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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항식의 Designology #10 신자유주의 약사(略史) –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비극에 부쳐 ― 기호학자 신항식의 디자인-학(design-ology) 강의


    글. 신항식

    발행일. 2014년 05월 22일

    신항식의 Designology #10 신자유주의 약사(略史) –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디자인의 이론과 실제는 세계 근대사의 흐름을 거스른 적이 없다. 일반회화라면 무어 어떠랴. 사회와의 소통을 막고 아틀리에에 들어가 작업하면 끝일 것이다. 혹은 지나온 회화사를 돌이켜 보면서 제 작품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려는 개인의 노력 정도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작가 개인으로서 차별성보다는 소통가로서의 역할을 지녔기 때문에 상시 사회를 둘러보아야 한다. 디자이너가 둘러 본 사회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가 그의 발상을 결정하고 발상이 표현을 결정하는 법이니만큼 디자이너의 사회성은 필수적이다.

    문제는 디자이너가 이제껏 둘러 본 사회가 과연 ‘사회’이기나 했으며 또한 그에게 진정한 의미를 주는 데이터 베이스 역할을 했는 가이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난 30년, 이른바 사회라 하는 것이 디자이너들에게 헛되고 조작되고 가치 없고 비논리적인 정보만 제공해왔다. 도무지 제작에 필요하지 않은 허황된 정보만 가득했다. 대다수의 디자이너는 할 수 없어서 사람들에게 디자인에 관한 의견을 직접 묻거나, 벤치마킹이라 해서 남의 것을 연속 모방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권위기관의 매뉴얼을 가져다가 사용하는 어처구니없는 제작방식을 택해 왔다. 자칭 선구적이라는 디자이너 몇몇은 뇌 의학이나 인지공학을 기웃거리며 ‘사회적인 의미는 없더라도 혹시 한방에 사람들의 시각을 낚아 챌 인지처리 방도가 없을까’의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했다.

    전 세계의 철학자, 문학가, 사회학자, 언론인, 의식 있는 정치인들이 지난 30년의 허황된 세월을 반성하는 오늘날, 많은 수의 디자이너도 이 반성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무엇보다 전공 이기주의를 반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디자인 전공은 실은 전문전공도 아니다. 개인플레이의 회화도 전공 이야기를 하기 꺼려하는데 사회적 소통가로서의 디자이너가 전공을 어찌 이기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가? 디자인은 인문학, 사회학, 예술 그 자체이다.

    마가렛 대처, 출처: 플리커 BBC Radio 4(CC BY-NC)

    하여, 오늘은 지난 30년 세월을 주도했던 영국수상 마가렛 대처의 핵심문장을 돌이켜 보면서 약간의 추가 반성을 하려고 한다. 전 세계 시민의 뇌를 일시 정지시켰던 그 핵심문장은 다음과 같다.

    “사회요? 그런 거 없어요. 남녀개인과 가족만 있어요. 정부는 당신들에게 해 줄 것이 없어요. 각자 알아서 잘 살아 보세요.” – Margaret Thatcher, 1987년 9월 23일 런던잡지 Woman’s Own 인터뷰

