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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선영의 캘리 & 그래피 #2 이 캘리그래피는 어디에서 왔는가?

    놓치기 쉬운 캘리그래피 저작권 ― 박선영의 캘리 & 그래피(aka 캘리그래피 야화)


    글. 박선영

    발행일. 2012년 01월 18일

    박선영의 캘리 & 그래피 #2 이 캘리그래피는 어디에서 왔는가?

    첫 컬럼이 게재된 뒤 타이포그래피 서울 편집부로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고 한다. 발신자는 컬럼에 첨부되었던 영화 포스터의 글씨 디자인을 담당한 캘리그래퍼였다. 자신의 작품이 컬럼에 사용되었음에도 작가명이 표기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자 이메일을 보낸 것이었다. 확인해보니, 컬럼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필자가 놓친 실수였다. 캘리그래피 이야기에 캘리그래퍼 이름이 빠져 있다니…. 뒤늦게 작가명을 포스터 하단에 명시하는 것으로 일은 좋게 마무리되었으나, 입맛은 영 개운하지 않았다. 하여, 오늘은 놓치기 쉬운 캘리그래피의 저작권 인식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우리가 현재 온라인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캘리그래피 작품들은 저작권과 성명표시권 등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몇몇 캘리그래퍼들은 불법 도용을 우려해 자신의 블로그나 홈페이지에 고해상도의 대용량 파일은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방책이 나온 것은 그들의 피해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저작권은 저작물의 창작과 동시에 발생하며, 어린 아이가 그린 그림이라 하더라도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을 수 있다. 그것은 창작물에 대해 창작자가 취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다. 하물며 전문 작가의 노고가 담긴 작품이 합당한 저작권을 통해 보호받지 못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필자는 캘리그래피를 대하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작가의 고뇌가 담긴 엄연한 개인의 창작물이고, 디자인의 부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문학•음악•회화 작품처럼 하나의 예술 장르라는 인식이 확고해져야 한다. 아울러, 캘리그래퍼들 역시 적극적으로 저작권을 주장하여 더 이상 불이익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글자꼴 저작권 소송은?

    영화 〈축제〉(1996) 포스터 / 여태명 작 ‘춘향전’ 일부(동아일보 1997)

    1996년 개봉작인 영화 〈축제〉 포스터는 글자꼴 도용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최초의 글자꼴 저작권 소송을 야기하기도 했다. 개인의 글자꼴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처음으로 인정받은 판례로 사법연수원 판례집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당시 〈축제〉의 제작사인 태흥영화사가 여태명 교수의 작품을 포스터 제목에 무단으로 도용했는데, 결국 법원으로부터 무단 도용한 글자당 1천만 원씩, 총 2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또 법원은 소설책 〈축제〉의 제목에 여태명 교수의 서체를 도용한 출판사에게도 5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문제의 서체는 여태명 교수가 1994년 5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한국청년작가초대전에 출품한 ‘춘향가’ 속에 들어 있던 창작서체 중 일부였다.

    사건의 시초가 된 연원은 이렇다. 태흥영화사 측이 〈축제〉의 포스터 제작을 디자인 회사에 의뢰했고, 이 디자인 회사는 한국청년작가초대전 도록에 실린 여태명 교수의 서체로 포스터를 제작한 것이다. 지적재산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여태명 교수는 도용 사실을 확인한 뒤, 영화사에 시정을 요구했음에도 조치가 취해지지 않자 소송을 냈다고 한다. 당시 법원판결을 살펴보면, 글씨체는 작가의 독창적 노력의 산물로 지적재산권을 가지는 엄연한 창작물이며 영화사 측이 이를 무단 도용함으로써 작가의 저작인격권을 침해했다고 밝히고 있다. 

    2002 한일 월드컵, 붉은악마, 그리고 캘리그래퍼

    붉은악마 티셔츠 ‘Be the Reds'(2002), 캘리그래피 박용철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2002년 월드컵의 함성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유행했던 붉은색 티셔츠 역시 저작권 분쟁에 휘말렸다. 티셔츠에 새겨진 ‘Be the Reds’라는 문구 때문이다.

