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은 나에게 ‘시민’이라는 단어가 강렬하게 다가온 한해였다. 디자이너와 시민은 왠지 서로 다른 동네에 속한 사람들일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시민에 대한 이해의 전부였던 내가 ‘시민청’ 마스터플랜 작업에 관여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서울신청사의 지하 1~2층 공간에 진행 중이던 ‘시티갤러리 통(通)’이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용도가 달라지면서 프로젝트를 원점으로 되돌려 마스터플랜을 짜기 위한 컨소시엄이 구성되었는데 바프가 기획을 맡게 된 것이다.
작업을 위한 리서치는 당연히 ‘시민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말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광장에서 서울시청으로 이어지는 장소적 특성을 좀 더 이해하고자 시민은 누구이며, 시민은 왜 기쁜 일에나 슬픈 일에나 서울광장으로 모여드는가를 질문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 대한민국 정치사와 시민 표현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었다. 그 결과 이 공간은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서울의 ‘큰 귀’, 시민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어주기 위한 서울의 ‘진정성 있는 귀’와 같은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고, 이에 이 공간의 이름을 ‘시민청(聽)’이라 제안하게 되었다. ‘관청 청(廳)’ 자를 쓰는 시청(廳) 안에 ‘들을 청(聽)’ 자를 붙인 ‘시민청(聽)’이 들어선 셈인데, 재미있기도 하고 헷갈리기도 하여 논란이 많긴 했지만, 지금은 모두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공간에 대한 이전의 기획이 하드웨어로 꽉 채워진 설정이었다면 우리의 제안은 가급적 공간을 비우고 시민의 활동으로 채우자는 설정이었다. 그러려다 보니 시민은 단지 관객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었고, 시민이 주인공이 되어 표현하고 참여할 다양한 기회가 제공되어야 했고, 시민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를 콘텐츠화할 수 있는 그런 프로그램이 기획되어야 했다. 즉, 플랫폼(platform)으로서의 프로그램, 콘텐츠로서의 과정(process)이 시민청 마스터플랜의 주축을 이루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이 공간은 시민이 자유롭게 또한 창의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누리도록 초대된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획한 시민청의 프로그램에는 1인자유무대, 정책카페, 사랑방워크숍, 담벼락미디어, 도란도란카페, 소리갤러리, 시민청갤러리, 뜬구름갤러리, 동행이벤트, 한마음살림장, 활력콘서트 등이 있는데 모두가 어떻게 다양한 방법으로 시민이 참여하여 나누고 누릴 수 있을 것인가를 염두에 둔 기획이다.
‘서울이 먼저 시작하는 아름다운 결혼 문화’라는 슬로건을 달고 시작한 ‘시민청결혼식’은 바로 이 프로그램의 하나인 ‘동행이벤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통과의례’를 통해 시민의 삶과 동행하고자 하는 취지로 그 첫 번째 프로젝트를 ‘결혼식’으로 정한 것이다. 과도한 결혼 비용으로 시민에게 정서적 경제적 고통을 주는 결혼식, 틀로 찍어낸 듯 개성 없는 결혼식, 진정한 축하보다는 축의금이라는 이해관계로 얽힌 결혼식 등으로 대변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결혼 문화가 지닌 폐단을 개선, 결혼식이 지닌 본래의 의미와 가치를 되찾을 수 있는 새로운 결혼 문화를 만들어 보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를 위해 ‘작고 뜻깊은 결혼식’을 실천 모델로 삼아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제반 환경을 디자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사회를 위해 정말 필요한 일을 디자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작업을 시작하였다.
‘작고 뜻깊은 결혼식’을 디자인하는 일의 핵심은 결혼식의 비용을 최소화하는 일과 소박하지만 아름답고 뜻깊게 결혼식을 치를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다. ‘작고 뜻깊은 결혼식’을 문화로 정착해 나가자면 특정한 계층만을 대상으로 한 그런 결혼식이 아닌, 보편타당한 대중이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결혼식이 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비용을 저렴하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닌, 자신들만의 결혼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런 당당하고 소신 있는 예비 신랑 신부들을 찾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를 위해 온•오프라인에서 시민과 열린 토론을 시작하였고, 결혼 문화를 둘러싼 많은 문제점을 공유하고 이를 위한 해결의 방안들을 함께 모색해 나갔다. 또한, 전문가 연구팀을 구성, 정체불명의 틀에 박힌 오늘날의 예식장 결혼식을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결혼식의 포맷을 디자인하기 시작하였다.
시민청결혼식의 기획을 요약하자면 이와 같다. ‘작고 뜻깊은 결혼식’을 위해 먼저 부모가 아닌, 결혼의 당사자인 신랑 신부가 주체가 되어 결혼식을 기획하도록 한다. 결혼식의 비용은 신랑 신부가 자신들의 힘으로 부담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 되어야 하며 그러자면 하객의 규모를 줄여(70~100명) 정말 함께 뜻깊은 축하의 시간을 나눌 수 있는 가까운 가족 지인들로 범위를 한정해야 한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리는 피로연 음식상보다는 하객과 함께 진정으로 축하하고 즐길 수 있는 결혼식의 프로그램 기획에 자신들만의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서울시는 이와 같은 진취적인 생각을 지닌 신랑 신부를 위해 서울시청(시민청) 안의 공간을 제공한다. 결혼식을 치르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장치와 장비를 마련하고, 사진 촬영에서 피로연에 소요되는 시간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최대 4시간 정도의 사용을 허용하도록 한다. 공간만으로는 결혼식을 치르는 데 어려움이 따를 것이므로 사전 연구를 통해 시민이 쉽게 활용할 수 있는 ‘테마가 있는 친환경 결혼식(양식 웨딩)’과 ‘전통의 현대화를 통한 한식혼례’ 포맷(준비 및 진행 절차 등)을 제공한다.
