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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새봄의 미미와 소소 #9 명조의 이응

    미미하고 소소해 보이지만 글자 완성도를 좌우하는 요소들 ― 명조의 이응


    글. 이새봄

    발행일. 2021년 11월 25일

    이새봄의 미미와 소소 #9 명조의 이응

    바탕(체)’과 ‘궁서(체)’를 아는가? 이 둘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우 시스템 폰트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둘은 하나의 폰트명이기 이전에, 한글 서체의 유형을 일컫는 용어다. ‘바탕’은 명조이고 ‘궁서’는 궁중서체의 줄임말로 붓글씨 서체의 일종이다.

    이 두 서체는 생김새가 매우 다르기에 쓰임새도 다르다. 바탕, 즉 명조는 본문서체의 대명사라 할 만큼 일반 서적, 각종 인쇄물 등의 본문에 사용되고 있고, 궁서는 고전적인 분위기를 나타내거나 진지한 유머 글 등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최정호의 원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서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다. 이는 바로 원작자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명조체는 조선 여인들에 의해 다듬어졌던 한글 궁서체 중 해서체를 다듬은 것으로 붓의 스트로크와 붓이 지니는 특성을 참작하여 만들어졌다. 따라서 명조체의 특징은 궁체(필기체)의 필력에 의한 세리프의 크고 작은 뉘앙스라 할 수 있다.”
    최정호, 「서체 개발의 실제」, 『한글글자꼴 기초연구』(출판연구총서 7), 한국출판연구소 지음·출판, 1990, 199~200쪽

    “궁서체는 본래 조선조의 규중 여인들에 의해 다듬어진 궁체를 서예가 김충현씨가 정리했던 글씨체이다. 그런데 활자화에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에 서예 궁서체의 해서체를 그 본으로 삼아 작업을 시작하였다.”
    최정호, 위의 책, 216쪽

    이 두 글에 공통된 단어가 등장한다. 바로 ‘궁서체’와 ‘해서체’이다. 최정호가 언급하고 있는 ‘궁서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폰트 이름인 궁서체가 아니라 궁중서체 즉 궁체를 말하고, ‘해서체’는 한자나 한글 서예에서 정자(正字)로 쓰는 양식을 일컫는다. 다시 말하면 명조와 궁서, 이 서로 다르게 생긴 두 서체가 모두 궁체 정자에서 출발한 서체라는 것이다.

    붓글씨 고유의 느낌을 최대한으로 표현하면서 활자화한 것이 궁서이고, 붓글씨의 느낌을 덜어내면서 한자 명조체의 특징을 더하여 활자화한 것이 명조인 것이다. 이는 최정호가 사용한 용어로도 드러난다. 명조는 ‘(붓의 스트로크와 붓이 지니는 특성을) 참작하여’ 만들었다고 했고, 궁서는 ‘(궁서체의 해서체를) 본으로 삼아’ 만들었다고 했다. 디자이너가 그 서체에 붓글씨의 느낌을 어느 정도로 적용할 것인지 그 의도에 따라서 결과물이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명조를 보면 궁서에 비해 붓글씨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균정하게 정리된 글자이다. 그렇지만 세세히 들여다보면 붓의 필법을 발견할 수 있다. 명조라고 하면 바로 떠올릴 수 있는 ‘부리’와 ‘맺음’에도 붓의 필법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지난 글들에서 알아보았다. 그 외에도 자음 ㅅ과 ㅈ에서 볼 수 있는 삐침내림(내리점), ㅊ과 ㅎ의 꼭지 등등 여러 요소들이 명조가 붓글씨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붓글씨의 흔적은 비단 명조의 요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자음의 형태에서도 붓의 느낌을 찾아볼 수 있다. 자음 ㅇ(이응)이 바로 그것인데, 보통 이응이라 하면 단순히 동그라미 하나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어떤 특징을 넣을 수가 있단 말인가?

    고딕과 명조의 이응 형태 차이
    출처: 네이버 나눔글꼴 미리 보기 페이지 캡처

    이응의 상투: 기원과 추측

    명조의 이응을 살펴보면 좀 독특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고딕의 이응은 획의 굵기 차이가 크지 않은 동그라미 형태라 한다면, 명조의 이응은 획의 굵기 차이도 크고 꼭대기에 무언가가 달려있다. 이것은 ‘상투’라 하는 것인데, 우리가 아는 상투라 함은 사극에서나 보았던 기혼 남성들의 머리를 틀어올리던 형태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 이응의 꼭대기에 튀어나온 줄기도 그 형태가 마치 상투처럼 생겼다고 해서 ‘상투’라고 불리운다.