    대처가 말하는 ‘남녀개인과 가족'(individual men and women and…families)을 설명하려면 그로부터 40년은 뒤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1947년 스위스 산골 몽 펠러랑(Mont Pèlerin)에서 17개국의 학자 39명이 모였다. 라이어넬 로빈스(Lionel Robbins), 존 주키스(John Jewkes),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 프리츠 매클럽(Fritz Machlup), 칼 포퍼(Karl Popper),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헨리 해즐릿(Henry Hazlitt), 프랭크 나이트(Frank Knight),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 빌헬름 뢰프케(Wilhelm Röpke), 발터 오위켄(Walter Eucken), 모리스 알레(Maurice Allais), 베르트랑 드 주브넬(Bertrand de Jouvenel) 등으로 대다수 경제학을 전공했다. 이들은 서구 국가가 관료화되어 국민을 파시즘의 똘마니로 만들었다면서 국가에 대항하여 개인과 소수 자발적인 모임(‘the individual and the voluntary group’)의 권리를 주장했다. 모임의 좌장인 하이에크라는 사람은 『노예의 길』(나남출판, 2006)이라는 책을 문고판으로 출판하면서 이들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파시즘은 물론이고 민주주의도 도움이 안 되면 재고할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은 1950년대를 지나면서 국가-정부보다 훨씬 더 독점화된 기업 오너를 개인이라 칭송했고, 기업을 자발적인 개체라 부르며 세상만사를 ‘팔고 사는’ 시장에 맡기자고 했다. 영국과 미국인들이 19세기 내내 입에 달고 살았던 시장경제, 자유무역, 민영화니 하는 구태의연한 단어를 다시 꺼내 들었다. 모순되게도, 그들이 경험한 국가정부가 그리 못났으면 그냥 없애 버리자 하면 되는 것이거늘, 국가정부는 그래도 작게 놓아두자고 주장했다. 18세기 자유주의자들과 똑같은 말이었다. 같은 말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새로워 보이나 보다. 국가가 경제에 적극참여토록 했던 당시의 경제학자들은 이들의 발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1950~60년대를 거치면서 서구는 국가주도의 보호경제를 통해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고 소련의 경제성장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경제와 국가의 협력은 매우 고무적인 일로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아시아 4마리의 용으로 부상하는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도 마찬가지로 국가주도 경제정책을 펴지 않았던가? 따라서 그 정도의 비주류성 발언을 하려면 조용히 18세기 말의 아담 스미스나 다시 읽으면 될 것을 도대체 스위스 산골에는 왜 모였는지, 돈이 어디서 나서 세력을 영국, 프랑스, 스위스까지 그리 확대해 나갔는지 경제학자들도 일반시민도 알바가 없었다.

    1947년 몽 펠러랑이 말한 ‘개인과 소수 자발적인 모임’은 기업인과 기업이고, 1987년 대처의 ‘남녀개인과 가족’은 민중이었다. 같은 개인이라도 누구에게 포커스를 맞추느냐에 따라 의미가 정반대인 것을 40년 동안 누구도 지적하여 이해하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서서야 그 마각을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전 세계의 철학자, 문학가, 사회학자, 언론인, 의식 있는 정치인들이 스스로 반성도 하지만 이들에 대한 비판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란 원래부터 정신적, 물질적 자유의 조건을 가진 자에게만 허용되는 생각과 행동이었다.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이익을 얻어갈 조건을 얻은 자만이 자유무역 시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민영화 또한 민영의 조건을 가진 자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모두 뻥이다. “민중의 자유? 웃기고 있네, 그거 뻥(Vanity)이야.”라 했던 나폴레옹의 돌직구 발언 이후, 19세기 내내 콩트나 루겐, 푸르동, 마르크스 등을 대표로 하여 자유란 것은 실은 가진 자만의 개념이라는 자명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스위스에 모였던 학자들이 이 사실을 몰랐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얼토당토 하지 않은 뻥을 밀어붙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민중을 우민화하여 엘리트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19세기는 똑똑한 민중의 시대였다. 시대정신이랄까 역사 속에는 사람들이 다른 시대보다 더 똑똑하거나 아니면 더 멍청한 때가 자주 발견된다. 똑똑한 시대라면 특히 18세기 말, 19세기의 유럽과 미국이다. 19세기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머리에 훨씬 못 미치는 손자 손녀들이 20세기에 들어와 큰 전쟁을 수없이 많이 일으켰고 전쟁도중에도 국가정부의 거짓말에 상시 속아 넘어갔었다. 애국심 한마디면 끝이었다. 전쟁이 끝나니 더욱 가관이었다. 국가정부가 시키는 대로 죽도록 일을 해서 전쟁 자금을 댄 은행과 군수, 미디어 업체의 배를 불려 주었다. 그렇게 1950년대 이후 서구의 민중은 다국적 기업의 농간에 꼭두각시처럼 놀아났다. 국민이 살고 일자리가 늘어나야 기업이 산다는 상식을 잊고 기업이 살아야 국민이 살고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거짓말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민중은 제 손을 만든 제품임에도 기업이 떨궈 준 월급으로 주말에 TV보고 새 옷을 사 입으며,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회식 정도하는 것에 감사하는 노예근성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20세기의 민중은 뇌가 조작 당했지만 세기 후반의 민중은 눈이 조작 당했다. 사물을 파악하는데 지각이 아예 머리까지 가지도 못하는 것이다. 2003년 라스티에(Francois Rastier)는 “우리 시대만큼 인지연관 학문이 강조되는 경우도 드물다. 삶의 의미, 개념이 아니라 단지 눈과 귀로 인지하는 메커니즘만 따지는 연구는 인간의 이성을 아예 마비시켜 버린다.’고 했다. 진짜로 이성을 마비시키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인지, 감성의 문제가 디자인에도 깊숙하게 파고 들어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출처: 플리커 lorena pajares(CC BY-NC-SA)
    출처: 플리커 me_maya(CC BY-NC)

