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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항식의 Designology #14 먼 디자인, 이웃 디자인

    ‘이웃사촌 디자인’이 필요한 시대 ― 기호학자 신항식의 디자인-학(design-ology) 강의


    글. 신항식

    발행일. 2015년 01월 09일

    신항식의 Designology #14 먼 디자인, 이웃 디자인

    회식자리 같은 곳에 가서 어디 앉을까 혹은 누구 옆에 앉을까를 고민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사람들과의 거리를 살핀 적이 있을 것이고 책상에 앉아 쓸 물건들을 멀리 두거나 가까이 두며 정리해 본 적도 있을 것이다. 사람을 직접 만날까, 전화를 할까, 문자를 할까 아니면 편지를 쓸까 고민해 본 적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나(사람)를 중심으로 대상과의 거리를 재어 보는 일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다. 상대를 두고 거리를 재는 일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민감하고도 무의식적인 일인 동시에 또한 디자인에 있어서는 매우 심오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누구도 이를 꺼내 들어 말하지 않는 편인데 아마 이미 지나치게 디자인에 안착하여서 꺼내고 말고 할 것이 없다고 느껴서 일 것이다. 그러나 디자인을 하나의 학으로 취급한다면 꼭 꺼내어 다루어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신이 처한 문화 속에서만 당신의 행동이 상식적으로 보일 뿐이다. –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오래된 연구 중에는 거리와 공간에 관한 이론(proxemics)이 있다. 사람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면 친밀관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서부 유럽의 경우, 15~45cm를 두고 서로 붙어있는 사람들은 매우 친밀하다고 한다. 이들을 바라보는 이에게도 그렇게 보인다는 기호학적 사실이 또한 중요한데 이를테면 포옹, 속삭임, 피부접촉을 연상시킬 수 있다. 더 나아가, 얼굴을 맞대고 싸우면 당시에는 싸움이었다 해도 두 사람을 지켜보았던 이들은 나중에라도 묘한 상상을 할 수 있다. 둘 사이의 거리가 45~120cm 정도가 되면 가족과 친구일 경우가 많을뿐더러 남들도 그렇게 볼 수 있다. 식탁의 폭이 보통 100cm 이내인데 둘이서 문서계약 중이라 할지라도 식탁에 둘이 앉아 있는 이상 타인이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막을 수 없다. 이래서 서구에서는 아무하고나 식당에 가는 것이 아니다. 둘 사이의 거리가 120cm~350cm가 되면 얼굴은 알지만, 사람은 잘 모르는 관계로 보인다. 동네의 식당배달부가 그릇을 놓고 가져가는 거리이며, 선생님에게 불려간 학생의 거리이며, 동료와 같이 일할 때 서로 쳐다보는 거리이다. 리무진의 운전석과 뒤 자석 간의 거리이다. 사내 연애가 불편하다면 둘 사이에 120cm 이상의 거리는 지켜주어야 비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350~750cm가 되면 면접, 강의, 연설과 같은 안면 무시의 관계가 된다. 취업 지원자와 면접관과의 거리가 보통 300cm는 된다.

    세계 각 지역에 따라 거리의 기준치가 서로 다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리와 공간에는 이미 인간의 감성이 녹아들어 가 있다는 보편적인 사실을 거부할 수는 없다. 거리와 공간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심리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상력을 발휘한다. 이런 이유로 거리와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인 사실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 기호학적 상징성을 담는 디자인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파리의 경우 행정구역의 중앙에 대형 건물이나 동상이 서 있다. 샹젤리제의 개선문이 대표적인데 그것을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으로 도로들이 뻗어 나간다. 민의를 중앙정부 한 곳으로 수렴하고 수렴된 권력이 힘을 곳곳에 행사한다는 중앙집권제 공화국의 디자인이다. 이탈리아 피렌체나 밀라노의 도로는 반대이다. 길거리가 격자 모양으로 네트워크화되어 있을 뿐 중앙공간이 따로 없다. 작은 공간이 도시 곳곳에 있지만, 도로를 수렴하지 않는다. 민의가 여러 곳에서 발휘된다는 뜻이다. 전자미디어 이전 시절의 이런 도시공간은 이탈리아 지역분권제의 오랜 자치국의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다.

