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이어령 교수가 <축소지향형의 일본인>(문학사상사, 2008년 재간)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일본사람들은 세상을 작게 축소하려는 욕망을 지녔다는 내용이었다. 말을 해도 ‘~의’라는 조사를 써서 장면을 축소해 간다는데 “바다의 섬의 새의 자유로움”이런 방식이라는 것이다. 회화나 일러스트레이션은 약간 다르지만, 일본의 생활디자인에 그 성격이 두드러진다. 실내정원과 분재, 미니바, 일인용 주거 공간과 식기, 소형자동차와 워크맨 같은 전자기기, 라면과 도시락, 자동판매기에서 보듯이 꺾고 접고 밀어 넣고 잘라내는 경박단소(輕薄短小: 가볍고, 얇고, 짧고, 작다)의 경향이 있으며 이는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일반에서 동시에 드러나는 축소, 삭제, 단순화의 성격과 비슷하다.
이는 우리가 모두 아는 바로, 사례가 차고 넘쳐 일반화가 쉽게 가능하다. 반면 원인을 알기는 쉽지 않다. 새나 고래를 복사한 비행기와 잠수함처럼 자연을 복사하는 기술과 기계를 발명하여 자연의 실물을 바꿔 놓는 서구문화를 우리는 잘 알고 있지만, 원인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과 같다. 단지, ‘세상이란 지배할 대상’이라는 근대인 특히 앵글로색슨의 정신상태 정도를 알 뿐이다. 철학은 이를 인식론이나 세계관이라 하지만 상식적으로는 그냥 정신상태(état d’esprit)라 부른다. 물론 이 정도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서구민족의 지정학적, 사회문화적 환경이 만들어 놓은 정신 상태이기 때문에 오랜 연구를 거쳐서 나온 결론이며 대중은 그저 결론만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경박단소, 축소지향의 일본문화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릴만한 정신 상태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또 언제 싸움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위기, 예방의 그것이 아닐까. 정작 가슴을 열어보면 싸우자는 것도 싸우지 말자는 것도, 끼어들자는 것도 끼어들지 말자는 것도, 친해 보자는 것도 말자는 것도, 무관심하자는 것도 아니다. 당장 죽어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데 단지 싸움이 두렵다는 것이다. 싸움을 두려워한다는 일본인이 죽음도 마다않고 주구장창 싸움만 해 왔으니 이는 단순논리로 이해할 것이 아니다. 이 정도를 이해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집단의식이 강한 아시아인은 인간을 복잡하게 바라보지 못한다. 아시아는 집단규약이나 체면의식을 통해 인간의 말과 행동을 깊게 제약해 왔으니만큼 개인은 집단에 비해 항상 단순하다고 믿는 정신 상태에 처해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남의 말을 쉽게 믿거나 첫인상에 마음의 많은 부분을 줘버리는 순진한 인식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생긴 대로 논다’는 믿음이 깊어서 누군가 두려움을 가졌으면 행동도 유순하고 진지하게 할 것이라 착각을 한다. 반면 근대 서구는 인간의 가장 나쁜 부분 중 하나로 두려움을 꼽아왔다. 겁쟁이는 서구 언어 최고의 욕이었다. 두려움에 아무 짓(부도덕)이나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나 경험적으로 볼 때 누가 옳은가? 집단을 따라 사는 것이 미덕이었고 그 미덕이 용모에까지 드러났던 옛 시절이라면 아시아가 옳을지 모르지만, 집단보다 개인을 강조하는 근대사회에서는 서구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 근대인은 절대 생긴 대로 놀지 않는다.
근대사회의 겁쟁이는 부도덕하다. 항상 주변만 쳐다보다가 누가 시켜 책임소재가 분산된다 싶으면 전쟁, 간섭, 협상, 중립 무엇이든 해왔다. 누군가 시켜서 같이 한 일이니 특별히 반성할 것도 책임질 것도 없다. 저 스스로 무얼 하는 경우가 없이 상황에 맞춰 기는 만큼 순간적인 역사는 잘살아가나, 세상사의 큰 흐름과는 자주 핀트가 맞지 않는다. 바로 일본인이 그렇고 세상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현대일본의 제도가 그렇다. 그저 집단 봉건사회에서나 살아갈 사람들이 어울리지도 않는 근대문화를 괜스레 받아들여 150년 넘게 마음고생을 하고 사는 것이다. 결국, 근대의 시각에서 보아 축소지향, 비자발성, 비창의성, 노예의식과 같은 여러 문화항목을 일본인의 꼬리에 붙일 수 있는데 이는 남의 역사를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그들의 팔자소관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들 밑에서 식민의 삶을 살았던 한민족은 누구인가? 식민을 벗어난 오늘날, 친일파를 인정하다 못해 그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며 친일가족과 친일정당에 표를 던져주는 인간들과 술자리를 기울이며 깔깔대는 이들은 뭔가? 반성해도 보통수준으로 해야 할 민족이 아니다.
