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기자가 ‘한국영화 똑같은 글씨체의 제목, 식상하지 않나요?’라는 기사를 썼다. 기사 내용을 요약해 보면 올 상반기 개봉한 한국영화들의 타이틀 글씨가 붓글씨체로 글씨체가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천편일률적인 캘리그래피는 이미지가 중요한 영화 타이틀에 그리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으며 단순한 캘리그래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다양한 글씨체로 영화를 표현하는 방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과연 붓글씨체라서 비슷한 것일까?
캘리그래피의 표현이 단순할까?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전 칼럼에서 ‘캘리그래피는 왜 붓글씨가 많은가’와 캘리그래피의 주 도구가 왜 모필과 화선지, 먹물인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다양한 감성표현의 최고의 도구는 모필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다. 이것을 과연 어떻게 표출하느냐가 관건이다. 모필은 필력, 즉 쓰는 속도, 누르는 힘, 붓이 닿는 부분, 먹물의 양, 쓰는 종이 등에 따라 다양한 선의 표현이 가능하다. 이러한 부분은 감성표현, 다시 말해 글씨의 표정을 갖게 된다. 한 가지 더 붙인다면 글꼴, 자형에서 그 표현은 극에 달하게 된다.
자형은 표현하고자 하는 모양을 담기도 하고 글자 안의 공간, 여백은 보는 사람들의 느낌을 다르게 나타나게 한다. 이론적 설명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좋은 글씨들은 이러한 부분들이 내재하여 있으며 작가의 감각까지 더해져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붓글씨는 다 비슷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과연 어떻게 하면 붓글씨의 다양함을 일반인들과 클라이언트에게 전할 수 있을까?
지금 캘리그래피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는 겸업을 하는 사람도 있고, 전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분명 예전보다 좋아진 것은 확실한데 활동하는 작가들이 많아지다 보니 그중에는 좋은 글씨가 있고, 그저 붓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쓴 붓글씨에 지나지 않는 글씨도 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포트폴리오에 집착하게 되고 이러한 현상은 캘리그래피의 올바른 문화형성에 저해요인이 되고 있다. 또한, 클라이언트는 캘리그래피는 붓글씨면 된다는 생각에 저가의 글씨를 찾게 되면서 더욱 혼탁하여지고 있는 현실이다.
하나의 캘리그래피의 사례가 만들어지는 데는 클라이언트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몇 가지 시안에서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클라이언트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고 그에 맞는 글씨를 고민하고 써야 하며 서로의 신뢰 속에 좋은 글씨가 만들어진다. 몇 가지 사례들을 참고하여 그와 비슷하게 쓰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캘리그래피도 엄연한 창작물이므로 쉽게 쓰면 된다는 생각을 떨쳐내야 할 것이다. 창작의 고민과 고충은 작가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게 되며 이러한 글씨는 캘리그래피를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똑같은 붓글씨라 보지 않을 것이다.
글씨는 선과 공간으로 글꼴이 만들어지게 된다. 선 하나하나를 함부로 그냥 써서는 안 되며 하나의 선이 그어졌을 때, 감흥이 느껴져야 하며 그 선들이 모여 하나의 글자가 탄생하게 된다. 그 글씨는 표정이 생기고, 그 글자들의 구성은 캘리그래피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지금까지 캘리그래피의 글씨들은 글씨의 본연의 모습보다는 수식과 테크닉에 치우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진심으로 좋은 글씨를 쓰기 원한다면 이제는 근본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건물을 짓는데 기초공사가 부실하면 건물은 완성도 되기 전에 무너져 버리고 말 것이다. 또한, 배우가 많은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연기를 해야 하며, 많은 인생 경험 또한 필요하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어느 하나 기초가 탄탄하지 않으면 그 위의 것을 선보일 수 없다. 캘리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질이다. 다양한 선 표현을 위해서는 다양한 서체를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지금부터라도 외형보다는 내적 충만에 많은 공부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해 나는 무엇을 어떻게 노력하고 고민했나를 생각할 시기이다. 단지 붓으로 글씨의 외형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읽고 쓰게 됨을 느낄 때 좋은 글씨가 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다. 옛 선현들의 글씨와의 만남은 새로운 나를 찾는 발판이 될 것이며 현시대에 어떠한 글씨가 필요한지를 깨우쳐주는 스승이 될 것이다.
오민준
현재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에서 대학정통서예를 공부한 후 신고전주의 캘리그라피/서예작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