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발표된 한글 폰트들을 통해
누군가에겐 당시의 초심을,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디자인 크리에이티비티를!
오늘 소개하는 ‘윤고딕’은 단연코 윤디자인그룹을 대표하는 서체다. 처음 윤고딕 100을 발표한 1990년대부터 윤고딕 매거진 700이 발표된 2020년대 현재까지, 윤고딕은 가히 디지털 폰트가 시대와 기술,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며 발전해왔는지를 선두의 자리에서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폰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의 시대는 미디어의 발전과 액정의 고화질 변화 등으로 본문체가 꼭 명조 계열(바탕체)이어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환경의 변화에 맞게 이제 본문체도 획일화된 명조 계열에서 벗어나 고딕 계열이나 기타 다른 계열의 서체가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윤고딕 시리즈가 국내 처음으로 본문용 서체를 6종에서부터 9종까지 다양한 굵기의 폰트 패밀리를 선보였듯이, 이제는 다채로운 활용성을 발판으로 앞으로의 시대를 대변함과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는 기준이 되어줄 것이다. 윤고딕과 관련된 내용은 필자가 저술한 『편석훈의 한글 디자인 품과 격』에 자세히 소개한 바 있어, 그 내용을 일부 인용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디지털 본문체 역사의 시작
폰트는 사용 목적에 따라 크게 제목용 폰트와 본문용 폰트로 나뉜다. 제목용 폰트는 디스플레이 폰트(display font), 즉 장식용 폰트로도 불리는 것처럼 주로 인쇄편집이나 광고, 영상 타이틀 등에 사용되며, 트렌드에 민감한 편이다. 이에 반해 본문용 폰트는 말 그대로 대다수 미디어의 본문에 사용되기 때문에 제목용 폰트에 비해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 제작 기간 역시 제목용 폰트에 비해 상당한 시간에 걸쳐 작업된다. 보통 제목용 폰트 제작 기간이 1년이라면, 본문용 폰트는 최소 3~4년이 소요되기 때문에 오랜 인내가 필요한 분야다.
1990년대 들어 기존 사식인쇄 방식에서 DTP 방식으로 인쇄 기술이 변화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1960년대 만들어진 고딕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30여 년의 시간이 흘렀고, 또한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DTP 시장에 있어서는 환경 변화에 따른 새로운 본문체가 필요했다.
본문용 폰트는 제목용 폰트에 비해 과감한 변화가 힘든 분야다. 특히, 당시의 인쇄출판업계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난 새롭고 진보적인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본문체의 경우, 익숙하지 않은 서체에 대한 사용자들의 거부반응이 컸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혀 새로운 본문체를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 고딕체의 단점을 파악하고 개선점을 마련하겠다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했다.
윤고딕 개발에 착수한 것은 91년으로, 기존 고딕체의 문제점을 샅샅이 분석하는 작업부터 시작되었다. 기존 고딕체는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만들어졌던 까닭에 자폭이나 크기가 불규칙하고 디테일한 부분들의 통일성이 부족한 점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우선 굵기별 모듈이나 디테일의 일관성 면에서 엉성한 부분들(수작업으로 제작된 한계)을 개선하기 위해 글꼴을 다듬고 단순화시키는 작업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무게중심선을 상단 맞추기로 조정해 글줄의 완성도를 높이고, 획에서 불필요한 돌기를 없애 굵기를 일정하게 하되, 장체로 쓸 경우를 대비해 가로획보다 세로획을 굵게 했다. 또한, 기존 고딕체의 견고딕과 중고딕, 세고딕이 굵기에 따라 부분적으로 모양이 달랐던 것들을 통일하고 불필요한 여백을 없애는 등 최대한 단순화시키는 작업에 집중했다.
처음 제작한 본문용 고딕 폰트는 ‘우리고딕’으로, 가는 글꼴 3종을 먼저 만들었다. 이후 우리고딕의 단점을 보완해 ‘윤고딕’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굵은 글꼴 세 가지를 추가함으로써, 타사의 보편적인 고딕체 구성(Light, Medium, Bold 3종)과는 전혀 다른 윤고딕 110, 120, 130, 140, 150, 160 총 6종의 폰트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6개의 굵기로 구성된 윤고딕 100은 한글 폰트 시리즈의 이름이 숫자로 표기된 첫 번째 폰트이자, 한글 폰트 최초로 6가지의 굵기로 구성된 폰트 패밀리이기도 했다. 윤고딕 100은 작업 기간만 꼬박 3년이 걸렸다. 이렇게 6종이 개발된 이유는 사용자들의 편리를 위해서였다. 다양한 굵기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니즈가 있었고, 그들의 요구에 맞춰 6종의 본문체가 개발되자 업계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윤디자인그룹의 윤고딕 역사가 이제 시작된 것이다.