동물의 육체와 행위가 그렇듯이 인간도 자기를 보존하려는 욕망에 따라 세상에 반응한다. 생명이니만큼 살려는 욕망을 논의할 것은 없고 단지 방법이 문제가 될 뿐이다. 현재까지 알려진바, 동물이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은 자기 변신, 협동, 싸움 이렇게 세 가지다. 매사에 그렇지는 않지만, 보통의 동물은 같은 종끼리는 비교적 협동하고 다른 종과 만나면 자기 변신과 싸움을 선택한다. 동물에게도 연대의식이 있어서 협동을 선호하며 불가피하지 않으면 싸움은 절대 피하는 편이다. 인간은 도가 좀 다르다. 다른 종이 아니라 같은 종에게 방법을 마구 적용한다는 점에서 지나치며, 세 가지 방법 중 협동을 선호했음에도 실제로는 가장 무시했고 전쟁을 멀리했음에도 실제로는 가장 자주 선택했다는 점에서 정신이 묘한 동물이 인간이다. 이렇게 해서 자유, 민주, 평등과는 정반대의 파시즘 자본주의를 만들어 낸 것이 또한 위선적인 인간이었다.
자기보존의 방법이라면 싸움밖에는 모르는 인간 중 대표민족이 앵글로색슨이다. 자기 변신과 협동은 위선에 불과하다. 5세기 로마와 브리튼족의 뒤통수를 치기 시작하면서부터 최근의 우크라이나까지 1,600년 동안 이들은 끊임없이 싸움의 기술을 걸어왔다. 다윈이나 헉슬리, 왓슨과 도킨스 같은 진화론자들이 싸움이론을 대표한다. 20세기 사람들은 잊었지만, 1920년대 까지만 해도 진화론은 영국 남동부, 독일 북서부, 덴마크, 네덜란드, 당연하지만 미국의 뉴잉글랜드에도 깊은 뿌리를 둔 앵글로색슨의 독특한 문화콘텐츠였다. 잘난 놈, 이기적인 놈만이 살아남는다는데 무엇이 잘나고 이기적인 기준이냐고 물어보면 싸움이 대표적이란다. 그리고 싸움의 조건은 개인의 자유(존 스튜어트 밀)란다. 그래서 진화론 초창기에는 아이와 여자, 흑인의 노동을 자유롭게 빼앗아 돈을 벌었고, 다음으로는 다른 민족의 육체와 자원을 빼앗아 그리했으며, 그다음으로는 타 대륙 전체를 빼앗아 약육강식의 시대를 펼쳐 나갔다. 인간의 능력을 수치로 계산하여 99% 인간의 노동을 최소한의 화폐가치로 낮추어 나머지를 1%의 인간에게 가져다주는 희대의 수탈체제, 자유 자본주의를 200년 넘게 작동시켰다. 참으로 막장 학문이지만 진화론은 여기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더 나아갔다. 누가 잘난 놈인가는 역사와 문화가 아니라 태생이 결정한다면서 인종주의를 부르짖었다. 우생학은 진화론의 꽃이었다. 이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르네상스 및 서구 전체가 그랬다고 변명하면서 이웃의 배를 가르고 사람의 뇌를 벌려 칼을 들고 설쳐댔다.
