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말과 90년대 난 프랑스에서 주로 공부했지만, 영국과 독일 대학도 다녔다. 난 석사학위를 복수 전공했다. 즉 석사 논문이 두 개다. 세부전공은 기호학과 한자 타이포그래피였다. 난 또한 프랑스의 DEA(심층연구학위)라는 박사과정 학위를 두 개 가지고 있다. 하나는 서양사, 다른 하나는 동양 사회학이다. 세부전공은 이미지 커뮤니케이션과 광고였다. 학교도 파리대학과 CNRS라 부르는 프랑스 국립과학 연구원에 걸쳐 있었다. 프랑스, 영국, 독일, 언어학, 기호학, 타이포그래피, 서양사, 동양사, 이미지, 커뮤니케이션, 광고가 나의 대학 및 연구원 공부의 여정이었고 그 어느 하나 상호 연관성 없는 내용이었다.
내가 취득한 DEA는 석사 졸업 후, 1년이나 혹은 보통 2년을 연장하여 100쪽짜리 논문을 제출, 심사를 통과하고 받는 학위이다. 300쪽으로 논문의 쪽수를 넓혀 3년이나 5년 이내에 학술학위를 받을 수 있다. 박사과정 졸업시험에 논문심사까지 포함한 학위라서 한국이나 러시아,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절차를 지킨 전문학위이다. 프랑스의 입장에서 보면 이 학위는 박사 최종학위도 학술학위도 아니다. 그러나 그건 프랑스 입장이고, 공부하는 사람은 나였다. 나로서는 자유롭게 동서양 전공 학위를 오가며 공부했고 오히려 유학생들의 학술학위를 수정, 윤문 보면서 유학 생활비를 벌었다. 그때는 그들을 두고 “외국어 하나 못하면서 무슨 박사학위를 받느냐”고 조롱을 했다. 지금은 내가 조롱을 받는다. 조금 더 읽어 보시라.
한국이나 일본도 그랬지만, 유럽과 미국에서도 교수는 학위와 상관이 없었다. 학계에서 초빙하면 교수가 되었다. 그만큼 학계 경계가 좁았고 학자들 스스로 믿음이 컸다. 교수는 직업이 아니라 선비였다. 그러나 교수가 일종의 직업으로 변해가면서 박사학위에 대한 요구도 서서히 커졌다. 이를 대학의 ‘근대화’라 불렀다. 근대화에 맞춘다 해도 프랑스, 독일, 러시아 같은 유럽국가에서는 박사학위와 교수와의 간격을 수직적으로 멀리 떨어뜨려 놓았었다. 박사학위 후에도 교수자격심사가 또 있었다. 박사학위도 실은 교수자격증에 비하면 늘 경계선에 머물렀던 학위였던 것이다. 학문이란 그렇게 길게 가는 것이라는 뜻 일게다. 수평적으로 보면 유럽연합이 만들어지기 이전, 나라마다 학위체계가 달랐지만 에라스무스 프로그램 같은 학점교류, 장학체계를 통해 학문을 개방화시켰고 학생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국가와 학문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공부할 수 있게 했다. 국가와 학위에 얽매어 개인의 연구범위가 정체되는 현상을 막았던 것이다. “공부만 열심히 해보라”는 제도였다.
이랬던 유럽의 자유로운 학문풍토가 자멸하기 시작한 때는 1993년 유럽공동체(EC)가 생기면서부터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자유를 소망하며 만든 유럽연합에서 오히려 학문적 자유가 퇴보했다고? 이상할 것 없다. 다양성이 사라지면 자유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을 강력하게 원했던 국가는 독일,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이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언론인 에반스 프리차드(A. Evans-Pritchard, The Telegraph, 2000년 9월 19일 자)가 파헤쳤듯이, 유럽연합은 1950년대부터 미국 월 스트리트와 CIA의 플랜에 따라 움직였던 역사이다. 유럽의 정치인들은 유럽을 미국과 통합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일원화 계획에 들어갔다. 이들을 유로 페더럴리스트(Euro-Federalist)라고 한다. “유럽국가들은 몸집이 작아서 안 돼요. 국가가 존재하는 한 평화는 없습니다. 뭉칩시다”(J. Monnet, 1943년 8월 5일 연설)라며 전쟁 중에 이미 유럽연합체를 구상했고, 루스벨트와 트루먼 대통령은 ‘마살 플랜’이라는 유럽통합관리 프로그램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정부, 의회, 대기업, 대학 등 유럽의 주요 공기관을 미국의 연줄에 묶기 시작했다. 전후 유력 대통령 후보였던 아이젠하워는 “유럽정부가 룩셈부르크에 모두 모여 유럽 헌법을 제정하면 참 좋겠다”(1951년 10월 25일 연설)며 통합의 밧줄을 당겼다. 대다수 미국 대통령들이 유럽공동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클린턴은 “EU에 터키도 들어왔으면 한다”(1999년 11월 15일 연설)며 유럽을 확장토록 유도했고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미국의 유럽확장 계획과 유럽-미국 연합체(Transatlantic Trade and Investment Partnership: TTIP) 구상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현재 독일과 프랑스 국회의원 50% 이상은 유로 페더럴리스트들이다. 쉽게 말해서 미국 월 스트리트와 CIA의 봉사자들이다.
