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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균 칼럼 #2 죽음의 가치를 디자인하라

    과거 마을마다 상여가 있고,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상을 치러주던 시절에는 끈끈한 인간관계의 ‘가치’가 살아 있었다. 이청준의 원작 소설을 임권택이 영화로 제작한 ‘축제’에서는 이런 가치가 잘 그려지고 있다.


    글. 김경균

    발행일. 2013년 01월 25일

    김경균 칼럼 #2 죽음의 가치를 디자인하라

    000교수 부친상. 00병원 장례식장 0호. 0월 00일 6:30 발인. 이번 주만 벌써 세 번째다. 요즘은 휴대전화가 죽음의 메신저다. 우리는 이 문자에 익숙하게 반응한다. 서랍에서 ‘賻儀(부의)’라고 인쇄된 봉투를 꺼내 우선 이름을 쓴다. 상주와의 관계를 잠시 고민하다가 조의금 봉투를 적당히 채워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봉투를 내밀고, 방명록에 사인한다. 국화 한 송이를 올리고, 망자를 향해 두 번, 상주와 한 번 절한다. 약간 어정쩡한 자세로 형식적인 위로의 인사를 전하고 나오면 아는 사람들이 있는 테이블로 안내된다.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술을 한잔하면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나오면 요식행위가 끝난다. 직접 못 가면 누군가를 통해 조의금만이라도 전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매우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이 요식행위를 소홀히 하지 못한다.

    과거 마을마다 상여가 있고,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상을 치러주던 시절에는 끈끈한 인간관계의 ‘가치’가 살아 있었다. 이청준의 원작 소설을 임권택이 영화로 제작한 ‘축제’에서는 이런 가치가 잘 그려지고 있다. 죽음을 단지 슬픈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장례식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이승보다 더 편한 저승으로 간 기쁜 순간으로 해석해 유족들을 달래고, 가족 간의 갈등을 해소한다. 그리고 결국은 마을 전체의 축제로까지 승화시켜 커뮤니티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로 삼았던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그 끈끈한 정은 희미해지고 말았다.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이 아니라 병원과 상조회사가 장례식의 모든 과정을 대행하기 때문에 조의금 봉투만이 인간관계를 확인하는 유일한 ‘가치’로 전락하여 버렸다.

    그런데 요즘은 그 조의금 봉투마저도 최소한의 ‘가치’가 디자인에 반영되지 못해 안타깝다. 한자를 모르는 세대는 장례식장에서 ‘華婚(화혼)’이라고 인쇄된 봉투를 내미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싸구려 종이에 경박하게 인쇄된 ‘賻儀’와 ‘華婚’, 이 두 종류의 봉투는 문구점이나 심지어 지하철 계단에서까지 ‘가치’가 아니라 동일한 ‘뭉치’로 거래될 뿐이다. 그러다 보니 회사 봉투나, 장례식장 입구에 쌓여 있는 편지 봉투라도 상관없다. 망자나 유가족들에 대한 예의는 단지 얼굴도장을 찍었는지 아닌지, 그리고 그 봉투에 얼마를 넣었는지에 의해 평가될 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봉투의 가치는 상관없이 단지 그 안에 들어있는 돈의 가치만을 따지게 되었던 것일까?

    일본의 야마구치 노부히로가 디자인한 축의금 봉투와 조의금 봉투는 바로 그 ‘가치’를 디자인의 중심에 두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우선 재료부터 전통 수제 종이인 미노 와시(美濃手漉き和紙)를 사용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모서리의 귀가 살아 있는 와시를 풀로 붙이지 않고 단지 접는 방법만으로 완성했다. 이렇게 전통 와시의 부드러우면서도 반투명한 질감을 잘 살려 디자인한 봉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느껴진다. 축의금 봉투는 뒷면의 빨간색이 얼비치면서 봉투가 오른쪽으로 열린다. 조의금 봉투는 같은 디자인이지만 얼비치는 색이 검은색이고 봉투가 열리는 방향은 반대로 왼쪽이다. 심플한 접지 방법에 컬러와 방향만으로 음과 양,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에 대한 동양적 ‘가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디자인이 기분 좋다.

    이치마츠 경조사 봉투, 사진 출처: http://origata.com

    장례식장이라는 공간 역시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어떤 병원인지, 얼마나 큰 방에서 문상객을 맞이하는지, 얼마나 많은 화환이 나열되어 있는지가 망자와 상주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하고 있을 뿐이지 결국 장례식장의 구조는 어디나 똑같다. 돌잔치 뷔페나 결혼식장이 그렇듯이 천편일률적이다. 마치 2박 3일 정차했다 떠나는 죽음의 터미널처럼 장례식장은 잘 짜진 타임라인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그 공간을 구성하는 소품 역시 마찬가지다. 우선 플라스틱 종려나무로 부피를 키우고, 흰 국화로 그럴듯하게 장식된 화환에 매달린 리본의 글자는 전부 출력이다. 전국을 온라인으로 연결하는 꽃 배달 서비스에는 ‘謹弔(근조)’라는 글씨를 멋들어지게 써내려갈 캘리그래퍼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 언제 저런 서체가 개발되었는지, 혹시 그 서체 개발에 디자이너는 조금이라도 관여했는지 가끔은 궁금해지기도 한다.

