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자꼴의 경향은 디지털 환경이 생산하는 딱딱하고 기계적인 느낌에서 손맛 또는 인간미가 느껴지는 부드럽고 감성적인 느낌을 선호하는 것으로 바뀌는 듯 하다. 옛 목판체 등을 되살린 옛멋글씨, 서예가들의 글씨를 활자화한 필 시리즈 등은 물론이거니와 여태명, 정병례, 신영복, 강병인, 백종열 등 유명 작가의 글씨를 서체화하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손글씨 서체개발
꼭 누구의 글씨체라 이름 붙이지 않아도 서체개발에서 손글씨는 예전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기업전용서체도 예외는 아니다. 기존의 명조형과 고딕형 서체개발 외에 캘리그래피(손글씨)를 적용한 CJ의 ‘CJ손맛체’, 롯데마트의 ‘다용도 캘리체’ 등이 그것이다. 이들 서체는 삼성생명 ‘SLI파트너H1’이나 네이버 ‘나눔손글씨’와 비교했을 때 용도가 더욱 구체적인데, 식품회사의 특성을 살려 식품 패키지와 그 주변에 사용할 수 있게 디자인되었다.
기존 작가의 글씨를 서체로 만드는 것은 일정 부분 규칙성을 담보로 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탈 네모꼴 구조로 만들고 리듬감을 넣어도, 문장이 길어지면 일률적으로 보일 여지가 크다. 이를 탈피하고자 제한적으로나마 글자 모양을 선택할 수 있는 약간의 옵션 기능을 넣어 손글씨의 느낌을 더욱 살리고, 풍부한 표현을 가능케 했다.
봄날체, 백종열체, CJ손맛체 등이 그 예인데, 봄날체의 경우 피쳐링(Featuring) 옵션을 넣어 조사나 어미에 주로 사용되는 빈도수가 높은 글자(64자)를 선택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변화를 꾀했다. CJ손맛체의 경우는 글립(Glyph) 기능으로 패키지디자인에 필요한 단어(108자)를 2종의 다른 스타일로 개발해 3종의 효과를 누릴 수 있도록 했다. 모두 서체의 일률적인 모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지만 제한된 단어 때문에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의 대두
그에 반해 자유로운 캘리그래피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식이 있다. 서체가 아닌 벡터파일(illustrator 8.0) 이미지를 조합해 사용하는 방식인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가 그것이다.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는 일러스트 파일화된 자소를 분리해 사용하기 때문에 크기와 기울기 변화가 자유롭다. 한 자소당 30개 정도씩 주어지는 샘플들은 실로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디자이너의 역량에 따라 결과물은 천차만별이다.
이 서체의 등장으로 디자이너는 리듬감, 붓의 동선, 공간배열 등 캘리그래피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이해가 더욱더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캘리그래피 사용과 구성의 질적 차이는 디자이너의 손에 상당 부분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몇몇 회사에서 출시한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는 디자이너에게 손쉬운 캘리그래피 소스를 공급할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쓸만한, 일정수준 이상의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지금처럼 캘리그래피 시장이 혼탁해지고, 좋고 나쁨의 구분이 뒤섞여 있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소스의 공급은 최악을 피해 가는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만고만한 조합형 캘리그래피의 사용은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외부 의뢰 감소를 불러오고, 결국 다양한 캘리그래퍼의 출현을 막아 독이 될 가능성도 있다. 물론 조합형 캘리그래피를 만든 캘리그래퍼에게는 새로운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의 사용으로 캘리그래피의 저변이 확대되어 캘리그래피 작업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경쟁력 있는 캘리그래퍼는 오히려 줄어드는 기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 공급사에서는 사용자 등록 절차를 통해 서체가 무분별하게 복사되는 것을 막고 있다. 하지만 수십, 수백 개의 획을 가진 캘리그래피 서체의 특성상, 매일 쏟아져 나오는 캘리그래피 작업의 홍수 속에서 무단사용과 복사를 과연 선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붓으로 글씨를 쓰면 지나치게 경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풍토에서 조합형 캘리그래피는 붓으로 쓰면 다 좋아하는 낮은 수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데 꽤 괜찮은 방법이다. 그러나 조합형 캘리그래피 서체의 경우 작가들의 자유로운 캘리그래피와 비교했을 때 희소성이나 표현의 적합성이 어느 정도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 하여도 지역의 간판이나 농산물 브랜드 등에서는 저렴한 제작 비용으로 효율적인 효과를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기능적인 가독성과 붓질의 형태를 넘어 감동을 주는 글씨가 나올는지 모르겠다.
상용 일러스트나 포토 시디가 있다고 해서 일러스트레이터나 포토그래퍼에게 일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글씨는 특성상 따라 쓰기 쉽고, 시장이 좁아 어느 정도 영향과 위기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캘리그래퍼들 역시 서체와 경쟁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만의 색을 찾아 스스로 경쟁력을 높이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미 있는 작은 파이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캘리그래피가 생활 속의 문화로 안착될 수 있도록 한 단계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좀 더 다양한 캘리그래피를 볼 수 있도록 다양성이 살아 있는 시장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글, 그리고 캘리그래피의 인기와 더불어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단지 한글을 디자인 요소로 차용했다고 해서 우리의 전통 미학이 살아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글의 아름다움을 활용했다 하면서도 후줄근하고, 촌스러운 디자인을 수없이 많이 봤다. 한글캘리그래피를 만들고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부리고 사용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높아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한글 디자인과 캘리그래피, 더 나아가 한글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더 많은 실험과 다양한 작품에의 적절한 사용이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 자료 제공 : 릭스코(폰트릭스), 캘리스토어, 산돌, 윤디자인, 초롱테크, 폰트뱅크, 직지소프트, CJ, 롯데마트, 네이버
박선영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996크리에이티브랩 소장.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창립회원으로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동양적인 문화요소와 조형을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으로 융화시키는 작업에 관심이 많은 그는 독립적인 프로젝트 활동 및 문화 관련 프로젝트와 전시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래픽디자인 관련 과목을 강의 중이다. 논문 〈캘리그래피(손멋글씨)의 조형적 표현과 활용에 관한 연구〉 발표했고, 이탈리아 Utilita Manifesta / Fight Poverty design contest 2010에서 작품이 선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