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움, 이것은 고딕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고딕이라는 이름은 “로마자 알파벳의 글자체 이름에서 유래되어 일본에 전해진 것이 그대로 우리에게 도입된 것”이기 때문에 1991년 문화체육부 주관 하에 우리말 용어 ‘돋움’으로 순화되었다. 당시 고딕의 용도가 광고 제목, 책 표제, 본문 제목 등이었기 때문에 ‘돋우다·도드라지다·돋보이다’라는 의미로 돋움이라는 이름이 지정된 것 같다. 때로는 이름이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하는데, 돋움 또한 자기 역할을 이름으로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고딕은 어떻게 돋보이고 있을까?
돋보이기 위해서는 보통 화려한 장식을 달거나 기교를 부리면 된다. 그런데 고딕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돋보인다. (다른 종류의 서체들보다는) 장식이 최대한 배제되어 있고 형태가 심플하다. 그저 단순한 획으로, 글자 원형에 가깝게 자신을 나타낸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아니라 글자의 원래 모습이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딕의 심플함은 자음보다 모음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고딕의 자음은 아무리 덜 꾸미고 최대한 단순하게 한다 하여도 원형 자체에 특색이 있기 때문에 모음보다는 덜 심플해 보인다. 그리고 그 원형을 획의 운용 방식이나 형태적 변주를 통하여 여러 가지 느낌을 낼 수 있다.
그런데 고딕의 모음은 그렇지 않다. 원형 자체가 워낙 심플하기 때문에 특색을 줄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 모음 ㅣ는 그냥 세로로 기다란 직사각형이고 모음 ㅡ는 가로로 긴 직사각형이다. 거기서 곁줄기가 붙느냐, 이음보가 붙느냐, 짧은기둥이 붙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극강의 심플한 모음을 가지고도 변주가 가능하다. 다만 변주의 폭이 그리 넓지는 않으며, 자음의 변주와도 성격이 좀 다르다. 지난 4화 「고딕에 특징 부여하기 ① 자음」 편에서 살펴봤듯이 자음이 주로 개별적·독자적으로 형태를 바꿀 수 있었다면, 모음은 개별적인 것보다 자음과 함께함으로써 형태가 변하는 경우를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이번 「고딕에 특징 부여하기 ② 모음」 편에서는 모든 모음을 다 살펴보기보다는, 주로 자음과 함께할 때 변하는 모음들 위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려고 한다.
[참고] 이 글에 담은 ‘고딕 이미지’들은 유료 판매 중인 본문용 고딕 폰트를 대상으로 필자가 직접 제작한 것이다. 아래 폰트 판매 사이트의 ‘미리 보기’ 기능을 활용해 이미지를 제작하였음을 미리 알린다.
· 산돌
· Tlab
· 윤디자인그룹
· 채희준
· 타이포디자인연구소
· 폰트릭스
· 한글씨
· AG타이포그라피연구소
· 눈누(무료 폰트 사이트)
ㅏ의 형태: 바깥 곁줄기라는 존재
ㅏ는 세로 형태 기둥에 곁줄기가 바깥으로 붙어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곁줄기에 있다. ㅏ의 곁줄기는 초성과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영역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자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우선 곁줄기의 위치는 초성의 영역(초성의 중심)과 관련 있으며, 초성의 영역은 글자의 무게중심과 관련이 있다. 즉 글자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초성과 곁줄기의 위치가 정해지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곁줄기는 초성의 중심에서 위나 아래에 위치한다. 왼쪽 ‘마’(산돌고딕)를 보면 곁줄기가 ㅁ의 중심보다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오른쪽(타이포 씨고딕)에서는 ㅁ의 중심보다 위에 위치해 있다. 이를 보아 왼쪽은 무게중심이 글자의 가운데나 약간 아래에 위치하고, 오른쪽은 무게중심이 글자의 위쪽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곁줄기의 위치는 보통 글자 ‘마’에서의 곁줄기가 기본 위치가 되는데, 초성이 달라지면서 초성의 크기와 높이 또한 각각 달라지기 때문에 곁줄기의 위치도 함께 달라질 수 있다. 이 곁줄기는 작아서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곁줄기가 초성과 알맞은 위치에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사람들이 글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읽을 수도 있고 눈에 거슬려 하며 읽을 수도 있게 된다. 그만큼 시각흐름선에 영향을 많이 주는 요소라 할 수 있다.
ㅐ의 형태: 겹기둥과 걸침
ㅐ(ㅒ, ㅔ, ㅖ)에는 기둥이 두 개가 있어서 겹기둥이라 하는데, 고딕이라 하면 같은 높이의 기둥이 두 개 있을 거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높이로 했을 때 앞기둥이 좀더 길어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앞기둥은 뒷기둥보다 위아래로 조금씩 짧게 만든다.
