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저작권위원회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저작권 전문기관이다. 1987년 7월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로 출발했다가 2007년 6월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체부의 정책을 뒷받침하고, 교육과 연구를 하고, 공유저작물을 관리하고, R&D 사업을 진행하는 등 업무가 많지만 출범 당시의 이름에서 보듯 심의와 조정이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내가 2015년부터 저작권위원회 위원으로 일하면서 가장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것 역시 조정과 심의였다. 먼저 조정 업무는 이렇다. 신청인이 취지를 기재한 조정신청서를 제출하면 법조인 출신과 해당 분야 전문가가 포진한 조정부에 배당된다. 저작권법을 바탕으로 삼아 당사자 간 대화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목표다.
조정은 재판에 비해 간편할뿐더러 성립할 경우 재판상 화해와 같은 두터운 효력이 생긴다. 공개를 원칙으로 하는 재판과 달리 비공개로 진행되므로 당사자의 프라이버시가 보호된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구체적 사례를 설명할 수 없는 것도 비밀의 의무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저작권 분쟁은 대부분 피해 액수가 그다지 크지 않는 데다 명예 회복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조정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분쟁 생기면? 조정 먼저!
그런데도 조정이 생각보다 활발하게 이용되지 않는 것은 홍보 부족과 더불어 제도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해의 핵심은 조정을 사법적 판단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다. 실제 조정에 임해보면 신청자와 피신청자 중 상당수가 한국저작권위원회와 같은 권위 있는 기관에서 적절한 법적 판단과 해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조정 제도의 속성이 그렇지 않다. 신청인과 피신청인에게 합의의 기회를 공적으로 제공하는 것이고, 합의에 이르면 그 이행을 법으로 뒷받침해주는 제도다. 조정실에서 이루어진 합의에 공적 힘을 부여함으로써 개인 간의 합의와 차별성을 지닌다.
만약 불성립으로 종결되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향후 재판의 증거도 되지 못한다.
조정 과정에 약간의 법적 조력을 받을 수는 있다. 전문적 식견을 가진 조사관이 검토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 법률적 판단이 오갈 수 있다. 조정부도 재판에 갔을 경우 결과를 예측하는 정도의 의견, 즉 법 이론이나 판례 등을 봐가며 책임의 정도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딱 거기서 멈춘다. 조정은 판결이 아닌 탓이다.
따라서 조정 제도를 활용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의사다. 옳고 그름보다 합의에 도달하려는 의사가 있을 때 의미가 크다. 합의할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조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행정의 낭비를 초래할 뿐이다. 가끔 상대방의 속내나 전략을 알기 위해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조정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조정을 하다 보면 여러 유형의 당사자를 만난다. 침해를 해놓고도 침해인 줄 몰랐다거나, 계약서에 서명해 놓고도 그런 내용인 줄 몰랐다고 하소연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안은 조정부의 설명에 따라 합의에 이를 공산이 크다. 다만 손해배상의 액수나 원상회복 등을 놓고 대립하기도 한다.
영화 〈변산〉이 변산초 교가를 사용하기까지
자존심 강한 독불장군은 조정이 어렵다. 문화예술 분야의 저작자들은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기대가 높은 반면 이용자(마케터)는 데이터로 대응한다. 그러면 장부의 진실을 놓고 공방을 벌이다가 급기야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화풀이 장소로 변한다. 조정위원들은 합의가 물건너가는 줄 알면서도 양쪽의 주장을 끝까지 들어주는 것으로 임무를 다한다.
조정과 달리 심의제도는 자료를 놓고 회의를 하는데, 법정허락이 가장 뜻깊은 일로 기억된다. 이 제도는 어떤 저작물을 이용하고 싶은데도 저작재산권자를 도무지 찾을 수 없을 때 활용된다. 심의에서는 주로 ‘상당한 노력’의 실질적인 내용을 판단한다. 이용자가 권리자를 찾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제시하고, 그 사실을 심의에서 인정받으면 일정한 보상금을 공탁한 뒤 합법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옛날 잡지에 실린 글을 다시 출판할 때 혹은 미술이나 사진작품을 아카이빙할 때처럼 법정허락은 여러 분야, 다양한 형태로 이용된다.
법정허락 심의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 케이스다. 2018년 7월에 개봉한 이 영화에는 변산초등학교 교가가 나온다. 변산초는 1934년 전북 부안군 변산면에 문을 연 유서 깊은 학교인데, 특이한 것이 교가의 작곡자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작사자는 문학사에 나오는 신석정(辛夕汀, 1907~9174) 시인이다.
이 때문에 영화 〈변산〉의 제작사 ㈜씨네월드가 고민에 빠졌다. 시나리오에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고향에 내려와 모교의 교가를 함께 부르는 부분이 있고, 이 장면을 촬영하려면 음악저작물 이용이 필수적인데, 저작자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제작사는 권리자를 찾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밟은 끝에 영화에 당당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변산〉의 엔딩 크레딧에 ‘법정허락을 받았다’는 내용의 자막을 보면서 느낀 뿌듯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언론학 박사. 울산 출생. 경희대학교 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경향신문 기자, 국민일보 문화부장 및 논설위원, 미국 미주리대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을 지냈다. 저서로 『책을 만나러 가는 길』, 『문화의 풍경』, 『도시의 표정』(이상 열화당) 등이 있다. 건국대, 경희대, 동아방송예술대, 숙명여대, 중앙대에서 강의했다. 현재 인덕대학교 교수,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국민일보 객원논설위원, 『복지저널』 편집위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