    이 상투는 어디에서 왔을까? 최정호의 글에서 이 상투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에게 이것의 존재가 너무 당연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에게 있어서 특별한 디자인이 아니었기에 언급을 할 생각을 못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상투가 그가 명조를 만들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라는 말이 되는데, 그가 참고했다는 궁체 정자에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궁체 정자 필법을 살펴보면 이응은 오히려 고딕의 이응에 가까워 보이는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최정호는 과연 무엇을 보고 상투가 있는 이응을 그렸던 것일까? 그가 활자를 만들었던 원도활자 시대(1950~1988)에서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새활자 시대(1880~1949)가 나오는데 그때 주로 사용되었던 활자인 최지혁체, 한성체, 박경서체 등 두루두루 상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인즉슨 그 전 시대에서부터 상투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언제부터 상투가 출현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좌] 궁체 정자 / 『꽃뜰 이미경 쓴 한글서예』, 이미경 지음, 학원사, 1982, 35쪽 이미지에서 발췌
    [중] 궁체 흘림 / 위의 책 69쪽 이미지에서 발췌
    [우] 『셩경직해』(1897)의 최지혁체 / 박지훈, 「새활자 시대 초기의 한글 활자에 대한 연구」, 『글짜씨 737-992』,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2011, 729쪽 이미지에서 발췌

    상투가 생기게 된 시기는 찾기 어려우나, 어떻게 해서 상투가 생겨났을지는 추측해볼 수 있다. 명조와 궁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니 다시 궁체의 필법으로 돌아가보자. 먼저 정자에서는 이응을 쓰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한 획으로 붓끝을 돌려가며 원을 그리거나 두 획으로 나누어 반절씩 원을 그려 나간다.

    이 둘 중 어떤 방법으로 쓰더라도 획의 시작과 끝맺음은 감추어지기 때문에, 굵기가 별로 차이 나지 않는 단순한 원 형태로 그려진다. 이에 비해 궁체 흘림에서 이응을 보면 정자와 확연히 다르다. 두 획으로 나누어 그리는 방법이 동일하다 하여도, 흘림에서는 획의 시작부분에서 붓끝을 감추지 않고 노봉(露鋒)으로 들어간다. 획의 마무리는 감춰져 있지만 획의 시작은 오롯이 드러나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응의 둥근줄기 시작점을 알려주는 역할과 함께 하단에 쏠리는 무게감을 상쇄시켜준다.

    아무런 요철이 없는 동그란 이응은 붓으로 쓰기 어려운 형태이기에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한다. 그러나 노봉이 드러나도 되는 이응은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쓸 수 있어서 ‘쓰기체’에 더 알맞은 형태라 할 수 있겠다. 글을 쓸 때 격식을 차려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자연스레 노봉이 드러나는 이응의 형태로 쓰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이러한 흐름이 새활자 시대에서 활자화되고 그것이 결국 명조에까지 이르러 ‘상투’가 된 것이 아닐까?

    이 상투는 하나의 양식이 되어 현재 명조 폰트들 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변용되고 있다. 붓에서 시작된 형태이지만 디자이너의 의도에 따라 붓의 느낌을 더할 수도 있고 덜어낼 수도 있고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 자, 그러면 이 상투가 이응 안에서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그 다양함을 함께 찾아가보자.

    [참고] 이 글에 담은 ‘명조 이미지’들은 무료로 배포 중이거나 유료 판매 중인 본문용 명조 폰트를 대상으로 필자가 직접 제작한 것이다. 아래 사이트의 ‘미리 보기’ 기능을 활용해 이미지를 제작하였음을 미리 알린다.
    · 네이버 나눔글꼴
    · 산돌
    · 윤디자인그룹
    · 직지폰트
    · 채희준
    · AG타이포그라피연구소
    · 310 안삼열


