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발표된 한글 폰트들을 통해
누군가에겐 당시의 초심을,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디자인 크리에이티비티를!
폰트를 제작하는 이들에겐 몇 가지 습관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모든 사물이나 감정을 폰트에 대입해보는 것이다. 지금 눈에 띄는 사물들을 폰트와 연관짓는다거나, 혹은 과거나 현재 느낀 감정들을 폰트 이미지로 연상해보는 것이다. 윤디자인연구소에서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순차적으로 발표한 ‘봄·여름·가을·겨울’체도 그렇게 탄생되었다. “사계절의 감각을 폰트로 표현해본다면 어떤 느낌일까?”라는 생각에서 시작한 봄·여름·가을·겨울체는,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성공한 시리즈 폰트’로 기록되고 있다.
필기체 붐을 일으킨 시리즈 폰트
봄·여름·가을·겨울체는 판매 실적뿐 아니라 국내 유수의 매체에 소개되는 것은 물론, 여러 곳에서 수상의 영광도 안았다. 1995년 월간 『디자인』에서 수여한 ‘올해의 디자인상’ 수상도 그 중 하나다. 봄·여름·가을·겨울체의 수상 이유는 이러했다. “윤디자인연구소의 필기체 ‘봄·여름·가을·겨울’을 올해의 디자인상으로 최종 결정하게 된 데에는 디자인계에 일조하는 바가 클 뿐 아니라 앞으로 서체 개발 산업, 특히 필기체 개발의 붐을 조성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작용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바로 ‘필기체’다. 스크립트 폰트(Script Font) 혹은 손글씨체로도 명명되는 필기체는 고딕체와 명조체 중심이었던 90년대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특히, 머리정체와 같은 굵고 강한 헤드라인용 서체가 제목용 서체로 주로 이용되던 당시 상황에서 ‘겨울’체가 획기적으로 제목용 서체로 사용된다거나, 명조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출판 시장에서 본문용 서체로 ‘봄’체가 사용된 것은 디자인계에 파란을 일으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필기체에 대한 설명은 1996년 가을에 발간된 타이포그래피 매거진 『정글』에 소개된 글로 대신하고자 한다. 시대가 변하고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래 소개하는 내용은 비단 필기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서체 제작에 있어 근간이 될 수도 있는 주요 내용이기 때문이다. 봄·여름·가을·겨울체는 아래 글이 설명하고 있는 기본 콘셉트를 바탕으로, ‘필기의 자연스러운 흐름과 시각적인 편안함’을 살리는 것과 동시에 ‘글자의 균형이 조화를 이루는 통일성 있는 서체’가 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제작되었다.
필기체 개발에서의 가장 중요한 점은 ‘필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살림과 동시에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체의 제작 과정에 있어, 필기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필기구 자체의 성격이나 지질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표현 방식에서 펜촉이나 플러스펜, 마카펜, 붓, 크레용 등 저마다 가지고 있는 기능성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서체의 독특한 성격이 창출된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구조적인 부분에서의 변용이다. 곧,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고정 서체의 차원을 넘어 더욱 새롭고 용도에 적합한 독창성과 참신성을 갖춘 스타일을 필요로 한다. 물론 여기에는 통일성이 결여되어서는 안된다. 세 번째로는, 특히 간과하기 쉬운 가독성이다. 독특한 손맛을 살려 디자인된 서체라 하더라도 가독성을 상실한 서체는 문자로써 기본적인 기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나름대로의 성격을 부여한 독특한 디자인이어야 한다. 이는 이미지로도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부분이다. 곧, 손놀림이나 각도에 따라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운치 또는 힘찬 느낌을 살릴 수도 있으며, 손글씨에서 오는 특유의 친밀감 등을 구사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자연스러운 특성을 기계적이고 작위적인 메커니즘의 상징인 컴퓨터를 통해 어떻게 표현해내느냐 하는 또다른 어려움도 따른다.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출발한 ‘겨울’체
봄·여름·가을·겨울체 중에 ‘겨울’체를 가장 먼저 소개하는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지금 계절이 겨울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편석훈의 백 투 더 90]을 통해 봄·여름·가을체를 계절에 맞춰 소개할 예정이다.
우선, 『윤서체 아카이브』에 소개된 겨울체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의 이미지에서 출발하여 필기의 기분을 살린 스타일로, 글자체 각각에 변화를 주어 시원한 공간감을 느낄 수 있게 하였다. 텍스처는 차갑고 날카로운 얼음조각의 이미지를 적용했지만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앙상한 나뭇가지의 이미지에서 출발했다고는 하지만, 겨울체는 봄·여름·가을체 보다 더 힘있고 강하게 느껴진다. 이런 도드라진 특징 때문인지 겨울체는 TV CF와 출판물에 유독 많이 사용되었다. 겨울체가 발표된 이후에 사용자들(디자이너들)에게 직접 들었던 당시의 평가들은 대부분 이러했다.
“필기체 특유의 자연스럽고 안정감 있는 느낌이 좋다”, “강한 느낌의 볼드체는 완성도가 높아 헤드라인 서체로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폰트가 시리즈로 제작되어 차례로 소개되는 과정이 재미있어 관심이 간다”, “자간이나 행간 적용에 있어 사용상 용이할 수 있도록 좀더 완성도 있게 작업되었으면 한다”, ···.
이렇게 취합된 의견들은 바로 디자이너들에게 전달했고, 수정이 필요한 부분들은 다시 보완 작업에 들어갔다.
업그레이된 겨울II와 시리즈 폰트가 갖는 의미
겨울체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겨울II’가 1998년에 발표되었다. 아래 내용은 폰코(FONCO)에 소개된 겨울II에 대한 설명이다.
“겨울II에는 겨울나무에 눈 쌓이는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녀린 나뭇가지의 앙상한 느낌을 살린 필기체 폰트이지만, 두께를 달리하면 함박눈 쌓인 듯 포근한 감성의 연출도 가능하다. 날카롭고 예리한 이야기부터 폭신폭신 따뜻한 이야기까지, 기나긴 겨울밤처럼 겨울II로 쓸 수 있는 이야기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겨울II 설명이 꽤나 감성적으로 변화한 것처럼, 겨울II는 기존 겨울체에 비해 세심한 부분에 더 공을 들였다. 무엇보다 붓글씨 특유의 정밀한 느낌을 강조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질감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데이터 용량이 필요로 했다. 또한, 문장이 길어졌을 때의 가독성 문제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수많은 테스트 작업을 거치고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봄·여름·가을·겨울체와 같은 ‘시리즈 폰트’ 제작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작업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대한·민국·독립·만세’ 시리즈 폰트를 들 수 있다. ‘한글 디자인의 역사적 기획’이라는 취지로 시작한 대한·민국·독립·만세체는 2013년부터 2019년까지 장장 7년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화합·소통·의지·외침’이라는 네 가지 역사적 메시지를 대중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이처럼 윤디자인그룹은 앞으로도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인지하고 기억하는 의미나 역사 등을 시리즈 폰트로 소개할 예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폰트 제작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만들었다”는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완성도 높은 서체를 제작했다”라는 것임을 명심하고,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