이들은 미국의 보수재단과 함께 유럽대학을 미국식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1950년대 당시 돈으로 수억 달러를 독일 및 프랑스 대학과 연구소에 투여했다. 프랑스의 한 대학에만 450만 달러를 쏟아 붓기도 했다. 그렇게 프랑스의 명문 EHESS, 영국의 London 경제대학, 독일의 Deutsche Hochschule für Politik이 만들어졌다. 미국대학은 석사든 박사든 코스워크를 중요시한다. 전공의 실용성도 그렇지만 성적을 일원화하는데 필요한 방법이다. 반면 학술성을 지닌 논문은 약하다. 30쪽짜리 인문사회 박사논문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논문에 투여할 시간을 전공과목 리포팅에 쏟아 넣는다. 그렇게 리포팅한 것을 모아 석, 박사 논문으로 제출하거나 논문이 아예 없어도 학위를 주는 대학도 있다. 학부강의의 많은 부분을 대학원 선배가 하거나 학부 4학년 학생이 1학년 교양과목을 맡는 경우도 있다. 교수는 ‘연구활동’이라는 미명하에 대학원생들을 산학협력 돈벌이에 이용하며, 수업은 아예 내동댕이치기 일쑤다. 그러니 연구교수와 강의전담교수라는 희한한 고육지책까지 만들어 냈다. 연구전담교수를 돈벌이에 집중시키고 강의전담교수에게는 강의를 통해 입학생 서비스관리를 맡긴다. 연구전담교수는 연구비를 많이 받은 논문에 이름을 적어 넣느라 정신이 없다. 논문저자이름이 10명이 넘는 논문도 수두룩하다. 강의전담교수는 논문보다는 학생소비자만족에 치중하였고 결국 대학은 학생들로 하여금 교수의 강의평가를 하도록 하는 인류사 최초의 짓을 저질렀다. 대학교육, 행정, 실적, 재정을 모두 양적 평가 위주로 재편했다.
미국 대학생들은 또 어떤가? 유럽이나 아시아 대학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지만 그럴 여유도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도서관에 가면 전 세계 학문자료가 가득하지만, 전공수업 자료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타 대학과의 교차수강도 잘 하지 않으며 학문의 저변을 넓히는 대학생활을 바보짓이라 믿는다. 학위를 취득하면 바로 자국으로 돌아가 버리는 한국, 중국, 인도유학생들처럼 행동한다. 자기 전공이 아니면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가장 유효하게 학점과 학위를 받는 지름길만을 찾아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려 한다. 그러하니 석사, 박사를 받아도 학문의 깊이를 전혀 찾아보기 어려운 기능적 인간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를 전문가(Expert)라 한다. 예전에는 폭넓은 교양이나 전공지식의 인문사회학적 깊이가 없는 전문가는 대학교수가 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전문가가 아니면 교수가 될 수 없을 정도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 같은 반 학문적인 미국의 대학풍토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서부 유럽을 잠식했다. 통치를 위해서 화폐와 언어, 도량형과 노동제도가 일원화되어야 하듯이, 유럽연합(EU)을 탄생시킨 2009년 리스본 조약에 맞추어 유럽 각국은 어찌 되었든지 미국대학에 상응하는 대학의 일원화 규정을 법으로 만들어 내어야 했다. 옛날의 프랑스는 Doctorat d’Etat(국가박사 학위)만을 영국이나 미국의 Ph. D와 동일한 것이라 규정하고, Doctorat Universitaire(대학박사), Diplome de 3eme cycle(박사과정 졸업학위)이나 DEA 학위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 있었다. 각국의 대학이 알아서 판단하라 했다. 그러나 1984년 이후부터 국가박사 학위를 점차 하향 평균화시키면서 2008년부터 자국의 박사과정 학위 전체를 정리했다. 1990년 초 서방세계의 학위제도를 허둥지둥 따라가던 중국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Doctorat 학위는 모두 Ph. D로 상응토록 바꾸었고 나머지는 박사명칭을 붙이지 않는 것으로 했다. DEA 학위를 두 개나 가진 나는 2008년부터 더 이상 박사가 아닌 것이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교수들로부터 “CNRS 출신이 그까짓 200쪽 더 쓰면 확실히 통할 것을 쓸데없는 학위를 2개나 받는 바보짓을 했다.”는 우정 어린 조롱도 받았다. 파리대학 교수인 친구는 “어서 와! 내가 학위 줄께”라며 농담 반 진담 반이다. 그저 웃을 수밖에 없는 세계화다.
