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갈대 같아서 생각이나 감정을 항상 명확히 하기 어렵다고 한다. 애정, 지식, 욕구, 물증을 확신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뱉어내면 확신이 되어 버리는 것이 말이거늘, 인간은 또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불명확한 생각과 감정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모순이 있으니 말하기 전에 모순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게 파스칼의 생각이었고 멀리 소크라테스와 공자, 가까이 비트겐슈타인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쉽게 말하면, “말하기 전에 공부부터 하라.”는 것이었다.
이랬던 2000년 이상의 역사가 뒤집힌 것인지, 인간이 원래 그런 지 확신은 없지만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말부터 먼저 하고 나서 나중에 ‘짜 맞추기 변명을 공부하는’ 희한한 갈대의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느냐.”는 변명을 대기 위해 공부한다 이 말이다. 애정의 깊이도 파악 못 한 채 표현만 늘어놓으며 제 감정을 변명하다가 파국을 맞는 연애와 결혼, 거짓 물증과 근거 없는 헛소리를 권력입네 하며 강제하다가 신뢰를 잃은 정치, 청사진 없는 마케팅을 오로지 PPT로 변명하면서 먹튀만 생각하는 기업과 경제, 편집기술로 짜 놓은 학술논문과 서적이 가득한 대학과 학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
자기 성찰을 먼저 하라는 오랜 교훈을 뒤집고 오락의 효과만 지향했던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다. 발상은 없거나 불분명한데도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변명하면서 표현만 디자인하려고 발버둥 치는 증상을 찬미해왔던 시대정신 말이다. 기억나는 증상만 열거해도, ‘She 8′(창부 술집), ‘足家'(돼지족발 식당), ‘실실조개니?'(조개구이 식당), 버르장머리'(미용실), ‘부정부페'(뷔페 식당), ‘University of Seoul'(서울시립대학교), ‘일어서自'(서울시 봉사 슬로건), ‘복떡방'(떡 가게), ‘위풍닭닭'(닭고기 식당), ‘이끌레'(옷 가게), ‘선영아 머리해'(미용실), ‘코스닭'(닭고기 식당) 같은 것들이 있다. ‘곧망할집'(식당)이라는 망할 놈의 표현도 있다. 이것들이 어째서 망할 놈의 표현인가? 남과 소통하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쾌락을 유발하거나 왜곡된 상태의 내용을 유추해서 상대에게 강제하는 표현이라서 그렇다.
쌍욕과 손님이 어찌 소통하겠으며, 버르장머리 없는 미용실이 어찌 머리를 만져주겠으며, 부정부패한 뷔페 집이 어찌 손님을 끌겠는가? City University를 University로 무작정 강요한다고 상대가 National University of Seoul이라고 어찌 이해할 것이며, 일어서와 自가 어찌 문법으로 묶이겠으며, 복덕방에서 떡이 어찌 팔리며, 코스닥이나 위풍당당한 닭이 어찌 그리 가엽게 접시 위에 놓이겠으며, 옷이 무엇을 어찌 이끄는가? 다른 의미가 없다. 그저 ‘재미있다’는 것뿐이다. 엉터리 표현을 재미있다고 느끼는 분열증세가 가득한 시대이기 때문에 비참한 언어다. 2,3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라티우스는 “그저 튄다는 이유로 내용에 어긋나는 표현을 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으며 인간은 이를 예술의 원칙으로 삼아왔다. 위의 허접 언어 디자인처럼 소통 불가하면 상상력도 물거품이 되며 예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하니 말 그대로 2,000년 이상의 역사가 뒤집힌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분열증이다. 생각과 감정이 불분명하고 모호한데도 불구하고 성찰도 없이 무조건 표현, 설명하려 발버둥 칠 때 의사들은 이를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이라 부른다. 보다 정확하게 설명한다면 사고와 감정이 불명확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사고와 감정은 원래 명확하지 않은 법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하려고만 발버둥 치는” 욕망이 바로 분열증세인 것이다. 망상, 환영, 4차원, 즉각적인 반응, 무논리증, 좌절, 집중력 상실 등이 AMA(미국의학협회) 장애평가기준이 제시해 왔던 후속증상이다. 실은 의학적 판단을 빌려 올 필요도 없다. G. 들뢰즈와 F. 가타리가 이미 40년에 경고했던 바이다(<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민음사, 1994). 정신분열 증상은 이미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있으며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 면모이기도 하다.
