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대 혹은 세대를 구분할 수 있는 지표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이 지난 1화 [미미와 소소 #1 고딕 탐구: 마지널 존]과 이번 이야기의 바탕을 이루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내가 찾았던 첫 번째 답이 ‘마지널 존’이었는데, 실제로 그것은 원도 활자 시대에 고딕류의 서체에선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었으나 현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이 있고 없음으로 고딕의 세대, 즉 고전과 현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이야기는 조금 조심스럽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것’ 또한 원도 활자 시대에는 있으나 지금은 없다. 그렇다면 ‘이것’도 마지널 존처럼 그 시대와 현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그 시대의 서체들을 둘러보면 어떤 서체에는 ‘이것’이 있고 또 다른 서체에는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같은 사람이 만든 서체들 중에서도 어떤 것에는 있고 어떤 것에는 없다. 그래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것’의 있고 없고가 일반적이지는 않다 할지라도 그 시대에만 존재했었다는 점은 사실이므로, 고딕의 세대를 구분할 수 있는 변별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이 과연 참이 될 수 있을지, 여러분과 함께 세 가지 질문을 던져보며 차근차근 검증을 해보려 한다.
첫 번째 질문: 최정호는 왜 고딕에 ‘이것’을 만들었을까?
한글 고딕의 역사는 처음 ‘고짓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때부터 치면 대략 100년 남짓이 될 것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 시간대 안에서 여러 모양으로 바지런히 변해왔다. 지금 우리가 마주치는 고딕의 형태를 띄기까지 주된 공적을 세운 이는 최정호(1916~1988)다. 고딕계의 아버지랄까.(그는 명조계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가 그렸던 고딕의 모습은 어떠할까? 그리고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
최정호가 활동한 시기는 원도 활자 시대(195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였다. 당시 최정호 혼자만이 글자 원도를 그렸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최정호를 이야기하는 까닭은, “1980년대 후반 디지털 폰트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글꼴이 최정호의 사진식자체를 바탕으로 디지털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의 공저자 노은유는 “오늘날 디지털 폰트는 최정호가 그린 원도에서 시작된 것이다”라고까지 평가한다.
한글 디자인의 대표적 이론서인 『한글의 글자 표현』(김진평 지음, 미진사, 2019)과 『한글 디자인 교과서』(안상수·한재준·이용제 지음, 안그라픽스, 2009)를 보면, 두 책 모두 최정호의 고딕 원도를 가지고 고딕체의 구조를 파악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 하나같이 ‘이것’이 있다. 자, ‘이것’이 보이는가? ‘이것’은 바로 ‘돌기’ 혹은 ‘첫돌기’라 불린다. 당신은 이것이 낯선가? 아니면 익숙한가?
돌기의 정의를 살펴보면 ‘줄기의 첫 부분, 맺음 부분, 꺾임 부분 등에 미세하게 튀어나온 부분’, 혹은 ‘부리로 연결되어 글자 줄기의 머리나 맺음에서 꺾이거나 튀어나온 부분’ 또는 ‘첫돌기’ 등 다양하다. 종합해보면 ‘돌기’나 ‘부리’라고 할 수 있는데, 고딕의 정의―글자 줄기 끝에 부리가 없고 그 굵기가 일정한 글자꼴―를 고려한다면, ‘부리’보다는 ‘돌기’라 칭하는 편이 적절하겠다.
돌기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고딕을 만든 최정호의 글을 아무리 살펴도 이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어렵다. 최정호 자신에게 돌기의 존재는 너무나 당연했던 걸까? 그래서 따로 설명할 생각을 못했던 걸까? 실제로 그가 만든 고딕 원도를 보면 대부분 돌기가 있다.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는 총 9종의 고딕 원도를 수합하여 분석했는데, 개발 연도별로 나열하면 동아출판사 민부리체(1957), 모리사와 세고딕(1972), 모리사와 태고딕(1972), 모리사와 중고딕(1973), 모리사와 견출고딕(1973), 샤켄 세고딕(1973), 샤켄 중고딕(1973), 샤켄 태고딕(1973), 샤켄 특태고딕(1973) 순이다. 이중 동아출판사 민부리체와 샤켄 세고딕, 모리사와 세고딕 이외에는 모두 돌기가 있었다.