결혼식의 준비와 진행에 도움이 필요한 경우를 위해 시 차원에서 웨딩플래닝 협력업체를 선발하여 저렴한 비용으로 시민청결혼식을 지원하도록 한다. 이 과정에 필요한 전문인력(결혼예복 디자이너, 메이크업 아티스트, 사진가, 축가연주자, 사회 등)의 참여를 위해 최소비용으로 재능을 나누어 줄 사회적 예술가들을 모집, ‘재능나눔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상호 간에 뜻을 나누고 이익을 공유할 사회적 나눔의 체제를 구축한다. 사회로부터의 나눔의 혜택을 받게 된 신랑 신부는 자신들의 자발적인 뜻에 따라 사회와의 나눔을 계획하고 실천하도록 한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결혼의 궁극적인 목적인 ‘행복한 가정’을 위해 필요한 소통의 기술, 경제관념, 건강한 식생활 등을 주제로 한 예비부부 교육 과정을 마련하여 시민청결혼식을 위한 필수 이수 과정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을 현실에 대입하여 놓고 보니 예기치 못했던 여러 양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민’에 대한 나의 부족했던 이해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다양한 시민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공공’ 안에는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공존하며 이들의 이해관계는 자주 배치되기도 한다는 점, 이 프로젝트에 대한 공무원의 이해를 이끌어 내는 일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 ‘시민’으로서의 마땅한 태도를 연습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만큼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한 채 권리만을 주장하는 일이 종종 시민으로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처럼 이해되기도 한다는 점, 이에 대한 명확한 사회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공무원의 입장에서 행하는 ‘공공을 위한 업무’도 길을 잃게 된다는 점, 어쩌면 ‘시민’을 논하기 전에 ‘대중’이란 본디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점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공공의 목적’을 위한 계획은 개인의 이익을 최대화시키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점, 그럼에도 시민의 책임과 의무를 알려 연습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일들이 많다는 점 등도 이 일을 통해 얻게 된 주요한 깨달음들이다. ‘공공’이란 도대체 누구를 중심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일인가에 대한 원천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이에 대한 새로운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디자이너의 고민을 담아 그 일을 실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작업이 바로 이 <시민청결혼식 사용자 안내서>이다. ‘작고 뜻깊은 결혼식 함께 만들기’라는 제목을 달아 이것은 그저 누리기만 하는 사회적 서비스가 아니라 시민이 함께 이루어가야 할 사회적 과제임을 깨닫게 하며, 동시에 시민에 대한 진솔한 사랑과 존중의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결혼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디자인된 새로운 개념과 시스템을 널리 공유하기 위한 도구이며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태도’를 일깨워 주기 위해 디자인된 장치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시민청결혼식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시민청결혼식 신청자-협력업체-재능 나눔 참여자-운영자)의 입장을 섬세하게 파악하여 이들 사이의 명확한 책임과 권리와 의무를 규명하며 합리적인 규칙을 정하는 일에서의 고민과 함께 어떻게 하면 그것을 분명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화법’의 글로 정리할 수 있을지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작업이기도 하다. 이 책을 대하는 시민에게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위와 품위를 지켜주는 동시에 그들에게 어떠한 책임과 의무가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하려는, 관에서 하면 늘 형식적이고 일방적인 규칙을 나열한 책자일 것이 뻔하다는 시민의(또한 공무원들의) 선입견을 깨주기 위한 디자인적 배려가 숨어있기도 하다.
시민청결혼식은 ‘사회적 나눔의 순환체제’라는 사회를 향한 디자이너의 원대한 꿈으로부터 출발한 기획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꿈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노력은 지금까지 디자이너들이 해온 노력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디자이너의 머리와 감수성, 사회를 향한 통찰의 힘을 통해 이루어진 기획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지만, 그 안에는 ‘시민’이라는 엄청나게 미묘하고 복합적인 주체가 있고 그 주체는 간단한 원리로 이해시키고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 바로 그 이유이다. 결국, 이 일은 디자이너의 열정만으로 실현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애초에 마스터플랜의 축으로 도출하였던 ‘플랫폼(platform)으로서의 프로그램’, ‘콘텐츠로서의 과정(process)’의 중요성이 그러하듯 사회 전체가 함께 변화해가기 위한 과정 그 자체를 통해 가장 중요한 사회적 가치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디자이너로서 증명하고 싶은 단 한 가지는, 디자인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나미
현재 스튜디오 바프(studio BAF) 대표,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9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2010년 대한민국공공디자인엑스포 총괄 기획, 2012년부터 서울 시민청 마스터플랜 총괄 기획과 시민청결혼식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