정성껏 갈고 닦은 탄탄한 기본기, 윤고딕 100
『윤서체 아카이브』에 설명된 윤고딕100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기존 고딕의 산만한 느낌을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두고 불필요한 세리프를 제거하였다. 장체로 쓸 경우에 삐침이 벌어져 글자 굵기의 방향성을 상실하는 데 반해 세로획과 가로획의 굵기 대비를 주어 장체로 쓸 경우에도 안정감을 유지하도록 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 내용은 폰코(FONCO)에 소개된 윤고딕 100에 대한 설명이다. “윤고딕 100의 첫인상은 그 어떤 폰트보다 깔끔합니다. 기존 고딕의 산만함을 최소화하기 위해 불필요한 세리프를 전부 제거했거든요. 그뿐인가요? 세로획을 가로획보다 굵게 설정해 장체로 써도 안정감을 유지합니다. 변함없이 굳건한 디지털 본문체의 살아있는 역사, 지금 체험하세요.”
꾸준히 이어지는 변화와 보완
폰트는 한 번 출시되었다고 해서 작업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특히, 본문용 폰트의 경우에는 계속 관리되고 다듬어져야만 한다. 윤고딕 100 출시 이후 30년에 걸쳐 장기적인 계획이 세워졌다. 기초 구조 연구와 개발을 통한 지속적인 보완 작업을 진행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
이에 따라 탈네모꼴의 윤고딕 200과, 100 시리즈를 업그레이드한 300, 공간의 분할을 과학적으로 세밀하게 조정하여 심미성을 높인 400, 본문용으로 주목성을 향상시킨 500을 거쳐, 굵기 단계를 9단계로 새롭게 구성한 윤고딕 700까지,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른 지속적인 보완이 진행되었다.
윤고딕 제작 연혁
· 1993년 우리고딕 1차본 완성
· 1994년 우리고딕의 굵기 추가 및 수정을 거쳐 ‘윤고딕’으로 서체 명칭 변경, 윤고딕 100 3종 완성
· 1996년 윤고딕 100 6종 완성
· 1997년 윤고딕 300 완성
· 2000년 윤고딕 200 완성
· 2002년 윤고딕 400 완성
· 2004년 윤고딕 105, 윤고딕 500 완성
· 2012년 윤고딕 700 9종 완성
· 2015년 윤고딕 705 완성
· 2020년 윤고딕 매거진 700 완성
· 2020년 윤고딕 매거진 700 완성
윤고딕 100부터 윤고딕 매거진 700까지 장장 3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은 윤고딕 800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기획 중이기는 하지만 기본 콘셉트만 공개한다면, ‘윤디자인그룹이 추구하는 본문체의 모던함은 과연 어디까지 추구될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본문체 개발은 매우 까다롭고 힘든 작업이다. 언뜻 보면 비슷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미세한 세리프의 각도 조절, 여백과 굵기 변화 등에 따라 전체 분위기가 좌우되기 때문에 오랜 시간 매달려야 한다.
그래서 신입 디자이너들에게 “손글씨 폰트는 감각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지만 본문체는 최소 3~4년 정도 작업을 해봐야 소위 말하는 ‘감’을 잡을 수 있고, 5년은 되어야 본문체를 제대로 작업할 수 있다”고 언질한다. 그리고 “본문체를 만들고 나서야 폰트의 균형과 조형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도 전한다. 엄청난 인내와 끝없는 공부, 재반복, 장인정신이 필요한 분야, 이것이 바로 윤명조·윤고딕과 같은 본문체 개발이다.
많은 사람들은 묻는다. 윤디자인그룹은 왜 계속 윤명조·윤고딕 시리즈를 발표하느냐고, 그리고 언제까지 이 시리즈를 계속할 것이냐고.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윤명조·윤고딕과 같은 본문체 개발은 국가 경쟁력과 한글 문화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계속 연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말하는 이유는, 본문체야말로 한글의 유구한 문화유산으로 그리고 역사로 기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본문체 시리즈를 개발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하자면, 아마도 윤디자인그룹이 지속되는 한, 아니 최소한 내가 윤디자인그룹 대표로 있는 한은 윤명조·윤고딕 시리즈는 계속될 것이다.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 저서로는 『한글 디자인 품과 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