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들은 흔히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여 조형의 의미를 찾으려 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3자 대면의 철학을 잘 파악해 내지 못한다. 즉 보이는 것이 3원적, 3개이면 이해하지만, 철학이 3원적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디자인을 잠시 뒤로 하고 개념으로서의 3원적 디자인을 말해보자. 그런 다음, 눈에 보이는 디자인으로 돌아오면 이제 철학이 들어간 디자인이 무엇인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4번째는 선택하지도 않고 기억하기도 어렵다. 존재가치 없는 군대 병장, 캠퍼스를 떠난 4학년, 밥줄 때만 있는 줄 아는 넷째 딸처럼 그냥 당연히 말이다. 반에서 4등을 했거나 5등을 했거나 매 한가지다. 사생대회에서도 3등까지만 상을 주지 4등부터는 그냥 입선이다. 입시 삼수생은 봐주어도 사수생부터는 선생도 포기한다. 4만 그런가? 그 절반인 2도 그렇다. 여행을 가야 친해진다는데, 둘이 여행가서 특별히 친해졌다는 증거는 없다. 싸우고 돌아오거나 “이 자식 이런 놈일 줄 몰랐다.”면서 평소 감정의 골만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들은 1:1 둘만의 평화관계를 못 견딘다. 둘이 있으면 금방 종속관계로 변한다. 남북회담에 미국이 끼지 않으면 불안하다. 미국이 참견하지 않은 남북회담은 항상 싸움박질로 끝난다. 일본이 독도 문제를 일으키니 중국의 평가를 인용하고, 유럽과 FTA를 하는데 IMF의 평가에 귀를 쫑긋한다. 국가 간 1:1 교역 프로그램인 FTA를 미국에 100% 종속시켜 진행한 한국 정부다. 1:1 한국 외교는 겁나는 일이다. 한국이 1:1로 체결한 FTA(아세안, 노르웨이-스위스, 칠레), 한-EU FTA 모두 무역적자다. 둘은 못 견디고, 넷은 떨거지다.
이것이 한국 민족이나 국가 제도만의 특성이 아니다. 개인도 그렇다. 결혼 초기부터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거나 “지는 게 이기는 것”이란다. 이런 표현은 한국 빼고는 없다. 왜 사랑하는 두 남녀가 기 싸움을 하나? 3자가 없으면 불안해서 그렇다. 일단 종속시키거나 종속당하고 싶어서 그렇다. 어서 아이를 낳거나, 누군가 3자를 만나야 속이 편하다. 스칸디나비아나 일본 정도를 빼면, 한국 젊은이들만큼 첫 데이트가 서투른 이들도 드물다. 평생 파트너가 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 소개를 받는다. 나이트클럽에 가서도 이성 하나 유혹하지 못해 부킹을 받는다. 벤치에 둘이 앉아서 대화하기보다는 영화를 보거나 놀이동산에 간다. 둘만의 마음을 나누는 산책과 대화를 잘 못한다. 애인의 인물됨을 자기 동생에게 물어보는 바보스러움을 넘어, 애인의 친구에게 물어보는 무례함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3자가 앉아 있으면 쉽게 설득 당한다. 부부 갈등을 둘이서 해결 못한다. 이혼 법정에서 따지고 드는 말이 대다수 아이들에 관한 것이다. 장인장모를 찾아가거나 시어머니에게 욕을 퍼붓는다. 제3의 무엇을 이용하려 안달이다. 문제아에게 ‘어머니 모셔오라’는 학교 선생님, 술 마시고 싸운 두 성인 남자에게 ‘부모님 불러오라’는 한국 경찰이다. 둘이서는 도무지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서구인이 볼 때 참으로 이상한 행동인데 한국인에게는 당연하다. 이런 삼자구도의 버릇은 너무 극명해서 삼국시대 이후의 한국 역사를 수놓고 있다. 실은 삼국시대란 단어도 그렇다. 삼국시대 한반도에는 이미 몇 개국이 더 있었다. 그럼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라고 옹고집을 피운다.
그렇다. 한국인은 언제나 3차원과 세 번을 좋아해 왔고 거기에 익숙하며 가치를 준다. 부킹, 중매쟁이, 참견하기, 복음주의(신-신도-나), SKY, 여당-야당-중간당 등. 서양의 삼세판은 1대1의 상황에서 한 사람을 떨어뜨리기 위한 장치지만, 한국의 삼세판은 마치 엿치기나 고돌이 처럼 우연한 상황의 우선 순위를 가리기 위한 장치로 흔히 활용된다. 사고를 당했을 때 영미인은 Oh my God! 프랑스인은 Ou la-la!, 스페인인은 Dios mío, 이탈리아인은 Mamma Mia! 아랍인은 Ya ilahi 혹은 Ya Rab, 한국인은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다. 한번으론 모자라다. 세 번 아이고가 적정하다. 건배할 때도 웬만하면 같은 단어 세 번이다.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인터넷을 뒤져서 한국기업명을 찾아보라. 삼성, 삼원, 심진, 삼익, 삼천, 삼천리, 삼일, 삼오, 삼육, 삼구, 삼한, 삼덕, 삼미, 삼보, 삼양, 삼표, 삼정 무수하게 삼이다. 서구기업 중 Tri~(삼)로 시작되는 회사가 얼마나 될까? 삼돌이, 삼순이는 개똥이, 말순이에 비하면 형언할 수없는 민중성을 가지고 있다. ‘웃기다’는 문자를 보낼 때도 ‘ㅎㅎㅎ’ 혹은 ‘ㅋㅋㅋ’다. 이게 한국성(性)이다.