    응원 열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축구팀 응원단 붉은악마가 제작한 ‘Be the Reds’ 티셔츠는 월드컵 기간 동안 2500만 장이 판매되며 그 해 최대 히트상품이 되었다. 일명 ‘짝퉁’ 티셔츠도 길거리 좌판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월드컵 막바지에는 이 옷을 입지 않고 응원하는 것이 어색하게 보일 정도였다.

    티셔츠 판매가 절정으로 치솟았던 2002년 6월, ‘Be the Reds’ 문구를 쓴 디자이너 박영철은 한국저작권위원회에 이 문구의 글씨체 디자인을 등록했다. 이와 함께 붉은악마의 광고 대행사였던 (주)토피안을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주)토피안은 시안료 200만 원으로 저작권을 샀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 돈이 양도의 대가로 판단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박영철의 손을 들어주었다. 붉은악마가 비상업적 단체이기에 상표권 출원자를 자신들이 아닌 (주)토피안으로 했음에도, 디자인의 저작권은 디자이너 본인에게 있다고 판결한 것이다. 당시 법원은 “문구의 글자 중 ‘R’은 ‘12번째 선수가 되자’는 뜻에서 숫자 12를 본 떠 만들었고 첫 글자인 ‘R’자와 마지막 글자인 ‘S’의 끝이 만나도록 디자인한 것도 성적과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응원하자는 뜻으로 했다”는 박영철의 주장을 받아들여 글씨체나 색상 등에 저작권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저작권을 양도한다는 계약이 없는 한, 소액의 시안료를 받았다 할지라도 디자인에 대한 권리는 창작자에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월드컵이 폐막하고 한참 뒤에 나온 판결이다. 공식 제작업체인 붉은악마 못지않게 짭짤한 수입을 거뒀던 짝퉁 제작업체와 길거리 좌판은 자취를 감춘 이후였다. 이들로부터 보상을 받을 길은 요원해진 것이다. 

    거침없는 캘리그래피 짜집기

    영화 〈각설탕〉(2006)_제작 싸이더스FNH / 드라마 〈뉴하트〉(2007)_편성 MBC

    영화 〈각설탕〉과 의학드라마 〈뉴하트〉의 제목을 비교해보면 어딘가 닮아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뉴하트〉의 제목이 〈각설탕〉의 제목에 사용된 캘리그래피를 이용하여 짜깁기한 것으로 보인다. 

    제작연도도 〈각설탕〉이 앞서고, 〈뉴하트〉에서 ‘뉴’의 ‘ㅠ’ 와 ‘트’의 ‘ㅡ’ 가로선은 동일한 선으로 두 번 반복되어 나오니 짜깁기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두 작품의 디자이너가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으나, 동일 디자이너가 이전의 자료를 가지고 다시 작업한 것일 수도 있겠다. 답은 〈뉴하트〉의 제목을 디자인한 사람이 쥐고 있을 것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자. 〈각설탕〉의 ‘ㄱ’은 〈뉴하트〉의 ‘ㄴ’으로 바뀌었고, ‘각’의 ‘ㅏ’는 ‘하’의 ‘ㅏ’ 로, ‘설’의 ‘ㅓ’는 ‘뉴’의 ‘ㅠ’ 일부로, ‘설’의 ‘ㅓ’는 ‘트’의 ‘ㅡ’로, ‘탕’의 ‘ㅌ’은 ‘트’의 ‘ㅌ’으로, ‘탕’의 ‘ㅏ’는 ‘하’의 ‘ㅎ’일부로, ‘탕’의 ‘ㅇ’은 ‘하’의 ‘ㅎ’ 일부로 쓰였다.

    〈각설탕〉의 제목 글꼴이 지닌 입에 닿으면 금방 녹아버릴 듯한 질감 표현과 자연스러운 공간 배분은 영화의 내용과 제목을 고려해 디자인된 것이다. 말과 기수의 따뜻한 사랑 이야기인 〈각설탕〉의 글씨를, 압도적 긴장감을 유발하는 의학드라마의 타이틀로 조합해쓴다는 것은 원작이 가진 감성과 목적에 맞지도 않는다. 이처럼 원작과 무관하게 짜깁기된 〈뉴하트〉의 네모꼴 글자를 보고 있자니 씁쓸한 생각이 든다.

