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인의 「꽃들아 안녕」이라는 귀여운 시가 있다. 꽃들에게 인사할 때 전체 꽃들에게 한꺼번에 인사해서는 안 된단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인사하라고, 그렇게 인사함이 백 번 옳다고 이 시는 이야기한다.
우리는 흔히 ‘꽃’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꽃들을 통칭한다. 그럴 때면 저 풀밭 구석에 피어 있는 작은 풀꽃도, 내 방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프리지어도 모두 ‘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름모를 풀꽃도, 프리지어도 각자 다 다른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이 다름은 ‘꽃’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하나에게 눈 마주치며 인사하며 그들의 존재를, 그들의 다른 아름다움을 인지하라는 뜻으로 이 시를 쓴 것이 아닐까?
명조도 그러하다. ‘명조’라는 이름으로 통칭하지만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가진 개별적 존재이다. 다만 잘 알지 못해서, 자세히 보지 않아서 잘 모를 뿐이다. ‘명조’라는 큰 이름 속에 각각이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명조 계열의 폰트들, 이제는 그들을 자세히 볼 차례이다.
가로줄기를 보면 명조의 다름이 보인다
명조의 다름을 찾는 또 하나의 방법, 이번에는 ‘가로줄기’이다. 가로줄기에 어떤 특성이 있길래 이것으로 명조들을 구분할 수 있을까? 어느 글자를 만들든지 제일 먼저 정립하는 것이 세로획(기둥)과 가로획(줄기)이다. 이들의 형태와 굵기 등을 기준으로 하여 나머지 글자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명조는 대체로 세로기둥이 굵고 가로줄기가 가늘다. 그리고 두 획 모두 부리와 맺음을 갖고 있지만 각각 형태가 다르다.
부리의 경우, 두획 모두 기필 시 ‘노봉(露鋒, 붓끝이 필획 밖으로 노출됨)’으로 들어가기에 필법은 동일하나 획의 진행 방향이 다르므로 그 형태가 다르다. 반면 맺음의 경우에는 운필법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형태가 확연히 구분된다. 세로획에서는 맺음 또한 평출(平出), 즉 노봉이라 획 바깥으로 붓끝이 노출되는 반면에, 가로획에서는 역출(逆出), 즉 장봉이기에 붓끝을 감추며 마무리된다. 이러한 필법의 차이가 곧 형태의 차이이며, 이것은 지금의 명조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명조의 세로기둥과 가로줄기의 형태를 살펴보면 같은 ‘부리’와 ‘맺음’이더라도 획에 따라 그 형태와 역할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세로기둥의 부리와 맺음은 획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할에 충실하여 획의 중간 부분인 기둥의 굵기를 침범하지 않고 깔끔하게 드러내준다. 혹여나 부리가 무거워보일 수 있는 것을 감안하여 맺음을 가늘게 마무리함으로써 세로획의 힘을 살며시 뺀다. 그래서 세로기둥 아래에 받침이 오거나 세로기둥 뒤 다음 글자가 오더라도 부담스럽지 않게 만들어준다.
한편 가로줄기에서 부리와 맺음은 획의 시종을 알리기도 하지만, 좀더 살펴보면 줄기의 가는 굵기를 양쪽에서 균형감 있게 보완해주는 역할에 더 충실하다. 명조의 특성상 세로기둥에 비해 가로줄기가 가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보완해주기 위해 부리와 맺음의 영역을 확장시켜 가느다란 가로줄기에 살을 덧붙인다.
그렇기 때문에 가로줄기는 부리와 맺음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다양해진다. 부리와 맺음을 각각 어떤 형태로 할 것인지, 굵기를 어느 정도로 하여 줄기의 가운데 굵기와 얼마만큼의 대비를 가질 것인지, 영역(길이)을 어디까지 확장시킬 것인지, 크기감 비율을 어떻게 잡아서 획이 전체적으로 수평으로 보이게 할 것인지 아니면 사선으로 보이게 할 것인지 등등 디자인을 변화시킬 선택지가 많다. 말로만 들어서는 가늠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실제로 명조의 가로줄기가 얼마나 다양하게 있는지 살펴보자.
[참고] 아래 본문의 ‘명조 이미지’들은 유료 판매 중이거나 무료 배포 중인 본문용 명조 폰트를 대상으로 필자가 직접 제작한 것이다. 아래 사이트의 ‘미리 보기’ 기능을 활용해 이미지를 제작하였음을 밝힌다.