최정호는 왜 돌기를 만들었을까?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을 바탕으로 추측해보자. 납활자 시대를 지나 사진식자 시대로 접어들었을 때, 한국에선 일본의 사진식자 기계를 수입해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정호는 일본산 사진식자기에 들어갈 한글 원도를 그렸고, 그것이 바로 모리사와 서체와 샤켄 서체다. 국한문 혼용기였던 당시, 한글과 함께 쓰였던 한자는 아마도 일본의 원도였던 것 같다. 그 한자와 어울리는 한글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한자에서 볼 수 있는 돌기를 한글 고딕에도 그대로 적용한 게 아니었을까?
두 번째 질문: 최정호는 왜 고딕에 ‘이것’을 안 만들었을까?
그렇다면 반대로 최정호의 원도 중 돌기가 없는 글자들은 어떤 이유에서 없는 것일까? 우선 동아출판사 민부리체는 최정호가 납활자 원도로 만든 초기 고딕체다.
돌기를 만든 이유에 대해 앞서 필자가 추측한 내용―국한문 혼용기에 한글과 함께 쓰였던 한자는 일본의 원도였을 것이며, 그 한자와 어울리는 한글을 만들기 위해 한자에 흔히 나타나는 돌기가 한글 고딕에도 적용되었을 것―이 맞다면, 이 서체는 시기적으로 사진식자 이전에 제작된 것이므로 굳이 돌기를 만들지 않아도 됐었다.
그러나 만약 그게 아니라 하여도, 즉 사진식자 이전부터 돌기가 존재했던 것이라 하여도 이 서체만큼은 돌기가 없는 편이 더 마땅하다. 납활자는 글자가 쓰일 실제 크기에 맞춰 만들어져야 하므로, 원도를 그릴 때도 이를 감안해야 한다. 이 서체는 사전의 제목용 글자나 짧은 주제문에 사용된 것이다. 즉, 글자의 크기가 작아야 한다. 따라서 글의 가독성을 위하여 돌기를 삭제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동아출판사 민부리체는 최정호의 초기 작업물이다. 이에 대해 이용제는 “한글 고딕체에 제작 경험이 적은 당시 상황으로 보면, 글자체의 질서를 세우는 데 있어서 시각적인 규칙보다는 물리적인 규칙을 세우고 따르는 것이 수월했을 것으로 판단한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글자를 만들 때 뼈대(구조)를 만드는 것에 더 중점을 두기 위해 돌기와 같은 (장식) 요소는 배제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샤켄 세고딕과 모리사와 세고딕은 노은유에 의하면 “모두 인쇄 여분띠 효과, 즉 글자 줄기의 굵기 변화가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줄기 끝에 돌기도 눈에 띄지 않는다.” 두 서체 모두 줄기의 굵기가 굉장히 가늘기 때문에 획 굵기의 일관성이 다른 굵기에 비해 더 중요하다. 약간의 굵기 변화도 눈에 훨씬 더 잘 띄어 얼룩덜룩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널 존(인쇄 여분띠)이나 돌기가 글의 회색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여 삭제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마지막 질문: ‘돌기 있는 고딕’과 ‘돌기 없는 고딕’은 왜 중요한가?
자, 지금까지 우리가 알게 된 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보자. ‘한 사람이 고딕을 만들었어도 때와 상황에 따라 돌기는 있기도 없기도 하다.’ 이쯤에서 누구나 이런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원도 활자 시대에 원도를 그린 사람은 최정호 한 사람뿐인가?