앵글로색슨은 지금도 툭하면 의학이며, 뇌 의학이며 생리학을 들이민다. 학문이란 것이 죄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찌르고, 자르고, 뭘 넣고, 끄집어내어 시시비비를 가리는 유물론적인 연구다. 논리적인 유추를 하기보다 직접 눈으로 보려는 버릇인데 “환자 수백 명의 배를 갈랐지만 영혼을 본 적은 없다.”라는 19세기 어느 영국 의사처럼 이런 유물론적 실증주의는 앵글로색슨의 오랜 전통이자 서구문화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웃의 노동과 자산을 빼앗으며 “자기 욕심을 추구하면 이웃에게 도움이 된다.”(아담 스미스)거나 미국에 갓 이민 온 주제에 “세계를 장악하겠다.”(앤드류 잭슨)거나, 평화를 말하면서도 “인간은 원래 패싸움을 하기 마련이며 최종적으로 이긴 놈이 장땡”(토마스 홉스, 프리드리히 헤겔, 칼 마르크스)이라거나 종교협력이 이루어짐에도 “미래는 타 종교와의 전쟁”(사무엘 헌팅턴, 조지 부시)이라는 반민주, 반평등, 반자유, 반시장의 공산주의 궤변을 300년 이상 늘어놓았다. 한편으로는 “공격해 보니 공격받은 사람도 즐거워하더라”는 변태까지 있다. 이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자기를 보존하려고 싸우기보다는, “싸워야만 자기를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근대 영국과 미국은 외침을 거의 받아본 적이 없는 반면, 평생 남을 공격만 하고 살았다. 그것도 약한 자만 골라 그리했다. 도무지 역사의 반례를 찾을 수가 없으니 일반화가 가능한 사실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술을 최고로 쳤던 중국인이 볼 때 이들은 동탁 같은 안하무인이다. 사회를 협력관계로 바라보는 소비에트 러시아인이 볼 때 이들은 그저 깡패다. 반면 막부시대를 갓 지난 일본인들에게 이들은 부럽고 숭배하고 싶은 무사 같은 존재였다.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에 들어서 일본인은 이들을 본격 모방하기 시작했다.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같은 문명국가는 무조건 해군을 키우는 줄로만 알았고 남의 나라를 침공하여 자원을 빼앗는 것이 강대국의 덕목인 줄 알았다. 군복같이 생긴 옷을 일상으로 입었으며 건물도 영국 제국스타일을 따르며 감탄했다. 물론 이런 폭력은 자기들의 오랜 무사, 막부의 심성에도 맞았기 때문에 저지른 일이다. 남 탓할 것이 없다.
일본의 무사, 막부라 했다. 사회생활을 폭력으로 지배하는 조폭체제다. 150년 전까지도 제대로 된 법규가 없으니 백성이 믿고 따를 통일된 행정제도도 없던 일본이었다. 남의 땅을 빼앗아 논두렁 깡패 두목, 다이묘(大名)가 되면 그 나와바리(구역)에서는 대장이었다. 그가 구역 간 전쟁을 벌이고 큰 도시로 진출하여 인정받으면 쇼군(征夷大将軍) 즉 전국적 오야붕이 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예야스 모두 전국적 오야붕이었다. 논두렁 깡패 두목들이 사무라이(侍)를 거느리다가 쇼군이 죽으면 서로 혈투를 벌였던 일본의 중세사(1185년~1867년)다. 한국의 깡패영화에서 보이는 두목, 중간두목, 깡패의 네트워크는 일본 막부체제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 놓은 것이다. 국가체제를 그나마 갖추었던 에도시대(1603년~1867년) 때도 막부파벌은 260개가 넘었다. 국가체제를 오래전에 갖추었어도 지방자치 규약이 남아 있던 민주공동체 조선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깡패가 지방자치를 했다. 폭력을 행사할 때는 주로 칼을 썼고 돈은 조공과 약탈(무역)과 서민에게 삥(세금)을 뜯어 벌었다. 당사자 간의 계약이 없고 대등하지 않으니 무역이 아니라 조공이나 약탈이었고 대표성이 없고 보호도 변변찮으니 세금이 아니라 ‘삥’인 것이다.
일본 민중이 실생활에서 직접 대하는 깡패는 두목이 아니라 당연히 꼬붕(하수인)인 사무라이였다. 영화에서는 폼 잡는 꼴만 보여주니 뭐가 있어 보이지만 실은 위에서 시키면 무엇이든 하며 아래로는 멋대로 구는 용역들이다. 이들은 큰 칼 작은 칼을 상시 들고 다녔다. 새로 산 칼이 잘 드는지 알아보기 위해 걸어가는 서민의 목을 치기도 했다. 중국과 2차 대전의 일본 군대를 취재한 서구기자들이 그들의 잔인성을 욕할 때는 바로 이런 막무가내 살인행위의 전통 때문이었다. 적을 앞에 두고도 민간인을 쫓아 다니며 죽이는 근대군인은 일본군과 이승만의 친일경찰과 군대밖에 없었다. 사이공을 접수한 베트민도 남베트남에 치를 떨었지만 그런 수치스런 짓은 하지 않았다.
