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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새봄의 미미와 소소 #3 고딕 탐구: 이음보의 단면

    미미하고 소소해 보이지만 글자 완성도를 좌우하는 요소들 ― 한글 고딕 이음보의 단면


    글. 이새봄

    발행일. 2021년 04월 26일

    이새봄의 미미와 소소 #3 고딕 탐구: 이음보의 단면

    그 유명한 헬베티카(Helvetica)와 에어리얼(Arial) 이야기를 아는가? 디자이너라면 대부분 아는 이 두 서체에 대해서는, 많은 풍문이 떠돈다. 어떤 이들은 진품과 가품으로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한 쪽을 다른 한 쪽의 못난 사촌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렇게 불리는 이유는 이 서체들의 형태를 보면 알게 된다. 뼈대와 굵기가 거의 동일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언뜻 보면 비슷하게 보인다.

    둘을 나란히 놓고 어떤 게 헬베티카이고 어떤 게 에어리얼인지를 구분해야 한다면, 먼저 대문자 G, R, Q를 찾으라. 제일 큰 차이점이 드러나는 글자다. 그런데 만약 그 글자가 없다 그러면 획의 단면을 보라. 주로 대소문자 C, 소문자 e, g, j, r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획의 단면이 수직으로 잘려 있는지 혹은 사선으로 되어 있는지를 보면 두 서체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헬베티카는 수직·수평, 에어리얼은 사선으로 잘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헬베티카와 에어리얼을 구분하게 되는 모먼트다. 이런 특징을 알아놓으면 헬베티카를 구별해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 받을 수 있다.

    [좌] “에어리얼은 헬베티카의 이상하고 못난 사촌” / [우] 헬베티카와 에어리얼의 차이점
    출처 [좌] 「11 Fonts That Designers Love to Hate」, 『boredpanda』 /
    [우] 「Helvetica vs. Arial: Do You Know the Difference?」, 『creative PRO』 ―

    고딕 속 고딕 감별 포인트

    그렇다면 한글 고딕은 어떠할까? 헬베티카와 에어리얼을 구분하듯 단박에 “이건 〇〇회사 고딕이야!”라고 외칠 수 있는 포인트가 존재할까? 물론이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것’이 바로 그 포인트이다. ‘이것’을 알게 되면 현재 한글 폰트 회사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산돌과 윤디자인그룹의 고딕을 구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두 회사는 각기 사명을 딴 본문 고딕 폰트인 ‘산돌고딕’ 시리즈와 ‘윤고딕’ 시리즈를 보유하고 있다. 산돌고딕은 1995년 총 3종의 굵기(L, M, B)로 만들어졌고,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산돌고딕네오 1, 2, 3로 새로 출시되었으며, 2019년까지 유니코드 버전, 컨덴스드 버전 등 시리즈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윤고딕은 1996년 110부터 160까지 총 6단계 굵기로 출시 완료되었고, 이후 200, 300, 500, 700 시리즈로 이어져 오고 있다.

    산돌고딕과 윤고딕 100은 디지털 폰트 시대(1980년대 후반 ~ 현재)에 첫 번째로 나온 1세대 고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고딕은 비슷한 시기에 나왔고, 둘 다 최정호 고딕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둘은 각자 자신의 길을 찾았고 지금까지도 그 길 위에서 오롯이 걸어오고 있다. 그렇기에 비슷한 듯하지만 다르다. 그리고 그 다름 안에는 오늘의 주인공인 ‘이것’이 있다.

