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세상을 앞서간다. 그들의 촉수는 풀잎처럼 예민하다. 사람들의 삶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아방가르드는 예술가들의 몫이다. 이에 비해 법은 뒤따라간다. 세상의 분란을 정리하고 뒤치다꺼리한다. 법이 앞서가면 사회와 개인의 삶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답답해도 그게 법의 숙명이다. 이렇게 속성이 다른 예술과 법이 충돌하면?
예전에 저명 화가의 작업실에 갔더니 일군의 젊은이들이 벽면에 매달려 있었다. 로프를 타고 오르내리며 대형 캔버스에 붓질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의아해하는 필자에게 화가는 파이프를 문 채 말했다. “저게 다 배우는 거지 뭐. 저 단순한 동작에도 실력 차이가 난다니깐!” 작품은 화가의 감리 하에 제작되고 있었다. 화가의 선택은 범법일까, 위법일까, 탈법일까.
이렇게 알게 모르게 이뤄지던 대리 행위가 분쟁으로 번진 경우가 ‘조영남 대작 사건’이다. 이 재판은 대작의 법률적 효과 외에도 작품이라는 상품의 조건, 저작자의 지위, 예술에 대한 사법부의 태도 등 여러 쟁점이 결부된 사건이어서 문화 예술계의 관심을 모았다.
첫 번째 시선. ‘조영남 대작 사건’의 법리 전개
다툼을 벌인 소송은 두 건이다. 하나는 조 씨가 2016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조수 쓰는 것이 관행”이라고 말한 데 대해 미술계 11개 단체가 “허위 사실을 적시해 미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제소했다가 각하된 사건이다.
명예 훼손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형법 제307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명예’란 사회적 평가를 일컫는다. “조수 쓰는 것이 관행”이라는 언급이 이런 구성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고 조 씨가 쾌재를 부를 일은 아니다.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거들떠볼 필요도 없다는 뜻이에요. 조수를 두는 건 문젯거리가 안 돼요. 당연하지. 바쁜 화가가, 잘나가는 팝아트 화가가 화투짝을 어떻게 일일이 그려요?”라고 말한다.(한겨레 2020년 6월 26일자)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각하 또는 기각됐다고 해서 조 씨의 발언이 정당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각하는 소송이 요건을 갖추지 못했을 때 심리 없이 끝내는 재판이고, 기각은 본안 심리는 하되 청구에 이유가 없다고 해서 배척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수 쓰는 것이 관행”이라는 조 씨의 발언이 작가들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 그 발언이 옳다거나 진실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어 진행된 것이 2020년 6월 대법원에서 무죄를 받아낸 사기 사건이다. 조 씨가 유명인인 데다 1심 유죄, 2심 무죄로 엎치락뒤치락하는 바람에 복잡한 내용처럼 보이지만 사건의 성격은 단순하다. 조 씨가 지난 2011년 9월부터 2015년 1월까지 화가 S 씨가 그린 그림에 가벼운 덧칠만 한 작품 21점을 17명에게 팔아 1억 5,300여만 원을 받은 것이 사기냐, 아니냐는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조 씨가 구매자들을 속였다며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S라는 화가가 밑그림 등을 그려준 작품을 팔면서 이 사실을 판매자에게 고의로 숨겼다는 사실을 중시했다. 작가가 다른 작가에 의뢰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친작親作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피해자들의 착오를 제거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부작위에 의한 기망 행위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항소심은 달랐다. 프록시(proxy) 작가의 관여 사실을 고지할 의무가 없다고 봤다. 나아가 작품의 친작 여부는 작가의 인지도, 아이디어의 독창성,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 수준, 희소성 등과 함께 구매 요인 중 하나일 뿐이라고 판단했다. 예술 행위 또는 미술의 진보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한 흔적이 뚜렷하다.
