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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항식의 Designology #15 디자인의 합리성을 되찾자! – 기호학의 사례

    합리적 디자인은 ‘이유’를 찾고 ‘의미’를 심는다, 마치 기호학처럼 ― 기호학자 신항식의 디자인-학(design-ology) 강의


    글. 신항식

    발행일. 2015년 03월 18일

    신항식의 Designology #15 디자인의 합리성을 되찾자! – 기호학의 사례

    하늘은 땅과 짝을 이루고 남자는 여자와 짝을 이룬다. 위는 아래와 왼편은 오른편과 짝을 이룬다. 세상이 이리 짝지어졌으니 사람들도 이치에 맞추어 세상을 짝지어 생각해온 편이다. 천지신명이니 부부유별이니, 위계질서니 좌파우파니 하면서 말이다. 살다 보면 세상에 대한 욕심이 생겨 편견이나 감정의 골도 아울러 생기기 마련이라서 어느 하나만 억지로 강조했던 때도 있다. 가뭄이 오면 기우제를 지내거나 남편이 죽으면 여인도 따라 죽으라 했다. 상부의 명령만 기다리다 몰살당한 병사들도 있었고 우파가 아니면 빨갱이라 해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세상의 한 면만 보고 살아가는 이들은 편견과 감정에 의해 세뇌되었거나 아니면 월스트리트 투자자들처럼 실제로 뇌가 손상된 자들이다(‘Lesson From the brain-damaged Investor’, Wall Street Journal, USA, 2005년 07월 21일 자).

    세뇌되거나 뇌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상식을 거부한다. 비는 땅에서 만들어져 하늘에서 내린다는 사실, 여자는 남자의 아내이기 이전에 인간이자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실, 전쟁수행은 현장의 병사들이 더 잘 파악한다는 사실, 좌파는 우파가 존재하는 한에서만 만들어진다는 상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판매는 구매 없이 불가능한 것인데도 무조건 판매만 밀어붙였던 투자자들이 실패 후 고통을 겪었지만, 주변의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도 고통을 주었다. 다름(difference)은 존재의 원칙이라서 무시하면 이리 공멸한다.

    생각할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서로 다르다고 하는 하늘과 땅, 남녀는 물리학, 생물학적인 기준에서는 서로 같다. 상하좌우는 방향의 기준에서 볼 때 또한 서로 같다. 재미있게도, 다름의 기준이 같아서 서로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준이 다르면 같은 것도 실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이 같음(identity)을 한자어로 ‘정체성’이라 부른다. 예를 들면, 여자의 생물학적 정체성은 여성이지만 가정의 정체성으로 보면 딸이나 어머니이다. “부자 되세요!”의 표현은 무한경쟁의 정체성을 가진다. 공존의 정체성을 가졌다면 “함께 나눠요!” 했을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표현은 청춘이 지나면 아프지 않다는 뜻이며 나이를 정체성으로 삼았다. 그렇다면 나이 들어도 아픈 이들은 아직도 청춘이 된다. 마약중독은 질환이고 거래는 범죄다. 마약중독자가 갈 곳은 병원이지 감옥이 아니다. 이처럼 어떤 기준에서 같고 다른가를 알아야만 ‘합리적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다름(차별성)과 같음(정체성)을 함께 존중하는 합리적인 철학을 근본으로 했던 근대문화는 이를 무척 자랑해 왔다. 근대의 합리란 과학적이고 공리적인 판단체계(axiom: 증명 불가능하지만, 과학 못지않은 자명성을 지닌 존재 이유. ex. 삼각형, 액체, 흑백, 건강존중, 살인금지 등)이다. 이 체계에 편견이나 감정이 끼어들면 안 된다. 1+1=3일 수 없다. 던져 올린 공은 하늘에 닿지 않는다. 부자의 금융 이자는 가난한 대출자가 갚는다. 밤은 검정으로 표현된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안쪽 사람이 먼저 내려야 한다. 지구가 석유를 만드는 데 수백만 년 걸리기 때문에 다 써버리면 후손에게 쓸 것이 남지 않는다. 결혼한 남자는 가정에 도움이 없다면 가정을 이룰 이유가 없고 단지 씨만 퍼트렸던 포유류일 뿐이다 등등. 근대인은 합리적으로 생각해야만 몽상과 진실을 구분할 수 있었으며 실제로도 몽상을 필터링하고 진실을 찾으려 노력해 왔다.