    이 두 서체는 ‘이것’이 다르다.
    위: 산돌고딕M / 아래: 윤고딕135
    각 회사의 폰트 미리 보기 메뉴를 활용해 필자가 제작한 이미지
    산돌 미리 보기 / 윤디자인그룹 미리보기

    자, 여기 산돌고딕과 윤고딕 100(이하 윤고딕)을 보라. ‘이것’이 서로 다르다. 힌트를 주자면 앞서 이야기한 헬베티카와 에어리얼과 같은 구분점이다. 바로 획의 단면을 보면 ‘이것’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한글은 라틴 알파벳과 다르게 구조가 복합적이기 때문에 단번에 어떤 것인지 알아채기가 어렵다. 그러나 두 서체를 획의 단면 위주로 자세히 살펴보라. 분명 서로 다른 형태, 즉 수직·수평으로 되어 있거나, 사선으로 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이것’, 즉 이음보의 단면이 각각 사선과 수직으로 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산돌고딕M / 윤고딕130
    각 회사의 폰트 미리 보기 메뉴를 활용해 필자가 제작한 이미지
    산돌 미리 보기 / 윤디자인그룹 미리보기

    바로 이것(위 이미지의 동그라미 친 부분), ‘이음보’의 단면이다. ‘와’의 이음보를 보면 산돌은 사선으로 시작해 사선으로 끝나고, 윤고딕은 수직으로 시작해 수직으로 마무리된다. 이 차이는 이음줄기의 단면(‘다’의 초성 ㄷ 하단 줄기의 동그라미 친 부분)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얼핏 보면 이것을 단순한 디자인적 차별 요소라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여전히 이음보의 단면이 각각 사선과 수직으로 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위: 산돌고딕Neo1의 05 Medium / 아래: 윤고딕760
    각 회사의 폰트 미리 보기 메뉴를 활용해 필자가 제작한 이미지
    산돌 미리 보기 / 윤디자인그룹 미리보기

    1990년대 중반 사이좋게 등장했던 두 서체는 이후 시대 흐름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화되어왔다. 윤고딕 100은 700으로 늘어났고 산돌고딕은 Neo라는 이름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분명 디자이너가 바뀌고 디자인 콘셉트도 바뀌고 실제로 디자인도 바뀌었는데, 이 차이점만큼은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었다. 단순히 디자인적 요소였다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어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일관되게 유지해왔다는 것인데 그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글 고딕에 ‘필력’을 부여하는 방법

    그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서 다시 ‘최정호’, 그리고 그가 만든 ‘고딕’에 대해 다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최정호는 그의 글 「서체 개발의 실제」에서 고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딕체는 붓의 필력, 필체를 응용하여 필력을 극도로 살리며 필체에 의한 세리프를 모두 희생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조체와 필력은 같지만 전혀 다른 뉘앙스가 있다.”

    명조는 실제로 한 획 안에서 시작과 중간, 끝의 굵기가 각각 다르고 선이 둥글며 필체의 흔적인 부리가 명확하게 존재하기에 붓의 필력으로 만들어진 서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딕은 획의 굵기가 같을뿐더러 자소 형태도 네모지기 때문에 붓의 필력이 들어갔다는 것을 생각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이 고딕의 원형을 만든 최정호는 고딕 안에도 붓의 필력이 들어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는 명조를 둥근 붓으로, 고딕을 납작 붓으로 그리며 글자의 형태를 만들어갔던 걸까?

    최정호 민부리 원도 중 ‘뙤’
    이음보가 사선으로 되어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출처: 『최정호 민부리 글꼴보기집』, AG타이포그라피연구소, 안그라픽스, 2019, 16쪽

    실제로 그가 납작 붓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그린 고딕 원도를 살펴보면 돌기가 살아 있고 이음보가 수평적인 선이 아닌 경사진 형태로 되어 있으며, 이음보의 단면이 앞뒤 모두 사선으로 되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붓의 필체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왜일까? 돌기와 필체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미미와 소소 #2 고딕 탐구: 글자의 돌기]에서 이미 언급했으니 부연은 생략하겠다. 남은 것은 이음보의 형태와 필체의 연관성에 대한 추적인데, 여기서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획의 진행 방향과 단면 각도의 관계
    : 수평선, 수직선, 사선

