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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환의 Design in Cinema #1 영화 속 잡지 디자인의 세계

    잡지 디자이너는 프라다를 입을 시간이 없다


    글. 장성환

    발행일. 2012년 01월 10일

    장성환의 Design in Cinema #1 영화 속 잡지 디자인의 세계

    패션 잡지 세계의 인물들과 경쟁 관계를 실감나게 그려내어 큰 호응을 얻었던 2006년작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 속 등장인물인 미란다(메릴 스트립 분)는 실제 『보그』의 편집장인 애나 윈터(Anna Wintour)를 모델로 했다고 알려져 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배경은 뉴욕이다. 왜 뉴욕이어야만 했을까? 뉴욕은 문화·예술·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디어의 중심지이다. 거대 미디어 그룹인 콘데 나스트(Condé Nast)와 허스트 커뮤니케이션(Hearst Communications)이 뉴욕 맨해튼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제 영화 속 주인공들의 무대가 되는 잡지 세계를 디자이너의 눈으로 한번 들여다보자.

    지방 명문대 출신인 앤디(앤 헤서웨이 분)는 푸른 꿈을 안고 뉴욕으로 상경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결국 신문 기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패션 잡지 『런어웨이』의 편집장 미란다의 비서직에 응모를 한다. 패션과는 상관없이 살아온 앤디는 좌충우돌하며 좌절도 하지만 서서히 패션 잡지 산업에 적응해 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집장 미란다가 자신의 집으로 어떤 책을 가져오라고 지시한다. 앤디가 첫 출근한 날 선배 에밀리(에밀리 블런트 분)가 아무에게나 맡겨지지 않는 책이라고 으스대던 그 책, 밤 10시 반이나 돼서야 디자인 팀에서 넘어오는 그 책, 커다랗고 두꺼우며 포스트잇이 잔뜩 붙어 있는 바로 그 책. 대체 ‘그 책(the book)’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책은 바로 패션 잡지 『런어웨이』의 가제본이다. 편집 회의에서 결정된 기획안대로 취재하고 촬영해 디자인 팀으로 넘겨진 기사와 사진 들이 레이아웃 및 컬러 프린팅 작업을 거쳐 링 제본(스프링 제본)으로 정리된 가제본, 즉 『런어웨이』 다음 호의 모든 것이 담긴 책이다. 각 파트의 수정된 부분에 포스트잇이 붙여진 상태로 편집장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편집장은 이 책을 새벽까지 검토한 뒤, 아침에 출근해 앤디의 책상 위에 던져 놓는다. 그러면 각 파트 담당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분철한 다음, 자신의 꼭지에 체크된 수정 사항대로 기사와 사진을 교체하거나 재촬영해 디자인 팀으로 넘긴다. 이때가 어림잡아 늦은 오후이고 디자인 팀이 작업을 마무리하는 때가 밤 10시 반 정도인 것이다. 이 과정을 최종 인쇄 직전까지 끝없이 반복한다고 하니 얼마나 지난한 일이겠는가. 물론 완성도는 처음보다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영화 중반에 편집 회의 장면이 나온다. 그 자리에서는 놀랍게도 겨울호를 만드는 지금, 2월호 모델 섭외와 여름호 기획까지 언급된다. 실제로 『보그』의 각 호는 발행 3개월 전부터 작업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번 시즌이 아닌 다음 시즌을 먼저 취재하기 때문이다. 그 달 그 달 취재해서 제작하는 한국의 잡지 상황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발행 부수만 해도 천지 차이. 국내는 수만 부에 불과하지만 『보그』는 100만 부가 넘어간다. 이러한 ‘규모의 경제’가 세계 최고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잡지 디자이너의 밤을 불사르는 야근은 현실의 『보그』도, 영화 속 『런어웨이』도 어쩔 수 없다. 모든 작업 과정의 끝에 디자인 작업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극중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나이젤(스탠리 투치 분)의 작업 장면을 보면, 그의 등 뒤로 한 달 동안의 일정이 빼곡하게 적힌 일정표가 모니터에 떠 있다. 또 다른 영화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2004)에서도 정신없이 바쁜 디자이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편집장의 최종 승인(이른바 ‘컨펌’)을 받기 위해 몇 개의 시안 보드를 들고 안달하는 디자이너 말이다.

