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나 남미에서 금을 캐 와서 나라에 쌓아 놓으면 부자 되는 줄 알던 시대가 있었다. 소량의 금화만 있어도 국내 물건 어느 것이나 살 수 있고 국제무역도 그렇게 했다. 그렇게 나라 경제는 흘러간다고 생각했던 때가 대서양 정복시대(15세기~18세기)였다. 그러나 국민 골고루 금을 가질 수는 없었고, 바꿀 물건이 없으면 금도 무용지물이었다. 금을 빌려 다시 되갚을 때 금이 꼭 다시 필요하여 사람들을 극히 힘들게 했다. 이래서는 도무지 나라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어려웠다. 몇 개인의 경제는 가능할지 몰라도 나라 전체의 부(富)를 만들어 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아담 스미스와 19세기 산업경제의 시작
이에, “금을 모은다고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많이 만들어 국민이 골고루 쓸 수 있게 해야 부자나라 된다.”라고 주장한 이가 있었다. 사람들이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어 놓고 자유롭게 팔고 사게 하고, 금은 단지 교환 수단으로만 생각하자고 했다. 국가는 교환 수단만 관리하면 될 뿐 사람들이 제품을 만들고 파는 시장에 참견하지 말라고 했다. 그가 1776년의 아담 스미스였으며 유럽 기업인들은 그의 주장에 지지를 보냈다. 그렇게 해서 19세기의 산업경제(19세기~20세기)가 탄생했다.
산업경제는 제품을 시장에 내어놓고 금이 아니라 은행이 보증하는 지폐를 받았다. 지폐는 은행이 가진 금의 양에 맞추어 찍어 낸 증서지만, 금보다 가볍고 교환하기 쉬웠으며 국가가 가치를 확인해 주었다. 무엇보다 금 가격을 조금만 내려도 지폐를 엄청 많이 찍을 수 있어 제품을 대량 생산토록 유도했다. 이에 따라 나라의 부가 증대하고 제품의 양이 많아져 사람들이 두루 쓸 수 있게 되었다. 신종제품도 시장에 우후죽순으로 등장하여 삶이 편리하게 변해 갔다. 구제품이라 해도 기술을 혁신하여 신제품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이랬던 1880년대에 디자인이 탄생했다.
어쭙잖은 사람들은 디자인을 라틴어의 Desinatum(지시하다)에서 왔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Desinatum은 de(to)의 접두어와 sinatum(signature)의 어근으로 만들어진 조합어다. 두 형태소를 합치면 ‘지시하다(designation)’라는 평소의 뜻이 되지만, 더 깊은 뜻은 ‘사인(signature)을 하다(to)’. 오늘날로 보면 ‘브랜드를 만들다(to signature)’가 된다. Brand는 ‘사인하다’라는 뜻이니까 말이다. 산업시대에 들어 제품 생산에 치중하면서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자사의 제품을 ‘기업브랜드’로 주장하기 위하여 브랜드의 기호를 만든 것이 디자인(Design)이다. 금은 소비재가 아니라 디자인할 이유가 특별히 없지만, 제품은 팔고 사고 쓰는 소비재라서 경쟁과 시장에 익숙하다. 따라서 디자인할 이유가 절대적이었다.
산업시대는 대량생산을 위하여 기능성을 강조했다. 디자이너들은 이를 산업디자인으로 흡수했다. 산업에 제품을 맞추어 생산하려면 중시할 것이 기능성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제품, 포장, 공업디자인이 갈라져 나왔다. 한편 산업은 홍보를 위하여 설득적 디자인도 강조했다. 당시에는 선전(announce)이라 했다.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적용되어야 했으므로 제품의 장점을 부각하는 설득성에 집중했다. 편집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사진 및 일러스트레이션이 참여했고 1980년대 전후, 시각과 영상 디자인에 의해 영역이 확장되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설득을 광고, 일러스트, 편집, 시각, 영상디자인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다. 이같이 산업, 제품, 포장 디자인의 기능성과 광고, 시각, 영상 디자인의 설득성은 디자인 철학의 두 축으로 존재한다.
‘기호’ 그 자체의 목적을 지녔던 금융시대 디자인
1990년대 산업시대가 끝나고 금융시대가 밀어닥쳤다. 중상시대처럼 금도 산업시대처럼 제품도 아니었다. 화폐를 축적하여 자산(부동산, 농수산광물 자원, 은행조직, 기업조직, 정부조직 등)을 획득하는 목적을 가졌다. 예전 같으면 금이나 제품을 위해 담보로 잡았을 것을 이제는 그냥 모으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때 사용되는 것이 M&A, 채권, 주식, 각종 유가증권, 협정과 계약서 등이다. 금융시대의 디자인은 제품의 기능도, 홍보의 설득도 아닌 기호(이미지) 그 자체의 목적을 가졌다. 아무 연관 없는 기호를 뒤섞거나 남에게 빌려 온 벤치마킹 이미지, 언제나 변화시킬 수 있는 하이브리드형 이미지, 의미 연결이 안 되는 정크 이미지와 타이포그래피, 만든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콘셉트 등이 금융시대의 디자인을 물들였다. ⊙4U(Eye for you=I for you), ★4♨(별사탕) 같은 표현이 그렇다.
2008년 금융경제는 사기, 정신 분열적인 활동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국민들은 부동산을 잃었고, 실업은 넘쳐났고 양극화가 일반화되었다. 자산을 만들어 줄 것 같았던 화폐가 오히려 자산을 앗아가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을 미국과 유럽의 국민들이 깨닫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시 저축을 늘리고, 금을 사 모으며, 농촌으로 돌아가거나 자영업으로 돌아서고 있다. 금융이나 산업제품과 큰 상관이 없는 사회관계(협동조합)가 만들어지고 있다.
미래의 디자인은 어디로 갈 것인가? 산업은 더 이상 예전처럼 성장하지 않겠지만, 꾸준히 유지는 될 것이다. 반대편으로는 자연과 환경, 인간과 사회를 중시하는 경제가 크게 자라날 것이다. 미래의 디자인도 그 같은 환경에서 스스로를 점검할 것이다.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디자인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항식
현재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겸 SSBC 연구소장.
저서로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시각영상 기호학>, <디자인 이해의 기초이론> 등이 있고,
<재현의 논리와 미학의 재구성>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