    그가 납작 붓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 한 번 납작 붓 혹은 납작 펜으로 글자를 그리는 것을 상상해보자.(혹은 실제로 글자를 그려보자.) 먼저 수직·수평 구간에서 선을 그으면 시작한 방향 그대로 굵기 변동 없이 하나의 획이 완성될 것이다. 그 획의 단면을 보면 획의 진행 방향과 직각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선일 때는 어떨까? 이 경우도 획이 기울어진 방향과 단면이 직각을 이루기 때문에 자연히 단면이 사선으로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최정호가 그린 고딕 원도에서도 이음보의 단면이 사선으로 된 것이라 생각한다. 고로 이와 같은 사실을 참고했을 때, 필체가 담겨 있다면 자연히 이음보의 단면이 사선의 형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사선 이음보 산돌고딕 / 수직 이음보 윤고딕

    이제 다시 산돌고딕과 윤고딕으로 돌아와서 그들의 이음보를 살펴보자. 산돌고딕은 사선이고 윤고딕은 수직이다. 그렇다면 산돌고딕에서는 최정호 고딕처럼 필체의 흔적이 남아 있는 형태로 제작되었고 윤고딕은 반대로 필체의 흔적을 지운 것이 된다. 정말 그러한지 산돌고딕과 윤고딕의 제작 의도를 살펴보자.

    산돌고딕은 이경배(현 좋은글씨 대표)가 디자인했던 것으로, 당시 제작 의도를 찾기 어려웠지만 글자 형태로 유추해 보았을 때 최정호 고딕의 구조와 형태에 비교적 가깝게 설계되어 있다. 실제로 ‘정주기기’(전신은 ‘한국사진식자개발상사’)라는 국내 사진식자기 제작사에서 최정호의 모리사와 서체를 가지고 제작했던 것을 참조로 산돌의 기준을 적용하여 산돌고딕이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고딕, 즉 최정호 고딕처럼 필력을 살려 글자의 형태를 보다 자연스럽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산돌고딕의 이음보가 사선으로 된 것이고 이것은 산돌고딕에서 산돌고딕Neo로 이어지는 하나의 연결고리인 것이다.

    그에 반해 윤고딕은 윤영기(현 윤디자인그룹의 전신 ‘윤디자인연구소’ 설립자)가 만들었는데, 그는 기존 고딕(최정호의 고딕으로 제한)에서 이음보의 사선 처리가 여백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을 다듬어 최대한 단순화해 획을 수직으로 잘라냈다. 단순미와 통일성, 조형성 등을 우선시하던 그에게 ‘필체의 흔적’이란 삭제되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윤고딕의 이음보가 수직으로 되어 있고, 이 또한 윤고딕 100에서 700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연결점이다.


    어쩌면 이음보의 단면은 보고도 스쳐지나갈 수 있는 한 부분이다. 아니, 작은 크기의 글자에서는 이음보가 어떤지 구별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미미하고 소소한 ‘이것’이 바로 글자 전체의 디자인 의도를 알려주는 시금석이 된다. 필체를 살려 자연스러움을 가미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장식 요소를 제거하여 심플함을 나타내려 했는지를.

    그리고 ‘이것’이 폰트 디자이너들에게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될 수 있다. 당신은 어떤 글자 디자인을 할 것인가? 획을 긋기 전에 이 질문을 먼저 하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겠는가 아니면 심플함을 추구하겠는가?” 이 질문의 답에 맞춰 ‘이것’을 정해라. 그러면 ‘이것’은 자신의 자리에서 당신의 콘셉트를 빛내줄 것이다.

    폰트 디자이너. 호호타입(HOHOHtype) 대표. 2005년 렉시테크에서 폰트 디자이너로 입문해 우리폰트 시리즈, 렉시굴림, 렉시새봄 등을 만들었다. 2013년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타이포그래피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방일영문화재단이 주최한 제4회 ‘한글글꼴 창작 지원사업’ 수혜자로 선정돼 새봄체를 제작·발표했다. 이후 ㈜윤디자인그룹에서 바른바탕체 한자, 윤굴림 700 등을 제작했으며, 현재 새봄체의 두 번째 시리즈를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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