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래피의 수요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그에 발맞춰 캘리그래피를 배우려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고무적인 일이지만 명암 또한 존재한다.
캘리그래퍼가 증가함에 따라 글씨가 다양해지고,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긍정적인 면이다. 또한 캘리그래퍼들에게는 발전적인 자극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캘리그래피와 한글에 대한 이해와 인식 없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현상은 우려스럽다. 그중에는 무조건 예쁜 글씨나 흘려 쓰려 하는, 적절치 않은 캘리그래피도 많기 때문이다.
어느 디자이너가 외쳤다는 ‘이 지긋지긋한 캘리그래피’라는 비명은 유행처럼 번진 캘리그래피 열풍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는 한글 캘리그래피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탓도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 캘리그래피를 활용한 광고나 디자인이 홍수를 이루다보니 그또한 시각적 공해로 느껴진다. 각각의 고유한 특성은 물론이고, 글의 내용이나 미적으로 어떤 연관성도 없이 단순히 캘리그래피를 위한 캘리그래피인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우리의 간판 문화를 개선한다는 취지로 시행되고 있는 획일화된 간판 개선사업처럼 또 하나의 획일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이런 현상의 밑바탕에는 한글을 깊이 있게 연구하지 않고 단지 표현의 수단으로 쉽게 이용하려는, 한글 캘리그래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제품 각각의 이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개성을 담아야 하는데, 개성 있는 솜씨보다는 오직 붓에 의존해 획일화된 글자를 생산하고 있는 듯 하다. 붓으로 쓴 것이라 하여 모두 캘리그래피는 아니다. 글자에 담긴 뜻을 글자라는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 캘리그래피다. 따라서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더불어 즐거움을 주는 감성적인 글꼴일 때 좋은 캘리그래피라 할 수 있다.
그동안 기업들은 감성적이고 차별적인 표현 요소로 캘리그래피를 선호했는데, 그러다보니 글꼴과 표현이 모두 비슷해져 차별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브랜드의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아 오히려 문제다. 캘리그래피의 홍수 속에서 철학과 주제, 그리고 품격을 찾기란 실로 어렵다. 한동안 그 화려함이 계속 될 테지만 그것이 얼마나 건실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요즘처럼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캘리그래피는 스스로 캘리그래피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최근 기업들도 트랜드에 맞춘 무분별한 캘리그래피 로고타입의 문제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지난 2011년 CJ제일제당이 단행한 브랜드 리뉴얼은 ‘전통으로의 회귀(Return to roots)’로 볼 수 있다. ‘요리 재료’라는 본래의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 ‘백설’이라는 전통적인 브랜드로 회귀한 것인데, 기업 브랜드는 예쁜 글씨가 아닌 차별적인 접근이 필요하며 그것이 꼭 캘리그래피일 필요는 없다.
캘리그래피의 공급과잉
캘리그래피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캘리그래퍼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나 강좌도 많아졌다. 늘어나는 교육장과 강사들, 넘쳐나는 수강생으로 인한 인력의 공급과잉은 이제 공공연한 일이 되었다. 혹자는 저변이 확대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한다. 하지만 독립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디자인과 어우러졌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캘리그래피의 특성상 디자인 시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공급은 이미 차고 넘친다. 이로 인해 배운 티는 나는데 가독성에 문제가 있거나 심미적으로 수준 이하인 작업이 양산되는 것, 천편일률적인 글자체 스타일 또는 베끼기 등 여러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는 캘리그래피의 발전방향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글씨는 특성상 꾸준한 노력과 수련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수료한 후 무엇인가가 될 것처럼 이야기하는 일부 단체의 민간자격증 시험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자격증을 주고 심사하는 사람들의 자질이나 권위가 과연 충분한지도 의문스럽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포트폴리오도 채우지 못한 사람이 누구를 심사할 수 있단 말인가? 과거 POP나 북아트의 유행처럼 새로운 시장이나 직업을 창출하는 것이 아닌 오직 강사 자격증만을 위한 배움으로 변질될까 걱정스럽다. 캘리그래피의 희귀성이 결여되면서 시장의 혼탁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캘리그래피의 생명력
우리나라 캘리그래피 시장은 현재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한국적인 디자인 찾기의 맥락이 될 수도 있고, 감성디자인 또는 하나의 트랜드로 그칠 수도 있다. 캘리그래피가 단순한 트랜드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것을 함께 다듬고 가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성과 정서를 담아내는 것은 물론 다양한 표현을 시도해야 한다. 또한 캘리그래피를 단순히 그래픽 모티브나 소스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까지 함께 부각시켜 예술적 작업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일찍이 다양한 분야에서 캘리그래피를 활용하고 있는 일본의 예를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한글 캘리그래피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캘리그래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있는 한글문화이기 때문이다. 캘리그래피가 단지 한 시대의 트랜드에 그치는 것이 아닌 꾸준한 생명력을 가진 분야로 자리잡기를 바라본다.
박선영 그래픽디자이너이자 996크리에이티브랩 소장.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창립회원으로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동양적인 문화요소와 조형을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으로 융화시키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 그는 독립적인 프로젝트 활동 및 문화 관련 프로젝트와 전시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래픽디자인 관련 과목을 강의 중이다. 논문 〈캘리그래피(손멋글씨)의 조형적 표현과 활용에 관한 연구〉발표했고, 이탈리아 Utilila Manifesta/Fight Poverty design contest 2010에서 작품이 선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