    1947년 20세기 후반은 그래서 문제의 역사다. 대량생산 어셈블리와 계측제어, 석유화학과 제약기술, 비행기와 엔진, 종자계량, 유무선 통신과 메모리 저장능력 등은 19세기의 똑똑한 민중이 만든 산업기술이다. 디자인도 19세기가 만든 것이다. 이 삶의 혁신들이 20세기에는 ‘거의 자동적으로’ 발전해갔다. 그러니 창의성은 별 필요가 없었고 선행연구만 잘 따라가면 무언가 획기적인 결과가 나오는 수준이었다. 기업이든 학문이든 선행사례와 자기전공에만 집중했다. 반면 19세기가 가지고 있었던 종합적 논리의 세계는 사라져 갔다. 20세기 예술이 산업화되었다는 사실은 종합논리가 사라진다는 뜻과 같다. 디자인도 뿔뿔이 흩어져 분업에 충실했고 제품디자인으로부터 시각디자인으로 흐름이 바뀌었고 시장 마케팅보다는 브랜드관리 쪽으로 경영의 조타가 바뀌었다. 타이포그래피는 그림과 같아져 고딕과 명조를 떠나 신종 서체를 우후죽순으로 만들어 내었다. 가독성보다 가시성을 소중히 했다. 글의 뜻을 도와주던 일러스트레이션이 독자성을 주장했다. 사회과학에서는 각 분야에 전문가가 등장했다. ‘전혀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어야만 전문가 소리를 듣는'(Pierre Frath) 지적 비정상의 시대가 펼쳐졌던 것이다.

    20세기 후반은 또한 업무자동화 시스템이 거의 완성되어 가던 때였다. 기업 사정이 확 바뀌었다. 이전에는 필요했던 인간의 노동력이 가치를 잃기 시작했다. 자동화된 기술이 있는데 월급 주는 직원이 왜 필요한가. 월급을 동결시키거나 깎아버렸다. 더 나아가 국가정부를 시켜 법을 만들고 경찰을 동원해 직원들을 자유롭게 해고하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조종이 먼저 울렸고 중산층의 조종이 연이어 울렸다. ‘보잘 것 없는 기업만이 인건비 고민한다.’던 말은 옛 말이 되었다. 모든 기업이 인건비 줄이기 위해 보잘 것 없는 짓을 정부에게 요구했고 정부는 기업에게 국민의 생명을 팔았다. 기업은 ‘기업 간 경쟁이 심해져서 이익이 옛날만큼 나지 않는다.’고 징징댔고, 은행은 ‘대출이자 받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다.’며 씩씩 거렸다. 정부는 세금을 가지고 국가를 운영하기보다는 세금을 담보로 은행대출을 마구 해댔다. 마구 대출한 돈을 다시 기업에게 쏟아 붓는 해괴망측한 짓을 했는데, 정치인과 정부관계자들에게 이것은 망측한 짓이 아니었다. 임기제로 살아가는 자신의 밥벌이 방법이 그래서 그런 것이다. 정부기관에서 일하고 있을 때 기업에게 잘해주어야 자신의 노후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기업과 은행 그리고 정부가 주도한 경쟁과 제 이익 챙기기는 대중미디어를 통해 20세기 민중의 뇌 속으로 파고들었고 실업과 불안정한 직장의 현실을 통해 몸으로 체화했다.

    이리하여 20세기 후반부터의 기업은 산업으로부터 노동을 쫒아냈다. 인간노동의 종말이 오고 자동경영정보시스템이 돌아갔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마저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었다. 은행은 금융으로부터 산업을 쫒아냈다. 산업이 네트워크로 바뀌면서 손이 아닌 손가락으로 일을 ‘처리’하는 원격조정의 유비쿼터스가 마련되었으며 자본이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으로 나뉘었다. 정부는 행정으로부터 국민을 쫒아냈다. 행정이 기업과 은행 중심으로 바뀌면서 갑을관계가 되어 국민의 재산을 정부의 재산으로, 정부의 재산을 다시 기업과 은행의 재산으로 전환시켜 나갔다. 그러하니 민간주도의 정부가 되는 것은 당연했던 것이다. 민간주도란 뜻은 민간의 손을 빌어 정부행정의 효율성을 지향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부를 소수개인이 직간접적으로 소유한다는 뜻이다.