프랑스는 독일과 비슷하게 이미 30여 년 전부터 Habilitation이 없어도 정교수를 할 수 있도록 교수의 저변을 확대했다. 박사학위 취득을 쉽게 했다. 국립대학을 법인화시키려 했고 등록금을 올렸으며 대학교수들을 미국처럼 비정규화 시키기 시작했다. 대학 당국은 교수로 하여금 책보다는 논문을 쓰도록 유도했고 그것도 꼭 영어로 써 주길 바랐다. 2012년 독일과 프랑스 대학교수의 총 영어논문은 게재논문 수의 평균 60%가 넘는다. 기업 출신 교수들이 집단으로 대학으로 들어왔으며 학생모집난에 ‘영어 필수’ 항목이 추가됐다. 미국처럼 유학생 유치에 열을 올렸다. 이렇게 해서 인문학의 깊은 전통을 가졌던 프랑스와 독일의 대학은 자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학자가 대학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세계 경제, 외교, 유럽통합, 에콜로지, 석유고갈 및 온난화, 미디어 컨트롤, 현대 서양사 등 알짜배기 학술대회는 주로 언론인이나 작가들이 개최하고 있다. 사회현안을 다루는 TV 뉴스의 패널로 대학교수가 극히 드물게 등장하는 반면 정부 홍보성 뉴스에는 빠짐없이 등장하여 헛소리하다 들어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러시아는 미국이나 유럽대학의 규정을 따르지 않고 있다. 박사졸업학위(‘Candidate’라 불리는) 취득 후 박사 최종학위까지 갈 길이 무엇보다 멀다. 프랑스나 한국, 미국처럼 박사학위를 남발하지도 않는다. 한국대학은 처음부터 미국을 따랐다. 변화를 강요당하는 유럽대학의 고민도 없었고 변화에 저항하는 러시아의 당당함도 없었다. 미국의 눈으로만 석, 박사 학위 체계를 이해했으며 귀동냥으로 들은 유럽 학위나 일단 닥터(Doctor)라고만 찍혀 있으면 그것만 박사인 줄 알았다. 유명대학일수록 미국의 기준을 따르며 한국과 타국의 학위를 비난하면서 경쟁의식과 피해의식에 짓눌려 살았다. 학위 내용을 떳떳하게 밝힌 나 또한 잠시 학위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하니 명칭만 그럴듯하게 찍힌 가짜 미국박사 학위도 맞추어 춤을 추었던 것이다. 한국 대학교수들에게 남의 학위는 타블로의 스탠포드였다. 그래도 부족하면 “미국은 등록금이 많고 유럽은 적으니 미국대학이 더 낫다”며 씩씩거렸다. 근래 미국대학의 비참한 처지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보니 말을 좀 삼가고 있을 뿐이다.