    지난 30년,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갔다. 현실을 필터링하고 몽상에 빠져 살았다. 마치 뇌 손상을 당한 이들처럼 말과 행동을 비합리적으로 해왔다. 더 나아가 작은 거짓만 밝히려 해도 빨갱이니 사회 부조화니 하며 합리적인 사람들의 입을 닫게 했고, 작은 진실만이라도 이야기하면 왕따시키거나 비난의 가하는 희한한 정신세계를 만들고 경험했다. 공공의 뻔한 사실도 거론하지 못하게 했고 과학적 비판에도 칼을 들이댔다.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음에도 사람들은 자체검열에 열을 올리며 권력 앞에서 벌벌 떨었다. 대학도 비판의 말을 거두고 권력 앞에서 강아지처럼 굴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왕따였던 이들은 다시 세상에 나왔고 진실을 왕따 시켰던 이들이 결국 왕따를 당하고 말았다. 당신이 뽑은 대통령, 당신이 눈과 귀를 막고 따라갔던 주식, 부동산투자, 당신이 선호했던 대기업 회장과 투자자들, 시장의 큰 세력에게 이미 유출된 각종 국가시험을 따라가다가 자신은 정작 92%의 가난뱅이가 되어버렸다. 반면 억만장자 0.6%, 백만장자 8%를 솟구쳐 만들어 주었다(Credit Suisse Global Wealth Report 2012). 그런데도 이것이 정상이라 말하는 가난뱅이들도 아직 대중 미디어와 대학을 수놓고 있다. 그러나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가난뱅이가 8%에 포함될 가능성은 0%다. 자본/자원 배분은 오래전에 끝났으니까 말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99%의 당신은 기껏해야 세계의 부 27.7%를 아귀처럼 다투는 서민으로 남게 되었다. 중산층은 사라졌다.

    지난 30년 동안의 거짓 위선과 억지를 인제 그만 부리자. 92% 가난뱅이에 속한 주제에 8%를 옹호해 왔던 희한한 짓을 그만두자. 현재의 불평등이 비정상이면 비정상이지 무슨 변명이 그리 많았는가. 기왕 이렇게 된 것, 92%를 위한 대안을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시간이 없다. 디자인도 그렇다. 99%가 함께 누리는 디자인을 만들 시간 말이다.

    출처: Suisse Wealth Report, 2012(바로 가기)

    합리성(rationality)이란 서구 부르주아들이 잘못 퍼뜨린 것처럼 ‘개인 이익을 위한 효율적 계산법’이 아니다. 개인의 욕망과 감정을 누르고 사물의 존재와 운동원리를 존중하면서 세상을 만들고 해석하는 일이다. 디자인도 그런 이유로 탄생했고 기호학(semiotics)이란 것도 그렇게 탄생했다. 형상과 배경, 상하좌우, 형태와 색채, 깊고 낮음, 멀고 가까움 등을 합리적으로 배열하고 해석하지 않으면 아예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원래부터의 디자인이고 기호학이었다. 만약 합리의 기준이 없다면, 디자인은 공예, 회화, 조각, 물품같이 불릴 것이고 기호학은 종교, 문학, 예술 등으로 불릴 것이다.

    물론 학생이라 해서 모두 공부만 하지 않는 것처럼, 합리성을 잘 지킨 디자인이 있고 덜 지킨 디자인도 있다. 그에 따라 좋다/나쁘다 주관적인 평가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디자인을 합리적으로 보는 근대사회에서 그런 주관적인 목적과 평가가 통할 수 없다. 디자인이 합리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비합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거기에는 디자인 이외의 다른 목적이 숨겨져 있다. 이를테면, 어떤 CI의 목적이 브랜드 모방이었다면 이는 엉터리 디자인이다. 무어라 달리 부를 이유가 없다. 합리적이지 못한 디자인이 욕먹는다고 앙탈도 억지도 부릴 것 없다. 엉터리면 엉터리고 합리적이면 합리적인 것이다. 아니면 외계인이나 천재의 것이겠지.

    이제 정신 차리고 그동안 잃어버렸던 합리성을 되찾자. 태아였을 때부터 뇌가 거의 자라나는 들짐승은 갓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도 걷고 달리고 사냥을 쉽게 배운다. 인간의 어린 뇌는 짐승들보다 교육수준이 늦다. 체질의 반사작용이 아니라면 태아 속에서 배우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유전이란 것도 대다수 통계 결과를 부풀린 것뿐이다. 즉 핏줄로부터 배우는 것이 별로 없는 반면 인간은 웬만한 것들을 태어나면서부터 배운다. 디자이너가 기초조형을 배우듯이, 가장 기본적인 합리성을 배우면서부터 성인이 되어가는 것이 인간이다. 참으로 풀기 어려운 유아 시절의 정서적 결핍도 실은 합리적인 깨달음 이외의 다른 것으로 고칠 수는 없으니 늙어서도 합리성이란 꼭 필요한 것이다. 합리적으로 다시 생각하자. 여기 현대와 기아라고 하는 자동차 회사의 상징마크가 있다. 이 마크들이 다름과 같음의 변주를 얼마나 합리적으로 구성했는가 설명할 테니 참고하기 바란다.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로고(출처 바로 가기)

    타이포그래피는 그림 밑에 있다. 블루/블루, 레드/레드의 동일 색채를 사용했다. 위아래 두 표현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같은 편이다. 같은 편이 밑에 있으면 도와주는 것이지 억압이 아니다. 즉 타이포그래피가 그림을 부각시킨다. 이런 이유로 HYUNDAI, KIA MOTORS의 타이포그래피보다 그림이 중시되며 그림을 중심으로 읽어야 한다.