위 예시에서 왼쪽 ‘얘’(Tlab돋움)는 앞기둥과 뒷기둥의 높이 차이가 크지 않은 편이고, 가운데 ‘얘’(Rix신고딕)는 윗부분은 높이 차이가 크지 않은 반면 아랫부분은 크게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른쪽 ‘얘’(HG인문고딕)로 가면서 앞기둥과 뒷기둥의 차이가 크게 나 보이는데, 이러한 형태는 명조에서 보이는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ㅐ(ㅒ)에는 겹기둥 이외에 걸침이 있는데, 이 걸침은 앞서 ㅏ의 곁줄기처럼 시각흐름선을 만든다. 따라서 초성의 중심과 유사한 위치에 놓여야 하고, ㅒ에서처럼 쌍걸침이 있을 경우 둘 사이가 너무 벌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쌍걸침 사이의 흰 공간 때문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여서 시선의 이동이 자연스럽지 않게 된다.
ㅓ, ㅗ의 형태: 초성과의 만남 1
세로 형태 기둥 안쪽에 곁줄기가 붙으면 ㅓ(ㅕ)가 되고, 가로 형태 보 위에 짧은기둥이 붙으면 ㅗ(ㅛ)가 된다. 기둥 안쪽 곁줄기와 보 위 짧은기둥은 서로 이름도 다르고 명조에서는 형태도 다르지만, 고딕에서는 둘이 비슷하게 짧은 획처럼 생겼다. 초성과 직접적으로 만나는 요소이므로, 초성이 달라짐에 따라 길이나 위치가 변하는 등 다양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들 중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알아보자.
초성 ㅁ과 만났을 때의 모습이다. 곁줄기와 짧은기둥이 초성과 닿는 것도 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있다. 첫 번째 ‘머며모묘’(윤고딕 700)는 모두 떨어져 있고, 두 번째(산돌고딕)는 곁줄기는 떨어져 있는데 짧은기둥은 붙어 있다. 이와 반대로 세 번째(Tlab돋움)는 곁줄기가 붙어 있고 짧은기둥이 떨어져 있으며, 네 번째(Rix신고딕)는 모두 붙어 있다.
이는 아래 예시에서 확인할 수 있듯 글자를 만들 때 디자이너가 정한 ‘규칙’ 같은 것이다. 만약 ㅁ에서 떼었으면 ㅁ과 같은 성질의 초성(예: ㅇ, ㅂ, ㅃ 등 모음에서 가까운 부분이 닫혀 있는 형태)에서도 떼는 것이 일반적이다.(반대로 붙어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ㅔ의 형태: 안 곁줄기라는 존재
ㅔ(ㅖ)에도 ㅓ(ㅕ)와 같이 안 곁줄기가 초성과 만나는데, 곁기둥으로 인하여 곁줄기의 영역이 넓지 않다. 작은 공간 안에서도 곁줄기의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초성과의 조율을 통해 자리를 잡아야 하기도 한다.
글자 ‘테’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이때 ㅌ은 ㅐ와 만날 때보다 안 곁줄기의 공간을 더 확보해주기 위해 가운데 가로줄기가 짧아진다. 그리고 안 곁줄기는 그 공간을 이용하여 자리를 잡는데, 이때 글자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곁줄기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
위 예시 중 첫 번째 ‘테’(산돌고딕)를 보면 ㅌ의 가운데 가로줄기보다 안 곁줄기가 밑으로 내려와 서로 어긋나게 되어 있고, 두 번째(탈)는 가운데 가로줄기와 안 곁줄기가 비교적 동일선상에 있으며, 세 번째(윤고딕 100)는 가운데 가로줄기보다 안 곁줄기가 더 위로 올라와 있다.
ㅡ의 형태: 초성과의 만남 2
ㅡ는 가로 형태의 보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고딕에서는 그저 가로로 긴 직사각형이다. 대체 여기서 어떤 차별점이 생길 수 있을까? ㅡ를 모음으로 하는 글자들은 자음과 모음이 세로로 모인다 하여 세로모임꼴 글자라 하는데, 초성과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다 하여도 초성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글자 ‘므’의 ㅡ를 기준으로 했을 때의 모습이다. 위 ‘그므르흐’(산돌 그레타산스)의 경우에는 (실제 원도가 아니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으나, 아래(윤고딕 100)의 경우에는 육안으로도 확연히 차이가 나 보일 정도로 ‘므’보다 ‘흐’의 모음이 아래로 내려가 있다.
이는 초성의 획수(특히 가로획)가 많아질수록 속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위아래로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때 모음을 가만히 두고 초성만 위로 커지든지(산돌 그레타산스), 아니면 모음과 초성이 함께 움직이면서 커지든지(윤고딕 100)에 따른 차이라 볼 수 있다.
ㅠ, ㅟ의 형태: 짧은기둥의 형태
ㅠ와 ㅟ(ㅝ)의 공통점은 짧은기둥이 있다는 것인데, 이 모음들에서의 짧은기둥은 초성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구별점을 부여할 수 있다.