그렇지는 않다. 최정호와 함께 한글 활자 디자인 1세대라고 불리는 최정순(1917~2016)이 있다. 그는 교과서 및 신문 본문을 위한 서체를 주로 만들었다. 그의 원도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나마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고딕체 원도에서는 돌기가 보이지 않는다. 즉, 원도 활자 시대의 고딕에서 ‘돌기’라는 존재는, 보편적 요소라 볼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돌기가 디지털 폰트 시대 초기에는 어느 정도 보편적 요소로 다루어졌다. 당시 만들어진 고딕체들 대부분이 최정호 원도를 그 기반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최정호 원도를 기반으로 디지털 폰트화한 ‘SM고딕’류에도 돌기가 있고, 윈도즈95 OS부터 기본 서체로 탑재된 ‘MS돋움’에도 돌기가 있으며, 1994년부터 2012년까지 맥 OS 기본 서체였던 ‘애플고딕’ 또한 그 기반이 최정호의 샤켄 중고딕이었기에 당연히 돌기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산돌고딕’과 ‘윤고딕100’ 시리즈처럼 199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진 고딕류에는 돌기가 없다. 이때의 돌기는 마지널 존과 같이 이전 시대의 산물로 여겨지면서 삭제당한 것이다. 이 흐름은 근래에 만들어진 ‘산돌고딕Neo1, 2, 3’ 시리즈(2011~2012), ‘윤고딕700’ 시리즈(2012), ‘릭스신고딕’(2018)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노은유는 이러한 고딕을 글자 형태(특히 돌기의 유무)에 따라 구분하면서, 최정호의 원도를 바탕으로 돌기가 있는 것을 ‘최정호 민부리(옛민부리) 계열’, 그의 영향에서 조금 벗어나 돌기가 없는 것을 ‘새민부리 계열’이라 구분한다. 이 분류에 의하면 SM고딕류 등의 서체들이 ‘옛민부리 계열’에 속할 것이고, 산돌고딕 등의 서체들이 ‘새민부리 계열’에 속하게 된다.
고딕의 세대를 나누는 변별 요소로서 ‘돌기의 유무’를 제시해도 되지 않을까? 너무 거창한가? 그렇다면 고전적인 디자인과
현대적인 디자인을 나누는 기준 중 하나로 ‘돌기의 유무’를 포함할 수는 있지 않을까? 정말 그렇다면 최정호 고딕처럼 돌기, 마지널 존, 굽이 있어 질감이 있는 디자인을 고전적 디자인, 윤고딕과 같이 돌기, 마지널 존, 굽이 없어 깔끔한 디자인을 현대적 디자인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디지털 활자 시대가 도래한 지도 벌써 30여 년이다. 강산이 세 번 바뀌었을 시간이다. 그동안 고딕의 돌기는 있는 것이 당연했다가, 없는 것도 익숙해진 시대가 되었다. 돌기가 있어도 고딕이고 없어도 고딕이다. 꼭 어때야 한다는 법은 없다. 단지 자신의 미감에 따라 택하는 것이다. 최정호가 돌기를 택하고 버리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미감이라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단순하게 생각하라. 당신은 글자를 통해 어떤 형태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지, 어떤 질감을 만들어내고 싶은지를 생각하라. 그것이 더 중요하다. 그게 정해졌으면 과감하게 선택하라.
결과물로서 ‘돌기 있는 고딕’과 ‘돌기 없는 고딕’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당신이 언제/왜 돌기를 없앨 것이며, 또 언제/왜 돌기를 추가할 것인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돌기의 존재 유무는 당신의 미감을 설명하는 하나의 수단이 될 것이다. 당신은 어떤 미감을 원하는가?
폰트 디자이너. 호호타입(HOHOHtype) 대표. 2005년 렉시테크에서 폰트 디자이너로 입문해 우리폰트 시리즈, 렉시굴림, 렉시새봄 등을 만들었다. 2013년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타이포그래피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방일영문화재단이 주최한 제4회 ‘한글글꼴 창작 지원사업’ 수혜자로 선정돼 새봄체를 제작·발표했다. 이후 ㈜윤디자인그룹에서 바른바탕체 한자, 윤굴림 700 등을 제작했으며, 현재 새봄체의 두 번째 시리즈를 작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