    앞서 언급한 링 제본 책 『런어웨이』는 다음 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일급 비밀이다. 그런 만큼 신뢰할 수 없고 어설픈 비서에게는 맡길 수 없는 중책인 것이다. 만약에 이런 정보가 상대편 잡지사 쪽에 넘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영화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에서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주인공 제나 링크(제니퍼 가너 분)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는 패션 잡지 『포이즈』의 정보가 경쟁지 『스파클』로 계속 새어 나가는 바람에 낭패를 겪는다. 『스파클』은 『포이즈』와 동일한 기획에서 한 발 더 앞선 내용을 다룬다. 『포이즈』가 표지 모델 제니퍼 로페즈를 섭외해 「그녀의 10가지 비밀」이라는 특집 기사를 내놓으면, 『스파클』은 동일한 표지에다가 한 술 더 떠 「그녀의 11가지 비밀」을 싣는 식이다. 가판대에 나란히 놓여 비교되며 판매되는 상황에서는 매우 치명적이다. 잡지사의 흥망이 달린 중요한 일이랄까.

    하지만 영화와 달리 패션 잡지의 표지 모델이 경쟁지와 똑같은 경우는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당일치기가 아니라 사전에 섭외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사 잡지사가 몰랐다고 하더라도 모델 자신이 같은 타깃층의 잡지에 표지로 등장하는 건 도덕적 책임에 의해서라도 사전에 거절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다만 예외적인 것은 영화 잡지나 시사 잡지이다. 당시의 최고 이슈가 되는 인물을 표지 모델로 하기 때문에 겹칠 확률이 높다. 이때 그 인물을 어떤 시각으로 다루어 변별성을 주느냐가 디자인 팀의 고민이다. 실제로 과거 노태우 대통령 퇴임 후 불거진 비자금 사건 때 시사 주간지의 표지가 충돌했던 적이 있다. 두 주간지의 표지가 만 원짜리 지폐의 세종대왕 얼굴에 노태우 대통령 얼굴을 합성했던 것이다. 같은 인물이 나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겹쳤다는 것이 문제였다. 두 시사지가 가판대에 걸려 있는 모습에, 보는 내 마음이 다 졸아들 정도였으니 디자인을 한 당사자들은 오죽했을까.

    이 교훈 덕분에 표지가 겹칠 만큼 큰 이슈의 표지를 디자인할 때는 경쟁지 디자이너는 평소에 어떤 방식으로 작업해 왔고 이번 이슈에 어떻게 대처할까 하는 데까지 신경을 쓰게 되었다. 잡지를 디자인한다는 것은 결국 수많은 커뮤니케이션의 결과이며 다양한 상황을 전제로 판단한 콘텐츠의 적합한 시각화 작업이다.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 가지 없는 것〉를 보면 주인공 제나가 가판대에서 자신이 만든 잡지 위에 전시된 경쟁지를 몰래 들어내 구석으로 가져다 놓는 장면이 있다. 시사 주간지 디자인을 하던 시절, 광화문 가판대에서 내가 저질렀던 행동이 떠올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잡지 디자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한 가지는 자신이 디자인하는 매체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다.

    장성환

    디자인 스튜디오 203 대표.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 타이포분과 이사, 디자인단체 총연합회 실행위원을 역임했다. 홍익대학교 재학 시절 홍대신문 문화부장을 맡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졸업 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입사해 잡지를 만들며 서체 디자인 작업을 했고, 이후 『주간동아』 및 『과학동아』 아트 디렉터로 활동했다. 『시사저널』, 『까사리빙』, 『빅이슈 코리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서울대학교·서울여자대학교·호서대학교 등에서 편집 디자인 강의를 해왔다. ‘홍대앞’(서교동·망원동·연남동·합정동 등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일대를 일컫는 고유 명칭)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2009년 홍대앞 동네 잡지 『스트리트 H』를 창간하여 홍대앞이라는 역동적 장소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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