대법원의 설명도 비슷하다. “작품이 친작인지, 보조자를 사용했는지 여부가 구매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하거나 중요한 정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작품 제작에 제3자가 관여한 사실을 구매자에게 알리지 않고 판매해도 사기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시선. 예술에 대한 사법의 태도
항소심 판결은 미학자 진중권의 입장과 대부분 일치한다. 진중권은 조 씨의 항소심이 끝난 2019년 11월에 『미학 스캔들』(천년의상상)을 출간, 유죄 취지로 판결한 1심에 대해 인상주의 시절의 낡은 예술관에 매몰돼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조수를 사용한 미술사를 일별하면서 미술의 현대성(modernity)과 저자성(authorship)을 집중 탐구했다. 결론은 20세기 이후 현대미술의 개념적 혁명 이후 친작 행위는 더이상 예술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중권은 책에서 조영남의 나태와 윤리적 허영, 경제적 인색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창조력의 전개를 위해 작가에게 허용된 특별한 권리를 지극히 이기적인 목적에, 지극히 편의적인 방식으로 남용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1)대작의 사용을 공공연히 드러낼 것, (2)대작이 갖는 미학적 필연성을 해명할 것, (3)기예를 갖춘 조수라면 적절한 대우를 할 것 등 세 가지 권유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조영남의 반응은 달랐다. 대법원 판결 이후 개선장군의 모습을 보였다. “대법관들, 검사들이 총동원돼 나를 화가로 만들어줬다” “대작 작가에게 박하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등 본질에서 비껴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사기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그의 작품 활동 전체에 면죄부를 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
판결의 또 다른 의미는 예술에 대한 사법의 태도를 명시했다는 점이다. 대법원이 “위작·저작권 다툼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원은 미술 작품의 가치 평가에 관하여 사법 자제(司法自制)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고등법원도 “회화에서 조수를 사용한 제작이 적합한지, 혹은 그것이 관행에 속하는지 여부 등은 법률적 판단의 범주에 속하지 아니한다”며 자율적 영역에 법이 개입하기를 꺼려했다. 예술 행위에 형벌의 칼을 들이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여기에는 남형두 교수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지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남 교수는 2018년 11월 발간된 『문학과 법: 여섯 개의 시선』(사회평론아카데미)에서 주리스토크라시(Juristocracy) 개념을 내세우며 자치가 보장된 영역에서 사법이 개입하는 ‘예술의 신탁 통치’를 우려했다. 전문가들이 토론으로 해결해야 할 것을 무턱대고 소송으로 끌고 가는 ‘일상의 법정화’ 혹은 ‘사법 만능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고법과 대법에서 이 부분을 판결문에 남긴 데 대해 문화 예술계는 부끄럽게 여기며 자성해야 한다.
세 번째 시선. 미술계의 일로만 끝날까?
명예 훼손과 사기 혐의에 대한 소송이 끝났으니 조영남 파동은 끝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저작권 부문이 남아 있다. 대법원은 “검사는 저작권법 위반죄로 기소하지 않았고, 공소 사실에서도 저작자가 누구인지 기재하지 않았다 (···) 검사가 저작자에 관한 법리 오해를 주장하는 것은 불고불리(不告不理, 검사의 공소 제기가 없는 사건은 심리 및 판결할 수 없음) 원칙에 반한다”고 언급한 부분이다.
별도의 공소가 이루어지면 별도의 심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굳이 드러냈는데, 판사들이 저작권 분야를 살짝 건드리기도 했다. 1심에서 소재의 독창성 못지않게 창작적 표현도 중요하다며 S 씨를 독립 작가로 본 점, 2심에서 화투 작품의 아이디어가 조 씨로부터 나온 점을 중시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미술계가 저작권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만일 저작권 소송이 제기된다면 이전의 사기 사건과는 다른 복잡한 법리가 전개될 것이다.
저작권법은 ‘아이디어’가 아닌 ‘표현’만 보호하는데, 개념미술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대작자가 공동저작권자의 지위에 오를 것인지, 대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성명표시권 위반인지 등 쟁점이 많다는 뜻이다. 또한 대작 행위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나올 경우 미술계를 넘어 자서전 대필이 만연한 출판계 등 다른 분야에 미칠 영향이 크다고 하겠다.
언론학 박사. 울산 출생. 경희대학교 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경향신문 기자, 국민일보 문화부장 및 논설위원, 미국 미주리대 저널리즘스쿨 방문연구원을 지냈다. 저서로 『책을 만나러 가는 길』, 『문화의 풍경』, 『도시의 표정』(이상 열화당) 등이 있다. 건국대, 경희대, 동아방송예술대, 숙명여대, 중앙대에서 강의했다. 현재 인덕대학교 교수,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국민일보 객원논설위원, 『복지저널』 편집위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