    두 그림의 원은 모두 타원이다. 기초조형으로서 원은 선의 꺾임과 지름이 일정하기 때문에 운동성이 없다. 반면 찌부러진 타원은 상하, 좌우 꺾임의 각도가 다르고 지름이 선의 지점마다 다르다. 장축과 단축이 다르니 원주가 운동한다. 반면 현대의 타원은 선의 굵기를 일정하게 함으로써 운동성을 약화시킨다. 기아의 경우 각도가 완만한 상하의 긴 선(우호)은 폭이 넓고 각도가 급한 좌우의 짧은 선(열호)은 폭이 좁다. 원주의 운동에 속도를 추가한다. 마치 길거리 신호등처럼 원을 하나만 만들어서 초록색과 붉은색을 번갈아 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을 일부러 두 개 만들어서 서고 건너는 기능을 추가시킨 경우와 같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타원은 운동성이 약하고 기아의 것은 강하다. 이것이 두 그림에 대한 첫 번째 기호학적 판단이다.

    두 타원 모두 내부(원판)의 형상을 둘러싸고 있다. 원주가 실원으로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 형상은 나갈 구멍도 없다. 이렇게 100% 둘러싼다는 것은 감금한다고 볼 수도 있고, 동그라미로 마킹한다고 볼 수도 있으며 보호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내부형상과 외부의 타원이 동일색채라는 점에서 감금이나 마킹보다는 보호의 의미를 지닌다. 한편 현대의 내부형상이 가진 선의 굵기는 외부의 타원보다 모든 차원에서 불균등하게 굵다. 그리고 작은 운동성을 가진 20도 정도의 사선이다. 즉 보호받는 뚱뚱한 놈이 둔중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즉 현대의 그림은 명료한 운동과 방향을 나타내지도 않고 내부와 외부의 차별성도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기아의 내부형상이 가진 선의 굵기는 모든 차원에서 같다. 타원을 구성하는 상하의 선과 같은 굵기이고 좌우의 선에 비하면 굵다. 또한, 내부형상의 좌우 길이가 상하의 선의 길이와 같다. 즉 기아의 타원이 지닌 속도의 두 가지 차원인 빠름(타원의 급히 꺾인 좌우선)과 완만함(타원의 완만한 상하의 선) 중 완만함을 선택하여 내부의 형상을 배열했다. 내부형상의 각도도 90도로 고정이다. 안정되다. 외부로는 운동성을 강조했고 내부로는 안전을 택한 것이다, 현대의 내부와 외부는 특성이 같아서 무슨 기준을 적용할지 불가지다. 차별성이 없으며 비합리적이다. 반면 기아의 내부와 외부는 내부적으로 속도보다는 안정을 강조하며 외부적으로는 안정보다 속도를 강조하는 의미를 드러낸다. 이것이 이 두 마크에 대한 두 번째 기호학적 판단이다.

    두 마크의 타이포그래피는 모두 견고한 고딕체이다. 즉 수직/수평의 고정비례원칙에 충실하여 자동차가 지닌 안정의 공리를 함께 공유한다. 게다가 수평으로 늘어선 문자의 거리가 수직에 비하여 500% 전후로 더 길다. 안정성을 강화한다. 반면, 현대의 타이포그래피와 그림의 정체성을 보면, HY와 I를 양 끝에 막아두고 UNDA의 모서리를 둥글게 깎았다. 마치 타원과 내부형상의 관계처럼 일단 활자를 양쪽으로 막고 나서 안에서 약간만 움직이게 하는 소심함을 드러낸다. 그림도 소심한 타원/형상운동에 소심한 보호를 표현하는데 타이포그래피도 똑같이 소심한 운동에 소심한 보호를 표현한다. 기아가 보여주는 운동과 안정의 강력한 대비가 현대에는 없다. 이것이 세 번째 기호학적 판단이다.