· 눈누
· 류양희 폰트(구글 미리 보기 사이트)
· 윤디자인그룹
· 직지폰트
· 채희준
· 타이포디자인연구소
· 타입세트컴퍼니
· 폰트릭스
· 한글씨
· AG타이포그라피연구소
명조들의 가로줄기 탐구
현재 판매되거나 무료 배포된 명조 계열의 폰트들 몇몇을 모아본 것이다. 자, 어떠한가?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은가? 최정호의 원도로 만들어진 SM세명조는 기본적인(혹은 고전적인) 명조 형태로, 붓의 느낌을 균정하게 만든 부리와 맺음을 갖고 있다. 이를 ‘기본형’으로 상정하고 보면 나머지 가로줄기의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부리와 맺음의 ‘형태’를 집중해서 보면 유독 특이한 모양이 눈에 띌 것이다. 신세계, 을유1945, TSC곧은명조가 바로 그것인데, 부리는 기본형과 어느정도 유사하지만 맺음의 형태는 꺾임의 정도가 강하게 나타나 있어 마치 삼각형같이 생겼다. 이러한 형태는 한자 명조체의 ‘비늘’과 유사한데, 이는 붓글씨가 활자화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다음으로 바른바탕, 본명조, 마루 부리, 310 정인자의 부리와 맺음 형태를 살펴보면 기본형에서 약간 변형된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리와 맺음은 붓에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그 모양이 곡선적일 수밖에 없는데, 바른바탕은 부리와 맺음에 뾰족한 점을 만들어 형태를 차별화했다. 본명조와 마루 부리, 310 정인자는 부리와 맺음에 직선적인 면을 가미하여 더 두툼하고 단단한 부리와 맺음을 만들어냈다.
이제는 가로줄기의 각도를 살펴보자. 명조의 가로줄기는 기본적으로 수평보다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 있다. 이것은 손으로 가로선을 그을 때 자연스럽게 우상향의 사선으로 되는 현상을 접목시킨 것으로 보인다. HG인문명조의 경우 획의 각도를 처음부터 사선이 되도록 만든 것이지만, 신세계의 경우에는 획이 수평인데도 오른쪽 맺음부분이 부리보다 큰데다가 높이가 위쪽으로 올라가 있기 때문에 사선처럼 느껴진다.
이번에는 부리와 맺음의 길이를 살펴보자. 기본형에서는 그 길이가 전체 길이의 약 1/5(혹은 1/6)를 차지할 정도로 길다. 그런데 이 길이에 변화를 주어 새로운 느낌의 가로줄기를 만들 수 있다. 바로 고운바탕, 산돌정체, 노말바탕, 아리따 부리, 나눔명조가 그와 같은 경우인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부리와 맺음의 형태가 단순화되었고 그 크기 또한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아리따 부리의 맺음이나 나눔명조 같은 경우는 아예 사선으로 잘린 단면처럼 표현했는데, 여기에 약간의 굵기 변화를 두어 고딕과 구별되게 하였다. 이와 같은 형태는 주로 가로줄기가 굵은 글자에게서 많이 발견된다. 기본형이 가로줄기가 가늘어서 부리와 맺음의 굵기에 대비되게 보이기 때문에 유려하고 갸날퍼보이기까지 하는 데에 비해, 획의 느낌이 심지가 곧아 보이고 단단하고 야무지게 느껴진다.
명조 가로줄기 탐구,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이렇게 가로줄기 하나만으로도 ‘명조의 다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명조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은가?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살펴봤던 명조들은 특색 있는 형태였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이것만으로는 ‘명잘알’로 불리기엔 조금 아쉽다.
그래서 또 한 편을 더 준비했다. 이 책 저책 어디서든지 보이던 그 명조, 일명 최정호 명조 계열의 폰트들. 그들은 같은 계열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도 각자의 다름이 있을 터. 그래서 가로줄기만으로 그들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다음 시간에 알려드리고자 한다.
폰트 디자이너. 호호타입(HOHOHtype) 대표. 2005년 렉시테크에서 폰트 디자이너로 입문해 우리폰트 시리즈, 렉시굴림, 렉시새봄 등을 만들었다. 2013년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타이포그래피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방일영문화재단이 주최한 제4회 ‘한글글꼴 창작 지원사업’ 수혜자로 선정돼 새봄체를 제작·발표했다. 이후 ㈜윤디자인그룹에서 바른바탕체 한자, 윤굴림 700 등을 제작했으며, 현재 새봄체의 두 번째 시리즈를 작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