2008년 이후 무너지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앞두고 분열증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확연하게 늘고 있다. 참으로 다행이다. 덧붙여, 우리가 지난 40년 동안 잠시 잊고 살았던 예술 하는 법 혹은 수사학을 되짚어보자. 이를 ‘언어의 디자인’이라 할 것이다. A 단어 옆에 B 단어가 있으면 두 단어는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상상력에 의해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사람의 마음’은 성질상 넓고, 깊고, 속을 알 수 없다는 상상력의 의미를 가졌다. 이 표현이 같은 상상력을 지닌 ‘호수’를 만나 “내 마음은 호수요”가 나왔으며 그래서 시가 될 수 있었다. 내용의 정체성을 은유적인 표현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 시이며, 문학이며, 예술인 것이다.
현대 디자인도 언어도 이와 같은 3,000년 수사학의 전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를테면 ‘美쳐보자'(반미청년단체), ‘우리두리'(2인조 경비회사), ‘Sul. Zip'(술집), ‘백설탕'(목욕탕), ‘내 친구 박봉'(시집제목)과 같은 표현이 그렇다. 미치는 것은 청년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며 그렇게 미국을 공격한다는 것은 반미에 적합하며 ‘하자’는 권유의 표현은 ‘우리는 단체’라는 사실을 정체성 있게 표현한다. 경비는 우리(cage)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2명이 한 조로 움직인다. 따라서 ‘우리’를 ‘두리’ 지키는 정체성을 지녔다. Sul. Zip.은 술을 zip.파일로 모은 집이다. 당연히 술집이다. 게다가 Sul의 또 다른 발음은 /설/ 즉 입담을 나눈다는 것이고 zip은 말 그대로 집이다. 술 마시고 설을 풀 수 있는 집이다. 목욕탕은 몸의 때를 빼는 곳이다. 당연히 설탕처럼 흰 몸을 만드는 곳이라는 뜻이다. 단지, 단맛의 상상이 색채의 의미를 왜곡할 위험이 있다. 성은 박이고 이름은 봉이다. 박봉의 월급을 받는 기업의 봉 즉, 서민 박봉씨다. 그는 나의 친구이다. 서민이 믿을 건 친구밖에 더 있겠나? 서민-쥐꼬리 월급-우정 이 세 가지 상상력이 서로 정체성을 이루며 만들어진 언어 디자인이다. 이런 표현은 단어가 가진 의미적 정체성(Semantical identity)을 지키고 있다.
이것이 실은 미학적인 마케팅의 기초인 브랜드 정체성(Brand Identity)이다. 브랜드란 것 자체가 내용과 표현 사이의 존재론적 정체성이기 때문에 어떤 브랜드이든 표현과 내용을 분열시키면 안 된다. 브랜드가 추구하는 신뢰관계가 파국을 맞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인류가 수천 년 지켜왔던 예술 창작의 원칙이자 브랜드마케팅의 원칙이기도 하다. 아무리 표현이 “튀어 눈에 혹하고 들어 온다”해도 표현과 내용이 서로 왜곡되어 있으면 소비자는 이를 결국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디자이너들은 시각표현과 시각매체에만 얽매어 살다가 다중매체 시대를 맞이했다. 이제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에도 신경 써야 하고 제품의 촉각, 요새 유행하는 커피 전문점처럼 후각, 푸드스타일링처럼 미각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언어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골치 아픈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각기 나름대로 잘 헤쳐나가길 바라지만, 아직도 갈 길이 좀 멀다는 느낌이다. 엉터리 예술, 엉터리 디자인 시대일수록 미학과 의미의 소통원칙에 충실한 디자이너가 되기 바란다. 게다가 이런 엉터리 시대가 얼마나 오래가겠나?
신항식
현재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겸 SSBC 연구소장.
저서로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시각영상 기호학〉, 〈디자인 이해의 기초이론〉 등이 있고, 〈재현의 논리와 미학의 재구성〉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