    네 번째 기호학적 판단은 형상이 가진 실제 의미에 관한 것이다. 타원형 내부의 형상은 HYUNDAI의 이니셜 H를 닮았으나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형상의 두께가 차별성 없이 굵은데다가 사선으로 누워 있는 바람에 그것이 과연 문자인지 알 수 없다. 단지 둔중하게 움직이는 무엇일 뿐이다. 타원 내부의 백색 공간을 보면 불가지론이 더욱 강화된다. 이런 평면도형에서는 파란색이 형상인지 백색의 4개 활꼴이 형상인지 알 수 없다. 형상과 배경의 차별성이 없다. 기아의 경우 내부 형상과 배경이 뚜렷한 동시에 타이포그래피의 KIA와 형태 및 색채가 같다. 따라서 타원 내부에 있는 KIA는 곧 타이포그래피와 같은 것이다. 현대의 마크는 실제 의미를 구현하는 데 실패했고, 기아는 성공했다. 이것이 네 번째 기호학적 판단이다.

    이제 분석하는 동안 편견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 유보해 두었던 판단(자동차 심벌마크)을 다시 꺼내보자. 두 마크는 자동차회사의 것이다. 페라리처럼 속도를 강조하거나 벤츠나 볼보처럼 안전을 강조할 수도 있지만, 자동차라 하는 것은 ‘속도’와 ‘안전’이라는 2가지 특성을 공리로 가지고 있다. 2가지 중 하나만 없어도(약한 것이 아니라) 자동차가 아니기 때문에 공리라 한 것이다. 이에 앞선 4가지 기호학적 판단을 실제 마크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분석결과가 나온다.

    기아의 경우 속도를 외부 타원에 의해 구현했지만, 안전은 내부의 형상을 통해 구현했다. 타원의 속도가 자동차(KIA)의 안전을 보호한다. 타이포그래피를 통하여 안전에 방점을 한 번 더 찍었다는 점에서 안전 속의 속도를 이중적으로 구현했다. 매우 정상적인 자동차 마크이다. 현대의 경우, 타원의 운동과 내부의 소심한 운동, 타이포그래피의 운동이 서로 오버랩 된다. 타이포그래피를 밑으로 내렸다는 것을 제외하면 위아래 모두 안전에 대한 차별성은 없다. 타원은 단지 내부형상을 둘러싼 것뿐이다. 보호할 것도 아니면서 왜 둘러쌌을까? 외부의 타원이나 내부의 형상, 타이포그래피 전체에 걸쳐 속도의 의미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현대 자동차 마크는 기호학적으로 비정상적이다. 속도와 안전이라는 자동차의 공리가 아닌 무언가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자동차의 속도도, 운동도 아니라면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그리고 어떤 합리성을 구현하고자 마크를 만들었을까? 이는 현대 관계자들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합리성의 역사 속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그런데도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나고,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는 데카당스(엇박자) 시대를 지나치고 있다. 그러하니 불만, 불안, 분열증에 시달리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비합리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다. 잘나가는 회사의 그것을 따라 할 수도 있고(벤치마킹), 최근 유행한다는 형태나 색채를 사용할 수도 있으며(감성 커뮤니케이션), 권위 있는 디자이너에게 무조건 맡길 수도(전문가 체제), 어떤 기술적인 프로세스가 있어서 디자인할 수도(공학 프로그램) 있다. 그러나 모방은 좋은 디자인이 아니며, 유행하면 오래갈 수 없다. 소통을 지향하는 디자인계에서 권위는 있을 수 없으며, 공학적 프로그램이란 매우 주관적인 내용을 객관적으로만 보이는 수열로 바꾼 것이다. 이 모두, 돈만 되면 좋은 것이라는 8%의 자본독식자들이 만들어 놓은 비합리적인 지적경향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돈을 향한 편협성만 있지 그들의 디자인 지식 어느 부분에도 합리성은 없다.

    디자인이나 기호학의 공통점은 다르고 같은 이유(reason)를 찾아 존재의 의미(meaning)를 심어주는 합리적인 문화를 가진다는 점이다. 합리적인 디자인은 세상사를 두고 엘리트들처럼 정치(politic & strategy)하지 않는다. 건축을 앞에 놓고 정치를 해보라. 나중에 무너질 것이다. 세상사의 의미는 정치적 협상이나 감성의 대상이 아니다. A는 A이다. 엉터리 디자인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디자인을 모방했다고, 감성적이라고, 유명인 작품이라고, 데이터에 근거했다면서 거짓 용인을 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디자이너라면 과감하게 엉터리라 말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인간의 감성을 말할 수 있고 오늘날의 불만, 불안, 분열의 비합리성으로부터 디자인을 구할 수 있다.

    신항식 
    현재 한양대학교 초빙교수 겸 SSBC 연구소장.
    저서로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 〈시각영상 기호학〉, 〈디자인 이해의 기초이론〉 등이 있고, 〈재현의 논리와 미학의 재구성〉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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