보통 고딕에서 ㅠ의 짧은기둥은 수직으로 내려오는 형태(왼쪽, 산돌고딕Neo)이나, 글자에 필력을 가미하고자 하거나 부드러운 느낌을 더하고 싶을 때는 왼쪽의 짧은기둥에 곡선을 넣기도 한다(오른쪽, 아리따돋움). 만약 ㅠ의 짧은기둥에 곡선을 넣었다면 ㅟ의 짧은기둥에도 함께 넣어줌으로써 통일감을 줄 수 있다. 가운데(HG인문고딕)처럼 ㅠ의 짧은기둥이 직선이더라도 ㅟ에서는 곡선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ㅘ의 형태: 이음보와 기둥의 만남
ㅘ(ㅚ, ㅢ, ㅟ)는 이음보와 기둥, 짧은기둥으로 이루어진 혼합모음(복모음)으로, 이 또한 이음보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초성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구별점을 부여할 수 있다.
지난 3화 「고딕 탐구: 이음보의 단면」에서 이음보의 단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음보가 기둥과 붙지 않는 형태(탈)를 다룬 바 있다. 그런데 여기 또 다른 형태의 이음보가 있다. 바로 기둥과 붙는 이음보의 형태(HG인문고딕)다. 디자이너의 미감에 따라 이음보를 기둥에 붙일 수 있는데, 이때 이음보와 기둥이 직각으로 만나게 되면 뭉쳐 보이는 현상 때문에 이음보 끝부분이 밑으로 내려가 보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음보를 위로 올리면서 기둥에 붙이는 것이다.
ㅝ의 형태: 종성과의 만남
ㅝ는 이음보와 기둥, 짧은기둥, 안 곁줄기를 모두 갖고 있는 혼합모음으로, 공간 분배에 어려움이 있는 모음 중 하나다. 이 모음에서는 초성·중성·종성 모두가 각자의 공간을 양보하며 모두가 조화롭도록 공간을 쪼개 써야 한다. 이때 디자이너의 미감에 따라 초중종성의 공간 분배 방법이 달라진다.
글자 ‘원’을 보면 종성 ㄴ 때문에 짧은기둥의 위치가 변하게 된다. 자칫하면 ㄴ의 왼쪽 기둥과 짧은기둥이 부딪힐 수 있고, ㄴ의 열린 속공간을 그대로 둔다면 다른 종성들에 비해 흰 공간이 눈에 띄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짧은기둥과 기둥의 위치 선정이 중요하다.
왼쪽 ‘원’(산돌고딕)을 보면 짧은기둥이 ㄴ의 왼쪽 기둥과 부딪히지 않게 안으로 들어와 있고, 기둥 또한 비교적 길게 내려와 있다(회색 동그라미 참고). 가운데(탈)도 짧은기둥이 ㄴ의 왼쪽 기둥과 부딪히지 않는 위치에 있으나 ㄴ의 영역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기둥의 끝은 약간 내려와 ㄴ의 영역 안에 들어가 있다.
오른쪽(타이포 씨고딕)도 짧은기둥이 ㄴ의 왼쪽 기둥과 부딪히지는 않지만 비교적 가까이에 있고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비어 보이는 공간을 곁줄기의 길이를 길게 해줌으로써 보완해주었다. 그리고 기둥의 끝도 약간 내려줌으로써 ㄴ의 속공간이 너무 비어 보이지 않게 하였다.
이로써 몇몇 특징 있는 고딕 모음들을 살펴보았다. 글 서두에서 이야기했듯 모음은 자음에 비해 변신의 폭이 좁다. 그래서 자음처럼 드라마틱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모음은 초성을 만나고 종성을 만나 미미하고 소소하게 변함으로써 자신뿐 아니라 모두를 빛내준다.
1화 「고딕 탐구: 마지널 존」부터 2화 「고딕 탐구: 글자의 돌기」, 3화 「고딕 탐구: 이음보의 단면」, 4화 「고딕에 특징 부여하기 ① 자음」, 그리고 이번 「고딕에 특징 부여하기 ② 모음」까지, 그동안 고딕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딕 5부작인 셈이다.
이 글들로 고딕의 전부를 알려드렸다고 공언할 수는 없다. 다만 아주 조금이라도 여러분이 고딕을 알게 되었다면 좋겠다. 그래서 아주 잠깐이라도 어떤 글자를 보고 “아, 이건 이런 특징이 있구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 너머에, 그 글자를 만들기 위해 여러 번 선을 그었다 지웠다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준다면 좋겠다. 다음 화부터는 ‘명조’ 편을 시작하니 많은 기대 부탁드린다.
폰트 디자이너. 호호타입(HOHOHtype) 대표. 2005년 렉시테크에서 폰트 디자이너로 입문해 우리폰트 시리즈, 렉시굴림, 렉시새봄 등을 만들었다. 2013년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타이포그래피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방일영문화재단이 주최한 제4회 ‘한글글꼴 창작 지원사업’ 수혜자로 선정돼 새봄체를 제작·발표했다. 이후 ㈜윤디자인그룹에서 바른바탕체 한자, 윤굴림 700 등을 제작했으며, 현재 새봄체의 두 번째 시리즈를 작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