유럽과 미국의 대학상황이 확실히 정리된 것 같으니 이제 한국의 미술 및 디자인 대학으로 돌아와 보자. 한국의 미술, 디자인 대학에서는 박사가 필요 없었다. 고등교육법 시행령이 하도 자주 바뀌니 지금은 삭제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국전에서 대상을 받거나 그에 상응하는 전시 및 활동업적을 가진 미술가, 디자이너는 인문사회 및 공학, 자연계 ‘박사에 준한다’ 하여 창작에 충실토록 했다. 행여, 미술, 디자인하다가 연관학문에 끌리면 거기서 공부를 하거나 박사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통이 20여 년 전부터 눈에 띄게 깨졌다. 미국과 같이 학위를 일원화(BS/BA, MS/MA, Ph.D.)시켜 미술, 디자인에도 박사과정을 개설했다. 무수한 미술, 디자인 박사들이 양산되었다.
지난 15년여 동안 직, 간접적으로 내 손을 거쳐 간 미술, 디자인학 박사만 300명에 이른다. 일 년에 평균 20명의 박사를 지도하고 윤문하고 수정해주었다는 소리다. 매해 등에 담이 올 정도이니 이게 말이 되는가. 그래도 좋다 치고 그들의 작품이 좋아졌나, 보는 눈이 깊어졌나, 미술과 디자인의 인문사회, 자연 과학적 교양이 넓어졌나를 따져보면 전혀 아니올시다. 미안하지만 나의 제자들이 주고 간 논문을 나는 자주 커피 받침으로 쓴다. 박사학위는 미술, 디자인의 깊이와 넓이하고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인문사회 계열박사도 실은 마찬가지이다. 지적 깊이하고 상관없다. 책과 볼펜으로 뼈를 깎는 박사학위의 기억은 이제 자취조차 없다. 성격 부리는 지도교수와 심사위원의 입맛을 맞추는 ‘인생공부’가 박사학위일 뿐이다. 무수히 양산되는 박사들 틈에 끼어서 학자로서 가능성이 보이는 제자들까지 당하지 말아야 할 고통마저 당하는 꼴을 나는 매년 보며 살고 있다. 나를 포함해서 교수나 제자나 대학이나 모두 국가가 자행한 세계화의 모방행위와 경쟁논리의 희생양일 뿐이다.
그럼 앞으로 어찌하나. 조금 급히 결론을 내린다면 유럽과 한국대학이 미국의 실용주의 네트워크에 걸려 꼼짝을 못하는 현 상황에서 미술, 디자인 전공자들은 전략을 세워야 한다. 법적으로 학위가 교수자격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일원화된 이 세계 어디든 교수를 하고 싶으면 박사학위를 꼭 해야 한다. 서울대 박사니 하버드 박사니 하며 박사마저 위계를 따지는 이들이나, 한국에서 박사를 했어도 앵글로색슨 국가에서 석사나 청강이라도 해야 인정을 하려는 대학이사들도 아직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구체제 대학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노예의 버릇일 뿐이다. 곧 사라져갈 구태이다. 세계적으로 국가 학위 간의 위계와 학문과의 상관관계는 이미 사라졌다. 어떤 대학이든 한국 박사 학위만으로도 충분히 한국, 유럽과 미국, 아시아에 진출할 수 있다. 학위가 필요하다면 외국에서 고생하지 말고 한국에서 해도 좋다는 소리다. 어차피 일원화된 형식이라고 다들 알고 있으니 말이다.
단, 명심할 것은 따로 있다. 재미있는 주제에 매달리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주제를 끌고 나가 학위를 빨리 받으라는 것이다. 문제는 학위 이후의 학문생활이니까 말이다. 무너진 것은 대학이지, 학문이 아니다. 아울러 영어나 중국어 같은 도구 언어의 독해와 작문 실력을 틈틈이 쌓아 미래를 대비해야 할 것이다. 미술과 디자인을 보는 시각과 지식의 폭은 학위가 아니라 학문의 꾸준한 정진에서 온다는 지당한 사실을 되새겨야 하는 이 시대가 매우 가슴 아프다. A. Einstein이 그랬다. “세상 살기 참 어렵다. 세상을 어렵게 만든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그냥 멀뚱멀뚱 바라보는 사람들 때문이다”라고. 동감이다. 세계화의 대학제도에 노예처럼 질질 끌려가면서도 그것이 일방적인 폭력인 줄도 모르며 살아가는 한국대학재단을 과연 언제까지 지켜보며 발만 동동 굴려야 하는 지 말이다.
신항식
현재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겸 SSBC 연구소장.
저서로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시각영상 기호학〉, 〈디자인 이해의 기초이론〉 등이 있고, 〈재현의 논리와 미학의 재구성〉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