남자의 여자에 대한 태도는 시대를 깊게 아는 방법의 하나인데, 에도시대 이전부터 일본남자는 여인을 위해 마음 졸이지 않았다. 일본의 여인들은 사무라이들에게 상시 강간을 당했기 때문에 처녀가 아닌 상태로 시집가는 것이 정상이었다. 옷도 이상하게 만들어 속옷(훈도시)은 남자만 입었지 여자는 입지도 않았다. 기모노 끈을 하나만 풀면 20개 겹옷이 모두 스르르 열려 알몸을 드러냈으며 그 몸을 완력으로 빼앗는 것이 당연했다. 딸이든 아내든 밤늦게 돌아다니고 술에 취해 길거리에 엎어져 있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에 와서야 여인들을 방안에 가두고 옷과 몸을 챙겼지만, 풍습이란 게 정치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일본남자는 아직도 여인에게 사랑 고백을 잘 하지 않는다.
에도시대에는 칼 대신 총이 일반으로 퍼져 나갔고, 논두렁 사무라이가 대도시 에도(동경)로 대량 이주했다. 막부는 골치도 아프고 그리 큰 이익도 나지 않는 무역보다는 농, 서민의 주머니를 고정적으로 터는 것이 더 이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서, 국경을 걸어 잠그고 화폐를 통일, 본격적으로 서민의 삥을 뜯기 시작했다. 지방의 두목을 보좌하던 사무라이들은 싸움 대신 농, 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폭력을 대리 행사하는 잡일을 맡았다. 자기들끼리 집단 다구리(편싸움)를 벌이거나 길거리에서 다이다이(일대일)를 붙던 옛 사무라이의 가오(얼굴)는 사라졌다. 정부의 명령을 받아 서민 잔돈을 터는 입장이니 예전처럼 무작정 폭력을 사용하기가 점점 어려웠고 총이 많으니 매번 칼을 갈아 놓아도 쓸데가 없었다. 시간 날 때면 둘이 앉아 차나 마시며 옛 무사의 영웅담을 읊조렸고 천한 장사꾼들에게 손을 벌리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것이 일본의 유명한 다도이며 하이쿠이다. 차를 마셔도 체할 정도로 군대식이고 시를 읊어도 구를 퍽퍽 잘라 내며 오버했다.
세상사의 큰 흐름을 읽지 못하던 막부는 결국 미국의 함선에 무릎을 꿇었고, 사무라이 대다수가 흩어져 일본의 경제, 정치계에서 한몫을 잡아 동네 깡패생활을 접었다. 그러나 제 뿌리가 어디 가지 못해 땡깡(지랄병)을 부렸다. 메이지 시대 정치인, 경제인, 학자로 돌변한 사무라이 출신들은 잃어버린 막부시대의 폭력을 찬양하고 실제로 한반도와 만주를 침략했고 태평양 전쟁도 일으켰으며 전후에는 워싱턴을 오야붕으로 삼고 스스로 일본지방의 다이묘가 되어 오늘날의 정치파벌을 만들어 오게 된다. 그것이 자민당 파벌들이다. 자민당과 야쿠자의 연계설이 끊임이 없는데 그 이유는 자민당 자체가 막부의 조폭문화를 그대로 대표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본 서민들은 막부 700년 내내 죽음을 턱밑에 두고 살았다. 막부의 위계질서를 따르지 않으면 이웃에게도 왕따가 되어 길거리에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키워 나갔다. 자기를 드러내는 것을 싫어해서 상시 부채를 휴대했다. 실은 사무라이도 그랬다. 주군을 찾아 이리저리 일감을 찾던 백수였기 때문에 삶의 두려움을 민중과 나누고 살았다. 이탈리아의 조폭은 혈연과 지연으로 충성했고 미국의 조폭은 계약으로 충성했지만 일본의 조폭은 우연히 만나 밥거리를 해결해 준 사람에게 무조건 충성했다는 점에서 감성도 단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서운 막부시대가 지나고 메이지를 거쳐 군부 시대(1912년~1945년)가 오니 아예 국민 목숨을 내어 놓으라 했다. 그러하니 일본인들은 막부 이래 800년 역사 앞뒤로 천 년 가까운 시절을 대화보다 복종이, 협상보다 강제가 효과적이라는 일본적 삶의 지혜를 체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이 항상 가슴에 있어서 권력과 일체로 움직이고자 했으며 민중 스스로 무슨 일을 꾸민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일본 역사상 민중반란은 한 손가락으로도 꼽을 만큼 찾기 어렵다. 일본 민중 대다수는 스스로 권력의 소재를 미리 알아서 움직였다. 