑같이 적용될 수 없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또한 모아쓰기는 음소보다 음절의 개념이므로, 같은 굵기로 제작했을 때 시각적 무게감이 획이 많은 글자에 쏠리게 되며, 속공간의 부족으로 가독성 역시 떨어진다.

    그때마다 무리하게 네모틀 안에 끼워넣는 것은 제작자의 입장이나 읽는 독자에게 고역이 아닐 수 없다. (흔히 속공간을 단순히 남는 공간, 수동적 공간이라고 인식하기 쉽다. 그러나 속공간은 획의 반대되는 개념일 뿐만 아니라 상호 보완이 가능한 관계로서,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여름체를 형성하는 기초는 네모틀에서 벗어나 가상적 무게중심선이 위쪽에 위치하는 구조다. 속공간은 ‘기, 긴, 길’ 등 종성의 획에 따라 각기 다르게 적용해줌으로써 시원하게 처리했다. 그리고 새로운 구성에서 오는 유머러스한 재미에 주목하였다.

    질감은 필기 도구에 구애받지 않아서 순수 본연의 손맛이 느껴진다. 획은 장식이 배제되고 단순하게 제작되어 한 획당 4개의 점이 획의 기본 구성이다. 가로 획의 오른쪽 상승으로 방향감과 율동감을 주었고 획의 운필의 압력에 따라 획 안에서의 굵기에 차이를 두어 표현하였다. 획들은 응집되기보다 분산된 구성으로 개방적 이미지를 주며, 흘림체보다는 가독성에 충실한 필치가 잘 어울린다.

    구체적인 작업은 먼저 샘플을 제작한 뒤, Bold, Medium, Light에 따라 굵기 실험을 거쳐 2,350자씩 각 굵기에 따라 파생시킨다. 여름의 경우는 Light를 제작한 후 Bold를 제작하고, Medium은 자동 파생시켜서 낱자의 세부 사항을 수정했다.

    한글꼴 완성 이후 영문 캐릭터의 디자인이 진행되었고, 그중에서 한글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캐릭터들(낱자의 캐릭터보다는 영문간의 관계, 한글과 영문간의 관계 등 이른바 관계성을 중요시하는 개념)로 취합되었다.

    영문의 캐릭터가 완료되자 낱자마다 개별적인 적당한 width(낱자의 자간을 포함한 넓이나 폭)를 지정했다. 한글 2,350자에 width를 주면 용량을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한글은 1000unit로 통일시켰다. 글자 수가 몇 자 안 되는 영문과 숫자는 캐릭터마다 개별적 width가 가능하다.

    한글은 대체로 네모꼴에 맞기 때문에 개별적 width가 가능해지면 모든 자간의 공간이 일정해질 수 있으나, 숫자나 알파벳은 그 형태가 들쑥날쑥하여 width를 조절하더라도 어떤 캐릭터와 어우러져 쓰이느냐에 따라 자간의 공간 크기가 달라진다.

    따라서 kern이라는 것을 주게 된다. 이를테면, ‘AY’는 ‘AA’ 보다 자간이 넗어서 ‘A’와 ‘Y’ 사이를 붙여준다. 참고로 width와 kern을 조절한다는 것은 ‘AAA’부터 ‘ZZZ’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우의 수를 테스트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약물 기호를 한글, 영문, 숫자에 맞게 디자인하고 실험을 거쳐 반각(space)과 삼분각, 사분각의 적절한 폭을 적용하게 된다. 이 모든 작업이 완료되면 한글, 영문, 숫자, 약물 기호를 함께 테스트하고 다시 무리가 있는 것은 수정하게 된다. 이 같은 제작 과정을 통해 ‘여름’은 만들어졌다.

    1997년 제작된 윤서체 매뉴얼 『윤놀이』 중 여름체 소개 페이지

    여름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여름’체

    『윤서체 아카이브』에 설명된 여름체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딱딱하고 정형화된 헤드라인체와는 달리 탈네모꼴 필기체의 느낌으로 제작하여 여름의 이미지를 부여하였다. 필기체에서 오는 부드러움을 살려 시원하고 가볍게 디자인하고, 자연스러운 구성에서 오는 친밀감과 유희성을 기본으로 단순하고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다음 내용은 폰코(FONCO)에 소개된 여름체에 대한 설명이다. “여름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지 않나요? 필기체 특유의 자연스러움을 십분 발휘한 이 가벼운 탈네모꼴 폰트처럼 말이에요. 매년 꾸준히 더워지는 여름, 축축 처지기만 하는 여러분에게 유연하면서도 직선의 리듬감이 살아 있는 여름체를 처방합니다. 비록 컴퓨터 앞에 앉아있을지언정 여름 특유의 시원한 감성만은 한껏 느껴볼 수 있을 거예요.”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를 공개하자면, 90년대 당시 여름체는 여름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여름 프로모션 홍보물이나 광고에 여름체가 헤드라인으로 쓰인 사례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지난 1회에 소개한 ‘소망’처럼 폰트 네이밍의 덕을 톡톡히 본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름체에는 여름의 계절감을 그대로 반영하기 위해 콘셉트 설정부터 수차례 다시 반복 작업한 디자이너의 수고와 열정이 있었기에, 지금도 많은 이들이 여름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 저서로는 『한글 디자인 품과 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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