    [좌] 사회적 거리(출처 바로 가기) [우] 홀의 근접성 다이어그램(1966년), Hall Edward T.(1966), The Hidden Dimension, London: Anchor Books(출처 바로 가기)
    [좌] 구글 어스,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선 모양으로 뻗어 나간 프랑스의 도로(출처 바로 가기) [우] 구글 어스, 길거리가 격자 모양으로 네트워크화되어 있는 이탈리아의 도로(출처 바로 가기)

    종류가 다른 몇 가지 사례를 더 발췌해보자. 축제, 지역 행사 같은 집단참여의 목적이 아니라면 대형건축물은 안면 무시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작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과는 다르게 거대한 고딕성당은 기독교가 헌신과 공감이 아니라 하나의 강제사항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딕성당 건물의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의 벽화, 유리화, 장미창에 그려진 그림조차 가까이 가서 볼 수가 없다. 멀리 위에서 강요하고 명령한다. 민주주의 시대 이전의 왕궁과 성들이 또한 그러하며 뉴욕의 마천루가 그러하며 스탈린 시대의 건축이 그러하다. 먼 거리에 있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가 먼 종교, 자본, 정치의 권력거리에 종속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런 건축은 무서워서 따라가거나 어릴 적부터 눈을 세뇌해 자연스러운 억압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자발적으로 공감할 수 있고 친밀한 디자인이 아니다.

    한국의 경우, 일제의 총독관저이자 미 군정 본부였던 경무대를 해방 한국의 대통령 관저로 사용했다. 말로는 민주공화국을 내세웠지만, 공간에 대한 무의식은 그렇지 않다. 현재의 청와대도 시민에게 군림하는 권력거리를 가졌는데 보통의 한국 관공서 대다수가 이와 비슷하다. 작은 지방도시의 시청마저 도시의 언덕이나 널찍한 운동장 같은 공간에 세워놓았으며 교통을 통제하고 주택가와의 거리를 늘려 시민과 관계를 끊었다. 매우 반민주적인 공간문화이다. 민의를 대변한다는 의회도 그렇다. 여의도 중앙에 또 다른 하나의 섬으로 존재한다. 멀리서 지시하고 위에서 군림한다. 내부시설과 인테리어도 건물의 외부만큼이나 마찬가지로 먼 거리로 디자인되어 있다. 시장실, 의원실, 핵심부서는 건물 깊게 박혀 있다. 실내로 들어가도 문과 탁상의 거리가 멀다. 시민은 가까이 다가서지 말라는 것이다. 크기와 거리, 공간의 모든 면에서 시민과 친근한 이웃거리를 가진 서유럽의 관공서와 비교된다. 이들 대다수는 주택가에 있으며 다른 주택과 구분도 잘되지 않는다. 하물며 절대왕정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와 파리의 관공서도 그런 편이다. 실내 디자인도 이웃거리를 중심으로 되어있다. 이렇듯 문화는 거리와 공간에서 이미 자신을 드러낸다. 사를르 푸리에가 말했듯이 말은 거짓을 감추지만, 디자인은 마치 얼굴 표정과 같아서 거짓을 감출 수 없다.