    한 바퀴를 돌아왔으니 이제 아담 스미스나 조용히 다시 읽으면 될 것을 경제학자들이 스위스 산골에는 왜 모였는지, 왜 얼토당토 하지 않은 짓을 벌여 지금의 세계화를 이루었는지를 설명할 때다. 이들은 1930~1940년 당시 미국의 언론인 리프먼(Walter Lippmann, 1889-1974)에게 크게 영향 받은 사람들이었다. 리프먼은 청년시절, 맨델 하우스(Edward Mandell House)의 사무실에서 일했다. 하우스는 미국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으로부터 민영 연방은행(FED: Federal Reserved Bank) 인가를 받아냈던 사람이다. 국가의 지폐인 달러를 민영은행이 자유롭게 찍어대도록 허가하는 희대의 미국정부 행태를 지켜보면서 리프먼은 엘리트의 승리를 확신했고 대중을 짐승, 멍청한 무리라 부르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자주 혼동하는 미국의 일반문화에 빠져 유럽적 사회주의의 대안은 자유주의라며 여론조작에 뛰어 들었다. 자유를 누릴 조건을 가진 자만의 자유로울 수 있는 이상 자유주의는 엘리트의 것이며 그의 철학에 들어맞는 이념이었다. 미국은 이런 자에게 퓰리처상을 2번이나 주었고 살기도 오래 살아, 죽기 몇 년 전에는 한국을 손가락질하며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나라’라 말한 적도 있었다.

    리프먼의 이름을 딴 리프먼 콜로키음(Walter Lippmann Colloquium)이 스위스 산골 모임의 시발점이었다. 세계화주의자인 록펠러 재단의 돈을 받은 프랑스의 루지에(Louis Rougier)와 스위스 국제관계대학원 설립자 랍파드(William Rappard)가 만든 모임으로 이들은 하이에크를 비롯하여 미제즈 같은 이들을 재단 밑으로 끌어들였다. 목적은 오로지 자유시장경제의 선전이었다. 콜로키움을 협회로 바꾸려고 시도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결국 1947년에야 세운 것이 바로 몽 펠러랑 협회(Mont Pèlerin Society)인 것이다. 콜로키움의 26 멤버 중 협회원은 16명이었으며 돈은 스위스 신용금고(Credit Suisse)가 댔다.

    모임 주도자였던 랍파드의 역할을 차지한 이는 하이에크였다. 오스트리아와 런던을 오가며 강의하던 1930년대부터 파리의 국제상공회의소 기업인들과 어울렸다. 이들은 자유무역과 타국의 천연자원을 직접 다루기를 바랐고 무역규제와 환율관리 철폐를 외쳤다. 그는 런던정경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s)을 무대로 시장경제를 선전했고 제네바의 국제문제 고위과정연구소(IUHEI: Institut universitaire des hautes études internationales)에서 특강을 하며 전쟁 중에는 피신 온 사람들을 도와주며 멤버를 물색했다. 새로운 멤버로는 아롱(Raymond Aron)이나 포퍼(Karl Popper)같이 주로 고향을 잃은 지식인으로서 타국에 문 좀 열어달라는 습관이 몸에 밴 이들이었다. 하이에크는 학자라기보다는 전술가였다. 리프먼의 엘리트주의와 대중심리 조작술을 베워, 말과 행동이 드러나 곧바로 공격받을 수 있는 기업이나 은행이 아닌 점잖고 존경받는 학자들의 정기모임을 통해 세력을 넓혔다. 멤버는 영국과 미국의 소수 엘리트 모임의 관습에 따라 개별적으로 접촉했고 사무실 없이 장소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정기모임만 개최했다. 즉 유럽의 엘리트 비밀결사처럼 행동했다. 대다수 멤버들이 경제보다는 국제관계에 집중했으며 한시적인 사무실도 항상 국제기구 옆에 두었다.

