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트를 완전히 다르게 즐기기 위해
읽고 쓰는 도구 너머의 폰트 신세계를 위해
디지털 환경이 아닌 디지털 ‘시대’의 폰트를 위해
레터빌런―Letter Villain이 되기로 작정한
엉뚱상상의 이야기
지난해 레터빌런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에서 주최하는 [너와나의 티키타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우리의 참여 목적은 폰트를 단순히 쓰고 보는 개념이 아닌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놀이 도구로 확장하고, 오감을 자극하는 색다른 폰트를 기획/제작하여 폰트를 통한 새로운 시각 예술 문화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다.
[너와나의 티키타카]는 청년장애예술가의 예술적 역량과 주체성을 강화해 안정적인 예술 현장 진입 기회를 마련하는 사업이다. 청년장애예술가들 간의 끈끈한 네트워크와 라포르(rapport)를 형성하고,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예술 정체성을 함께 찾아가기 위한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축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티키타카(tiqui-taca)’라는 용어를 들어봤을 것이다. 짧은 패스를 주고받는 전술을 가리킬 때 쓰인다. 본래는 탁구공이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형용한 스페인어라고 한다. 이러한 말뜻처럼, [너와나의 티키타카]는 짧은 패스를 여러 번 주고받듯 참가자와 참가자, 참가자와 레터빌런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나아가 폰트에 대한 생각을 확장해보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즉, 청년장애예술가들과 레터빌런이 티키타카를 통해 글자를 만지고 놀면서 폰트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이번 3화에서는 지난해 4주간(2021. 10. 7. ~ 10. 28.)의 [너와나의 티키타카] 프로젝트를 통해 청년장애예술가 4인, 레터빌런, 그리고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함께 완성한 ‘티키타카 폰트’의 제작 과정을 기록해보려 한다.
대학로에 위치한 레터빌런 양성소: ‘이음센터’(aka ‘레터빌런 상상공방’)
레터빌런의 자격 요건은 ‘폰트를 제작하고 싶은 사람’이다. 이 자격 요건만 충족되면 누구나 레터빌런이 될 수 있다. 이제, 청년장애예술가들을 레터빌런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시간이다. 바로 이곳, 서울 대학로 이음센터 3층에 자리한 ‘레터빌런 상상공방’에서 말이다. 레터빌런 상상공방의 커리큘럼은 총 4주 과정이다. 이론과 실습으로 나뉘는데, 우리는 본격적인 실습에 들어가기 전까지 매주 아래와 같은 이론 수업을 진행했다.
이론 #1 · · · 엉뚱상상 소개 및 오리엔테이션(향후 4주간 교육 내용 맛보기)
이론 #2 · · · 청년장애예술가 × 레터빌런이 제작할 라틴 알파벳 폰트에 대한 교육
이론 #3 · · · 라틴 알파벳 94자에 포함되는 특수문자에 대한 교육
이론 #4 · · · 글자를 통한 다음 세대 활용 방법 교육(증강현실 및 애니메이션)
이러한 기본적인 이론 수업과 더불어, 우리 레터빌런은 이른바 ‘점·선·면의 티키타카’라는 실습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점·선·면을 재료로 여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글자를 청년장애예술가들과 만들어보고자 한 것이다. 디자인의 관점에서 글자는 점과 선과 면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따라서 점·선·면은 글자 디자인의 기본 요소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레터빌런다운 발상을 해보기로 했다. 점으로만, 또는 선으로만, 혹은 면으로만 글자를 구성해보자!
점·선·면의 형태는 각자 상상하기 나름이다. ‘점을 그려보세요’라고 했을 때 누군가는 거대한 점을, 다른 누군가는 좁쌀만 한 점을 그릴 수 있다. 이렇게 각자가 떠올리는 점·선·면이 다르므로, 우리는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점으로만/선으로만/면으로만 구성된 글꼴을 제작해보았다. 내재된 상상력의 고삐를 글자로써 풀어보는 실습!
실습 #1 · · · 점을 활용한 글자 아트
실습 #2 · · · 선을 활용한 글자 아트
실습 #3 · · · 면을 활용한 글자 아트
실습 #4 · · · 점·선·면을 활용한 글자 아트
‘세상에 없던 글자’를 어떻게 폰트로 만들 것인가?!
우리는 상상을 펼치기 위한 재료, 즉 점·선·면만 두었을 뿐 라틴 알파벳 대문자/소문자 제작에 필요한 ‘기준’은 두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만약 이러한 ‘기준’을 따랐다면 ‘이미 세상에 있던 글자들’이 한 번 더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기준도 경계도 없이 점·선·면을 자유롭게 가지고 노는 청년장애예술가들의 상상을 통해 ‘세상에 없던 글자들’이 완성되었다. 그들 각자가 바라보고 인식하는 사물의 형태는 천차만별, 재료의 사용법 또한 각양각색! 그 결과, 우리가 알고 있던 라틴 알파벳 서체의 규칙과는 판이한 완전히 새로운 시각 형태의 글자가 탄생했다.
자, 이제는 청년장애예술가들이 창조해낸 ‘세상에 없던 글자들’을 폰트로 만들 차례다. 이 과정은 만만찮았다. 기존의 기준과 경계를 탈피한 글자들인 만큼, 폰트로 담을 때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우리는 이 고민들을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범주화하고, 회의를 통해 차근차근 해결해나갔다.
첫 번째 고민: 폰트가 작품(글자 아트)으로 보여야 한다
청년장애예술가들의 작품, 즉 글자 아트를 폰트로 제작하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폰트 제작 시 작품의 질감 및 색을 원본 그대로 표현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순수한 서체의 영역인 벡터의 속성과 1도 컬러(흑색)로 폰트 제작을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두 번째 고민: 라틴 알파벳 폰트의 사용성을 고려한 조화성
앞서 설명했다시피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글자 아트 작품들은 기준과 경계를 탈피하여 제작된 결과물이다. 즉, baseline, Ascender, x-height 등 라틴 알파벳 서체의 규칙들을 따르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를 폰트로 어떻게 담아낼 것이냐에 관하여 우리의 의견이 나뉘었다.
‘(크기 제한이 없는) 작품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자’
vs.
‘폰트의 기본 역할 수행을 위해 크기와 (대소문자의) 높낮이를 수정하자’
열띤 논의와 티키타카 끝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작품은 작품대로 보여주고, 도록 및 웹사이트에 적용되는 폰트는 폰트의 기본 역할에 맞춰 수정을 하는 방향으로 조율했다. 청년장애예술가들이 만든 글자 아트들은 작품 본연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되, 폰트만큼은 사용성을 고려하여 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잠든 ‘빌런’을 깨우는 내면의 티키타카, 계속되어야 함이 옳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처럼, 4주간의 교육과 실습, 그리고 고뇌의 시간을 거쳐 각양각색 청년장애예술가 4인방과 레터빌런, 그리고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함께한 ‘티키타카 폰트’가 완성되었다. 프로젝트 목표는 달성되었고, 계획된 시간들은 모두 지나갔다.
하지만, 티키타카는 계속되어야 함이 옳다. 꼭 우리 레터빌런과 티키타카를 해야만 상상력의 고삐가 풀리는 것은 아닐 터.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말처럼, 크리에이터 각자가 내면의 티키타카를 통해 스스로의 한계를 타파해나가보면 어떨까.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든 ‘빌런’이 깨어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