    이제 길거리로 나가보자. 신호등을 잘 지키면 교통이 원활할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신호등은 원래 행인과 차량이 교통을 위해 참고하는 디자인이다.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다. 차도 없는데 붉은색 신호라 해서 건너지 않을 이유가 없다. 시민 스스로 차량의 흐름을 파악하여 길을 건너고 차를 움직이는 참여정신이 신호등과 더불어 교통을 원활하게 한다. 파리, 피렌체, 쾰른, 오슬로, 제네바, 밀라노 등 행인의 ‘눈에 가까이 보이는’ 신호등 체제는 시민을 참여시킨다. 그래서 교통이 원활하고 사고가 적다. 반면 ‘멀리서 보아야’ 하는 디자인으로서 서울, 싱가포르, 도쿄의 신호등은 교통순환이라기보다 무엇보다 법적 처벌을 위한 것이다. 시민은 차가 오지 않아도 붉은색 신호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길을 건너지 않는다. 이들 도시는 신호등의 존재가 얼마나 교통체증을 높이고 낮추는지에 관한 실험을 해 본 적도 없다. 서구에서 배워와 시민에게 그냥 강제한 것이다. 그러하니 신호등이 주로 도로의 꼭대기에 있다. 도로를 널찍하게 만들거나 차선을 넓히려고만 한다. 도로를 넓히니 신호등이 높게 올라갈 수밖에 없다. 신호등이 높게 올라가니 차량과 행인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된다. 그러니 작은 실수에도 큰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고 공무원은 벌금 내력에 관심을 두고 사고자는 보험료에만 신경을 쓰는 반사회적 교통문화가 자라나는 것이다. 중앙통제시스템이 교통행정의 전부인 양하는 규범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도로 디자인의 사고가 거기밖에는 미치지 못해서 그렇다. 영국에 연수를 와서 런던도로의 중앙통제시스템이 서울의 그것만 못하다고 혀를 끌끌 찼던 서울시 공무원을 오히려 불쌍하게 바라보았던 런던 경시청의 관계자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공무시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서울, 도쿄, 뉴욕 등 대도시의 네온사인이나 길거리 옥외광고, 간판 등도 안면 무시의 관계를 지향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보라.’는 것이다. 뉴욕과 일본의 대도시를 뒤덮은 옥외광고는 강요하고 명령하고 사람을 내리깔아 본다. 참여를 유도하지 않고 종속시키려는 디자인이기 때문에 시민과 항상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다. 제품과 서비스, 브랜드와 권위를 우르르 따라다니는 서울, 도쿄, 뉴욕의 시민 정신이 여기서 상호작용을 한다. 반면 파리나 피렌체, 쾰른, 오슬로의 대다수 옥외 간판과 광고는 강제하지 않고 ‘보고 싶으면 와서 보라.’고 유도한다. 간판이 비교적 작고, 길거리 옆에 세워져 있으며 눈높이도 낮다. 광고홍보의 전략을 통해 본다면 전자는 공격적이고 후자는 수동적이다. 전자는 강제적이고 후자는 친밀하다. 전자는 권위와 유행에 민감하고 후자는 개인과 개성에 민감하다. 정치적 권위와 유행의 산실인 파리에는 권위와 유행이란 것이 없다. 권위와 유행을 따르면 권위와 유행을 만들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좌] 파리의 운전자 신호등(출처 바로 가기) [우] 서울의 운전자 신호등(출처 바로 가기)
    [좌] 스웨덴의 옥외 광고(출처 바로 가기) [우] 스웨덴 옥외 간판(출처 바로 가기)
    [좌] 서울의 옥외 간판(출처 바로 가기) [우] 일본 대도시의 옥외 광고(출처 바로 가기)

    무형의 디자인도 마찬가지이다. 매스게임 같은 축제행위는 사람을 디자인에 가져다 쓸 뿐만 아니라 그것도 멀리서 지켜보게 하는 비인간적이며 파시즘의 축제 디자인이다. 이런 이유로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는 매스게임이 없다. 북한에 있으며 옛 독일에 있었고 삼성과 같은 재벌의 행사에 있다. 축제를 스펙터클로 만들어서 사람을 오라 해놓고 디자인을 강제하는 무례가 많은데, 이를테면 이전의 것들을 모두 모방하여 사물을 크게 만들어 놓은 디즈니랜드가 이런 무례를 저지른다. 반면, 이전에 본바 없는 것들을 모아다가 작고 평이하게 변형시킨 남이섬은 비교적 인간문화에 충실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같은 테마파크라 하더라도 디즈니랜드는 스펙터클이고 남이섬은 파크 그 자체가 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디즈니랜드를 가보았느냐고 묻는 반면, 남이섬에는 놀러 가자고 한다. 전자는 남의 먼 것이고 후자는 자기의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참여를 유도하는 축제 디자인은 인간의 공간과 문맥에 충실한 것이다.