그래서 뭐 어쩌자고? 우리식대로 창조하자는 것이다. 중국이 하늘과 땅, 여성과 남성, 과거와 현재, 불과 물, 미와 추를 음양의 법칙으로 관찰했을 때, 우리의 원효대사는 하늘과 땅에 인간을 끼워 넣었고, 여성과 남성 사이에 아이를, 과거와 현재에 미래를, 불과 물 사이에 공기를, 미와 추 사이에 평범함을 끼워 넣었다. 중국이 태극문양을 만들었을 때, 원효대사는 삼태극을 만들었다. 한반도의 전통이 가장 깊은 문양도 삼족오이다. 한옥집에 가면 앞문, 좌우 옆문은 있어도 그저 창문이나 하나 뚫어 놓을까, 뒷문이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야나기 무네요시, 고유섭, 조지훈, 에카르트, 김환기 등이 근대의 관점에서는 설명할 수 없던 미학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니 기껏, ‘무기교의 기교’, ‘구수함’, ‘흐트러진 클래식’, ‘자연미를 가진 인공미’, ‘없는 듯, 있는 듯’, ‘그냥 느껴야만 하는 것’과 같이 비평답지 않은 비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것이 과거의 한반도 미학인가? 전혀 아니올시다.
한국 지자체 휘장 디자인을 모두 모아 살펴보라. 타 지자체 디자인을 모방했든 안했든, 위와 아래, 좌와 우, 앞과 뒤 중간에 무언가 꼭 터치를 하고 마는 습관이 발견될 것이다. 물방울 하나를 그려도 작은 것 하나 더 그리려 한다. 동그라미도 비 균등하게 늘어놓는가 하면, 두 개의 유사 문양 사이에 뭘 꼭 넣으려 한다. 타이포를 만들어도 그렇다. 상하좌우 대칭을 견디지 못해 서체의 일부분을 길게 뺀다든가, 대칭되는 부분에 도상을 하나 그려 넣는다. 도무지 1:1의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포스터는 말할 것도 없다. 서구의 레이아웃 기초를 그대로 따르지만 항상 거기에 어떤 흔들림을 준다. 필요한 텍스트를 두 개로 나누어 위아래, 좌우 어떤 방식으로 레이아웃을 잡든 그 사이에 뭔가 터치를 하고 싶어 한다. 그걸 ‘뉘앙스’라고도 하고 ‘포인트’라고 부르기도 하며, ‘여유’라고 피식거리기도 한다. 동대문 의류 상가에 가서 한국 젊은이들이 자유롭게 디자인한 의복을 살펴보라. 좌우 대칭을 잘 지키지만 중간에 뉘앙스, 포인트, 여유를 주어 이분법의 딱딱함을 불안정하게 만들어 놓는다. 영화 캐스팅할 때도 그렇다. 조각 같은 인물은 주인공이 되기 어렵다. 주인공 캐스팅을 해도 꼭 악당을 시키거나 불안한 역할을 맞는다. 반면, 얼굴의 좌우대칭이 되지 않은, 뺨이 독특하게 두드러지거나, 눈매가 사선으로 처지거나, 코가 어떤 식으로든 변형된 인물이 주인공을 맡는다. 여학생들 뽀샵사진 찍을 때도 그렇다. 절대 정면을 향하지 않는다. 앵글을 사선으로 잡거나 비스듬하게 잡거나, 명암을 주어 클래식을 벗어나려 노력한다. 정면이라면 뺨에 바람이라도 집어넣거나, 손가락으로 브이(V)라도 그려야 한다. 무언가 3자의 침입이 있지 않으면 존재를 존재로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모더니즘의 2자대면을 극복하여 포스트 모더니즘이 수용했던 철학 중 하나가 3자 대면이다. 이것이 한국에 수입되었다. 어이쿠!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3자 대면의 철학이 토대였던 한국 전통디자인에 서구에서 들어온 3자 대면의 철학을 중복, 덧씌웠으니 말이다. 현대 한국 디자인(특히 건축)의 그로테스크함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수없이 많은 디자인물이 제멋대로이다 못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자기 전통의 특성이 무엇인 지도 모른 채, 남의 트렌드에 디자인의 운명을 맡겼기 때문이다. 한반도 전통 자체에 모더니즘이 있었고, 포스트 모더니즘도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전 세계를 다 훑어보아도 한국인의 손재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저작거리 세공소 직원도 서구 국가의 인간문화재 수준이다. 일본과 중국은 아예 따라오지도 못한다. 난 이런 한국인을 항상 경이롭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한민족의 태생적인 재주다. 그러하니, 재주는 그대로 놓아두고 하나만 고치면 된다. 즉,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다. 미술, 디자인계에 팽배한 서구 사대주의를 없애고, 디자이너 스스로 디자인의 한국적 개념 및 이론, 한반도의 디자인적 상상력을 탐구해 나간다면 한국 디자인은 머지않아 세계를 이끌 것이란 것이 내 생각이다.
신항식 현재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겸 SSBC 연구소장. 저서로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시각영상 기호학〉, 〈디자인 이해의 기초이론〉 등이 있고, 〈재현의 논리와 미학의 재구성〉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