    경제학자로 출발했든 아니든 협회 구성원의 대다수는 정계에 입문하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자문위원 정도의 과정을 걷는 것이 당연한 코스였다. 공부보다는 정치에 관심이 많아 폴리페서로서 자국 정부의 싱크탱크로 활동했다. 런던정경대학, IUHEI, 그리고 미국의 시카고대학은 이들의 놀이터였고 런던의 경제문제연구소,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 등을 세워 신자유주의 인사와 정부를 지원했다. 1947년부터 1990년까지 노벨상을 받은 멤버만 6명이었는데 르바롱(Frédéric Lebaron)의 지적처럼 노벨경제학상이란 것이 결국 정치적인 판단에 따른 국제사기라는 것이 공공연하게 알려진 비밀이라면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무척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영국, 미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 칠레의 정계를 서서히 장악해 나갔다. 로빈(Corey Robin)에 따르면 독재자 피노체트 쿠데타를 칭송하여 칠레에서 협회모임을 가지도록 결정할 정도로 하이에크는 독재 엘리트로서의 습성을 드러내었다. 미국정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칠레에 달려간 사람은 그의 제자이자 동료인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었다.

    출처: 플리커 Pau Llop(CC BY-NC-SA)

    칠레를 포함, 1970년대 중반 이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다. 국가주도의 경제로 30년의 풍요를 누렸던 서구경제에 먹구름이 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업의 이익을 남겨주면서 중산층과 서민이 먹고 살아가기에 매우 힘든 시대가 되어서 노동단체들이 나서서 기업의 이익을 줄여 중산층과 서민의 이익을 얻고자 했으나 일이 거꾸로 진행되었다. 경제인이 정치인을 조종하기 시작했으며 중산층과 서민의 이익이 침해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기업인을 고위공무원으로 특채하고 돈벌이를 20세기 후반 종교로 만들어 세계에 퍼뜨렸다. 잘 사냐 못 사냐의 문제가 전 세계 시민의 뇌구조를 장악했다. 국민들은 매해 GNP 세뇌공작에 시달렸으며 외교에 문제가 있다면서 내부의 비밀외교를 강화했고, 체제가 무너질 위험이 있다고 변명하면서 내부의 비밀체제를 공고히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영국의 대처, 미국의 레이건 신자유주의 정부였다.

    이처럼 신자유주의는 이념도, 아이디어도 아니었다. 자유, 자유시장, 시장경제, 민영화는 단지 엘리트들이 세계경제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방재청(FEMA)의 초대위원장이었던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1980년 전후 경제성장이 한계에 왔으니 민주주의는 더 이상 필요 없다면서 소수중앙집권정부를 세우자고 했다. 1992년 탈보트(Strobe Talbott)라는 브루킹스 연구소장은 “국가주권이 뭐 대단한 거라고…. 그거 다음 세기에는 쓸데없는 것이 될 거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2013년 J. P. 모건(Morgan)은 유럽에 독재정권이 들어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이는 기업독재정권을 말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신자유주의 정부는 1980년대 겉으로는 정치엘리트 정부인 양 했지만 실은 금융, 기업 엘리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2000년대 국민으로부터 독립한 하나의 독재국가로 다시 탄생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다시금 옳았다. 자유는 뻥이었다.

    2014년 4월 세월호의 비극을 앞에 두고 한국의 신자유주의 정부는 국민에게 행해왔던 무관심의 진실을 드러내었다. 해경은 움직이지 않았고 정부는 무덤덤했다. 아이들은 수장되었다. 사고지점에서 5분 거리인 진도 국립국악원이 유족들에게 먹고 잘 장소를 제공하려 했으나 정부가 이를 거절했고 고위공무원, 구조당국과 공영방송사 직원들이 내려와 이 호텔 같은 곳에서 먹고 잤으며 그 사이 유족들은 20분 거리에 위치한 실내체육관에 모여 설사와 질병에 시달렸다고 뉴스는 전하고 있다. 국가자산은 정부구성원들의 독립자산이지 국민의 자산이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진 21세기 초의 모습이다. 정부가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꼴이 저 지경이니 우리 디자이너들이 조달청 나라장터를 기웃거리는 사이, 뒤에서 벌어지는 대기업 엘리트의 대정부 조작행태는 오죽할 것인가. 정말 웃기지도 않는 시절이다.

    출처: 플리커 Jens-Olaf Walter(CC BY-NC)
    신항식
    현재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겸 SSBC 연구소장.
    저서로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시각영상 기호학〉, 〈디자인 이해의 기초이론〉 등이 있고, 〈재현의 논리와 미학의 재구성〉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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