    장례가 매장에서 화장으로 전환되면서 이제는 대세가 되어버린 납골당도 마찬가지다. 닭장 같은 납골당은 아파트를 그대로 닮아있다. 아파트에 평수와 로열층이 있듯이 납골당 역시 그 크기와 층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장례식장의 공간과 소품, 그리고 그 형식에 의해 만들어진 죽음에 대한 기묘한 ‘가치’에 길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면서 급기야 ‘먹튀’ 상조회사가 활개를 치고, 금박으로 도배한 수 천 만원의 수의와, 수 백 만원의 상감청자 납골함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식으로 상조 시장의 외형은 커지고 고급화되고 있는 반면 죽음에 대한 ‘가치’의 본질은 점점 망각하고 있으니, 그 디자인은 논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앞으로 독신 가구의 증가와 고령화, 저출산, 개인주의 사회로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그나마 유지됐던 끈끈한 인간관계의 ‘가치’는 더더욱 희박해질 것이다. 한편에서는 안락사와 존엄사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도 없이 혼자 죽어야 하는 상황이 더욱 절박하게 다가오고 있다. NHK 다큐멘터리 ‘무연사회’는 이미 이런 현상을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다. 2010년 당시 일본의 무연고 사망자는 3만 2천 명에 이르렀고, 그 주검의 대부분은 마치 분리 수거되는 쓰레기처럼 단순 처리되었다고 한다.

    『무연사회』 NHK 무연사회 프로젝트 팀 저, 김범수 역, 용오름, 2012년

    그런데 한국은 일본보다 오히려 출산율이 더 낮고, 만혼이나 미혼 추세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독거노인은 2000년 55만 명에서 2010년 102만 명으로 급증했다. 1~2인 가구의 70%가 60대 이상의 고령자들이며, 빈곤층의 절반 이상이 1~2인 가구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나라도 결국 혼자 살다가 혼자 죽는 무연사회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10~20년 뒤의 장례식 풍경은 과연 어떻게 변할 것인가?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시스템은 어떻게 디자인되어야 할 것인가? 지금부터 우리 사회는 심각하게 죽음에 대한 서비스 디자인을 논의하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규모 사고나 자연재해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일본의 디자이너 토다 츠도무(戸田ツトム)는 재난 컨설턴트 와타나베 미노루(渡辺実)와 함께 1995년 발생한 고베 대지진을 교훈 삼아 앞으로 닥칠 수 있는 또 다른 재해를 대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 기업의 후원으로 그들이 여러 지자체에 제안한 것은 다름 아닌 골판지로 만든 관이었다. 지진 등의 대규모 재해가 발생했을 때, 결국 그것을 사전에 막을 수가 없다면 수습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다량의 관이다. 그러나 나무 관은 제작 시간과 무게, 비용의 부담은 물론이고, 많은 양을 미리 보관할 수 없다. 또한, 나무 관은 시신의 부패를 가속화해 시켜 여름철에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 시켰던 것을 경험하였다. 따라서 그 대안으로 골판지로 접을 수 있는 관을 만들어 각 지자체가 다량으로 확보해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국민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 프로젝트는 결국 단 한 곳의 지자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몇 년 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해 불행하게도 그의 예측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대규모 재해로 사망한 1만 6천 명의 유해는 대부분 자루에 담겨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웃하고 있는 한반도 역시 이런 대규모 사고나 자연재해에 안전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태에 대비한 국가적 차원의 서비스 디자인에 대해서도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종이 관, 출처: 『음양론(陰陽論)』 토다 츠도무(戸田ツトム) 저, 세이토샤(青土社), 2012년

    연말이면 몇몇 지인들과 함께 ‘상상(想喪)’ 전에 참여하고 있다. 이 전시는 디자인 운동가 권혁수의 발의로 시작되어 지금까지 5년을 이어오고 있다. 2008년 여름, 거의 같은 시기에 죽음을 맞이한 두 소설가, 솔제니친과 이청준의 장례식을 비교해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낀 것이 전시 기획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구소련 스탈린주의에 항거한 대문호의 죽음 앞에 수천 명의 시민과 대통령까지 참석해 수도원에서 엄숙하게 이루어진 솔제니친의 장례식과 병원 영안실에서 그저 그렇게 이루어진 이청준의 장례식은 그 수준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2010 〈상상〉 전 전시장 풍경

    〈상상〉 전은 정병규, 서기흔, 홍성택, 권혁수, 정주하, 김주성, 이나미, 김경균, 오진경, 박연주 등이 참여해 지금 이 시대 상황에서의 죽음이라는 문제를 새롭게 상상하고,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그 가치를 다양한 실험 정신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나는 2년 전 처음 이 전시에 참여하면서 내가 죽은 뒤에 차려질 제사상은 과연 어때야 하는지를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일반적인 홍동백서 식의 상차림이 내 인생을 절대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모아왔던 종이나 돌, 조가비, 동전 등의 각별한 의미가 담긴 소품을 나열해 내 나름의 제사상을 차려 전시를 했다. 그리고 전시가 끝난 뒤에는 소품들을 다시 모아 사진과 함께 상자에 잘 담아 보관하고 있다.

     2010 〈상상〉 전 권혁수                                                                                         2010 〈상상〉 전 서기흔 

    2010 〈상상〉 전 김경균

    언젠가 나는 죽을 것이고, 그때는 누군가가 이 상자를 열어 사진을 보고 그대로 나열하면 제사상이 차려질 것이다. 이렇게 전시를 통해 40대 후반까지의 삶을 정리하고 나니 나름 상당히 머리가 맑아졌다. 마치 윤달에 수의를 마련하거나, 영정 사진을 찍으면 장수한다는 믿음처럼 기분 좋게 50대의 삶을 디자인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려운 것이고, 가족들에게는 슬픈 일이다. 그러나 결코 그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와 가치를 적극적으로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그 유명한 묘비명도 사실은 번역의 오류에 불과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라도 지금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죽음의 가치는 리 디자인되어야 마땅하다.

    김경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디자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다수의 심포지엄과 전시회 기획, 공공디자인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십인십색』, 『일본문화의 힘(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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