    사실 〈뉴하트〉의 짜깁기 타이틀은 일견 이상해 보이지도 않는다. 캘리그래피의 자소를 분해하고 조합해서 쓰는 일은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 직원을 고용해 캘리그래피 파일을 모아 일러스트 파일로 전환하도록 시킨다는 디자인회사도 있다고 하니 참으로 위험하고 심각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거침없이 하이킥!〉(2006)_제작 초록뱀미디어 / ‘거침없이 갈아타자!'(2007), 수도권 통합 환승할인제 표어

    2007년부터 시행된 수도권 통합 환승할인제의 표어는 ‘거침없이 갈아타자!’이다. 누가 봐도 당시 인기 시트콤이었던 MBC 〈거침없이 하이킥!〉의 타이틀을 패러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원작자에게 허락을 받았는지는 궁금할 따름이다. 공공성을 내세워 은근슬쩍 넘어가지 않았기를 바란다. 사실 대놓고 따라했으니, 이것은 차라리 귀엽다고 해야 할까?

    ‘거침없이 갈아타자!’의 ‘갈’자에서는 ‘ㄹ’의 획이 완벽하지 않아 ‘ㅈ’으로 보이는 문제를 안고 있다. 애초에 없는 자소를 만들다 생기는, 짜깁기의 여파라 할 수 있겠다. 짜깁기의 흔적은 ‘ㄱ’과 ‘ㅈ’, ‘ㅏ’의 반복에서도 계속 나타난다. 연속성을 중요시 여기는 시리즈물에서는 똑같은 글꼴을 약간만 수정해 사용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거침없이 갈아타자!’의 경우처럼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불법으로 자소를 분리해 쓰는 상황일 것이다.

    위의 두 사례는 작가의 저작인격권 중 하나인 동일성유지권을 위반한 것이다. 동일성유지권은 저작물의 내용 및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허락 없이 변경과 삭제 등에 의해서 손상되지 않도록 할 권리를 의미한다. 물론 저작권자의 특별한 의사표시가 있다면 변경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저작권 위반 사례들은, 한번 당기면 계속 나오는 칡넝쿨처럼 무궁무진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는 대량복제로 인한 원본의 불확실성과 표절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웹을 떠다니는 출처 불분명의 이미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현상은 통제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떤 법적인 규제나 제도적 장치 마련을 기다리기에 앞서 디자이너가 자발적으로 자기 작품의 저작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작권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의식과 자정 노력은 아직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보다 현실적인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한국저작권위원회의 문을 두드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또한, 계약 시 캘리그래피를 한 매체에만 사용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여러 매체에 게재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작품을 도용하거나 변형하는 것뿐만 아니라 애초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용도로 쓰는 것도 모두 저작권에 어긋나는 것이니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캘리그래피도 사진이나 일러스트처럼 용도에 맞는 계약을 따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계약 대상의 전체적인 디자인 범위에 포함된 금액이 아니라, 캘리그래피만을 따로 분리한 별도 항목이 책정되어야 하고, 매체와 규모에 따라 용도를 정확히 지켜야 한다. 이 부분은 일차적 소비자인 디자이너뿐 아니라 최종 클라이언트의 이해와 관심이 필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쪼록 캘리그래피 저작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하루빨리 정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자문: 여태명 문자조형연구소, 강병인캘리그라피연구소 술통

    박선영
    그래픽디자이너이자 996크리에이티브랩 소장.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창립회원으로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동양적인 문화요소와 조형을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으로 융화시키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 그는 독립적인 프로젝트 활동 및 문화 관련 프로젝트와 전시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래픽디자인 관련 과목을 강의 중이다. 논문 〈캘리그래피(손멋글씨)의 조형적 표현과 활용에 관한 연구〉발표했고, 이탈리아 Utilila Manifesta/Fight Poverty design contest 2010에서 작품이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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