권력의 소재에 맞추어 바닥을 기는 행동이야 오늘날에는 한국 친일파 정치계의 특성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이처럼 아무리 보아도 이웃을 먼저 공격해야만 내가 살 것 같다는 두려움에 오래전부터 노출되어 있었던 일본인들이었다. 섬에 있을 때는 아무래도 대륙으로 나가야 편할 것 같고 대륙으로 나가니 아무래도 섬 안에서 사는 것이 더 편안해 보이는 오락가락 정신상태 속에서 끊임없이 내외의 전란을 일으켰다. 오늘날에도 그렇다. ‘서구가 아시아에 오면 당연히 공격할 것이고 일본도 공격당할 것이니 혹시 몰라서’ 중국과 한국, 아시아와 만주를 먼저 공격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잘못한 것이 없단다. 미국이 전쟁에 쓸 기름을 가져오지 못하게 해서 선제공격했으니 잘못한 게 없다고도 한다. 도무지 고민 같지도 않은 것이 일본인에게는 고민이었다. 이자를 듬뿍 얹어 일본의 전쟁비용을 대 준 것이 일본과 미국의 대기업이었으며 나름대로 기습이라고 공격했던 진주만에는 세월호보다 더 낡은 군함에다가 비행기도 몇 대 되지 않았다는 이상한 사실에 대한 고민은 없는 것이다. 일본의 기습을 미리 알고 있었던 미국 대기업의 전쟁 꼼수에 이끌려 들어가 국가자본을 모두 탕진하고 나라 전체를 미국에 가져다 바친 주제에 도대체 무얼 고민하는지 알 수가 없다.
오래전부터 동, 서학계로부터 ‘병신 같은 사고방식'(paralysed thinking; Alexandre Kojève)이란 소리를 들었어도, 그것이 어째서 병신 같은지 일본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정신이 항상 전쟁상태에 있으니, 약간의 위기만 와도 호들갑을 떨며 합리적인 사고마저도 자신의 정신을 변명하는 데 활용하기 때문이다. 평화주의자 가라타니 고진 같은 일본인도 이런 정신 상태를 빠져나오지 못한다. “위기가 와서 대응한 건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는 이상한 논조가 그의 이른바 평화론에 녹아 있다.
정리한다면, 2014년 현재, 혹시 모르니 자위대를 풀어 중국의 위협에 공격적으로 대응하겠다는 현대일본의 예방적 정신상태, 제도 운영방식 모두가 사람만 바뀐 채 여전히 천 년 가까운 무사 시대를 잇고 있다. 물론 중국을 저지하라 미국이 시켰으니, 옳거니 하며 하는 짓이다. 민주주의를 60년을 경험했다고 하는 일본인은 결국 전범의 손자 아베의 설득에 다시 넘어갈 것이다. 막부시대의 문화적 전통을 여전히 가졌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따른 예방의식(위기다. 대처하자), 삶에 문제가 생기면 말없이 사건을 축소, 삭제, 조작하는 심성(잔말 말고 까라면 까)이 그것이다.
작금의 거대한 금융과 체제의 위기는 체감도 못 하는 주제에 말이다. 위기도 아닌 것을 위기라 느끼며 예방할 것도 아닌 것을 예방하기 위해 진실을 축소, 삭제, 조작하는 일본에서 작은 민주주의라도 찾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진주 찾기만큼 어렵다. 민주주의는 위기상황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행여 위기 앞에 섰다 하더라도 민주주의는 두려움이 없는 개인의 의지(이것이 라틴어의 votum, vote, 선거이다), 공공연한 사실에 근거한 대표성(이것이 그리스 라틴어의 republic, representation, 대표자이다)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의지도 사회적 대표성도 없이 남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이들에게 무슨 민주주의인가. 일본 디자인도 이런 정신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다.(다음 화에 계속)
신항식
현재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겸 SSBC 연구소장.
저서로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시각영상 기호학>, <디자인 이해의 기초이론> 등이 있고,
<재현의 논리와 미학의 재구성>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