    영상 미디어도 그렇다. 문자 메시지는 내용 이외에 이모티콘을 통해 감성을 주고받지만, TV의 메시지는 가깝거나 멀게 재어지는 사물의 거리를 통해서 감성을 주고받는다. TV 광고의 경우, 제품이 화면 앞으로 포착되거나 멀어져 갈 때 메시지의 감성이 다르다. 화자가 화면으로 다가올 때와 멀어져 갈 때도 그렇다. 클로즈업된 사람이나 제품은 친밀하거나 은밀한 메시지를 전하며 멀어져 갈 때는 객관적인 메시지를 전하게 된다. 이를 잘못 활용하면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신상품이나 스타라고 함부로 클로즈업하면 시청자의 기분이 상할 수 있다. 광고주제에 무슨 감정표현이 저리 지나친가 하고 말이다. 드라마도 클로즈업과 원경의 관계를 통해 감성을 드러낸다. 스토리가 뻔한 드라마이거나 시트콤, 이른바 막장 드라마는 클로즈업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다. 시청자로부터 거리를 재며 메시지를 전하기보다는 주로 캐릭터의 감정표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뻔한 메시지를 가진 불투명한 감정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줄 때 시청자의 뇌는 어떻게 움직일까. 파블로프의 침 흘리는 개 정도의 반사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니 막장 드라마 중독현상도 나타나는 것이다.

    전화는 목소리를 직접 주고받기 때문에 소리가 들릴 수 있는 정도의 거리를 상상케 한다. 그래서 친밀한 내용을 담는다. 문자도 비슷하다. 손으로 만지거나 쥐고 보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친밀성이 크다. 이런 이유로 전화기와 인터페이스 디자인이 오밀조밀하고 친밀한 것이다. 반면, 이 메일은 주택의 우체통처럼 거리가 있다. 화면도 떨어뜨려 보는 종류의 것이다. 최소한 정신적으로 친밀성이 훨씬 떨어지기 때문에 전화만큼의 디자인 작업과 노고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전화, 화상통화, 문자, 이메일 모두 전자기술을 통해 인간의 감수성을 드러내는 만큼 기술은 단순한 기술이라기보다 인간적 소통의 조건에 먼저 얽매인 일종의 정신물이라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좌] 가봤니? 디즈니랜드(출처 바로 가기) [우] 놀러 가자! 남이섬(출처 바로 가기)
    정신적 거리를 가진 전자 미디어(출처 바로 가기)

    사례를 무작위로 선택하여 기술해 보았지만 이런 사례를 통해 보면 디자인의 작업은 그리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린 것을 보는 거리와 공간의 작업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어떻게 그릴까에 대한의 고민은 어떻게 보여줄까에 대한 고민과 같다. 이런 이유로 디자이너는 곧 인간소통의 플래너이기도 한 것이다. 해마다 미주나 유럽을 다녀오지만, 그곳이나 이곳이나 국가 및 정부의 불통 성향이 점점 고착화되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시민사회도 그에 맞추어 따라가니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위에서 강제하고 수용하라 겁박하고 사람을 보지 못하고 시스템만 고려하는 꽉 막힌(blocked) 조직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말이다. 따뜻한 거리, 때로는 명료한 거리를 지닌 이웃사촌 디자인이 더욱더 필요한 시대다.

    신항식 
    현재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겸 SSBC 연구소장.
    저서로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시각영상 기호학〉, 〈디자인 이해의 기초이론〉 등이 있고, 〈재현의 논리와 미학의 재구성〉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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