    이응의 상투: 변화와 원칙

    다양한 이응의 형태

    이들이 모두 명조(글자 ‘이’)에 들어있는 이응이다. 같은 명조임에도 각자 디자이너, 디자인의 콘셉트 등에 따라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을 붓의 필법이 드러나는 정도를 기준 삼아 분류한 것이 위의 표다.(실제로 이보다 더 많은 명조―이응―가 있었으나 형태와 성격이 비슷한 것들은 제외시켰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응에 있어서 상투의 원래 역할은 둥근줄기가 시작하는 지점을 나타낸다. 붓의 필법으로 따지자면 상투로부터 이응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본래의 형태를 가장 잘 살린 것이 바로 SM세명조와 SM신명조이다. 이들은 붓의 필법대로 상투와 둥근줄기가 연결되어 있으며 상투와 맞닿는 획의 두께가 가느다랗게 표현되어 있다. 붓으로 이응을 한 번에 그린 것과 같이 획의 굵기 변화도 표현되어 있어서, 다른 형태에 비해 붓의 느낌이 강해 전통적, 고전적인 느낌이 든다.

    이 둘 외에 나머지 이응들을 보면 이응과 상투가 연결되어 있지 않고 상투는 상투대로, 둥근줄기는 둥근줄기대로 각각 존재한다. 둥근줄기의 형태는 앞서 본 두 서체와는 다르게 제도된 느낌의 원형으로, 각각 굵기와 크기가 다를 뿐 형태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들을 다양한 형태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상투 때문이다. 상투가 이응의 특징을 좌우하는데, 상투의 형태는 글자 디자인 콘셉트에 따라 달라진다. 콘셉트가 고전적이라면 좀더 붓글씨의 느낌을 담아내고, 현대적이라면 좀 더 직선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실제 상투의 형태를 살펴보자. AG 최정호체와 초설은 상투를 노봉에서 오는 각도처럼 사선으로 표현해주었는데 이는 좀더 붓의 흔적을 담고 있어 고전적인 느낌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초설은 거기서 좀더 나아가 상투를 직선적인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느낌을 풍긴다.

    윤명조 700과 나눔명조의 경우는 상투의 각도를 수평에 가까운 사선으로 표현하여 붓의 느낌보다는 디지털화된 느낌을 약간 더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나눔명조 또한 형태를 직선적으로 만듦으로써 현대적인 느낌을 더 나타냈다.

    윤명조 100과 윤명조 400의 경우에는 둘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상투로 표현함으로써 붓의 느낌을 삭제하고 디지털에 가까운 형태로 만들었다. 다만 100에선 그를 곡선적인 형태로, 400에선 직선적인 형태로 표현한 차이가 있다.

    정인자의 경우는 기존 상투의 형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흡사 열쇠구멍과 같은 형태처럼 표현했는데, 이는 이 서체의 디자인 콘셉트가 ‘9pt 내외의 작은 글자에 최적화한 본문용 글꼴’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글자가 작아지면, 아무리 유려한 형태를 만들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작게 보았을 때도 상투처럼 보일 수 있도록 이와 같은 디자인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루부리의 경우에는 아예 상투를 삭제해버렸는데, 이 또한 디자인 콘셉트가 ‘밝은 인상의 화면용 본문 글꼴’이기 때문에 상투를 없애고 대신 이응의 속공간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이응과 상투에 대해 알아보았다. 붓글씨에서 유래된 상투는 때로는 자신의 태생을 온전히 드러내어 이응, 더 나아가 서체 전부를 고전적으로 보이게도 하고, 때로는 태생을 감추고 이응과 서체 전부를 현대적으로 보이게도 하고, 또 때로는 디자인 콘셉트에 따라 자신의 존재 자체를 없앰으로써 이응을 이응으로만 돋보이게도 한다.

    그저 세로획의 노봉이었던 형태가 시간이 흐르고 흘러 부리가 된 것처럼 이응의 작은 노봉이었던 형태가 상투가 되었다. 이렇듯 명조에는 붓의 흔적들이 오롯이 남아 있다. 그 오래전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썼는지 아니면 어쩌다가 그렇게 쓰게 됐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냈고 그것이 지금의 명조를 만든 것이다. 붓이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졌지만, 여전히 붓은 명조 안에 내재되어 있다.

    폰트 디자이너. 호호타입(HOHOHtype) 대표. 2005년 렉시테크에서 폰트 디자이너로 입문해 우리폰트 시리즈, 렉시굴림, 렉시새봄 등을 만들었다. 2013년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타이포그래피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방일영문화재단이 주최한 제4회 ‘한글글꼴 창작 지원사업’ 수혜자로 선정돼 새봄체를 제작·발표했다. 이후 ㈜윤디자인그룹에서 바른바탕체 한자, 윤굴림 700 등을 제작했으며, 현재 새봄체의 두 번째 시리즈를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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