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무의식 속에 잠재된 이 사실을 흔들어 깨우느냐 마느냐는 선택의 문제. 그런데 깨워서 다가 아니라 행동에 나서야 하는 것도 문제. 이런 갈등 속에 시간은 가고 ‘도태’라는 걱정과 현재의 ‘안위’가 공존하는 무료한 삶은 지속한다. 이런 반복을 멈출 설렘은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지난 4월 11일(금) 저녁 7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이들로 윤디자인연구소 1층 세미나룸이 가득 찼다. 바로 〈The T와 함께하는 강쇼 세미나: 제3회 이기섭의 호기심 공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동네서점 땡스북스를 운영하고 있는 이기섭 대표의 이미지는 바로 ‘스마일’이다. 이건 사실 특별할 것 없는 이미지이지만, 그에게 가선 얘기가 전혀 달라진 이미지이기도 하다.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바꾼 이기섭 대표의 힘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될까. 그는 이것을 ‘호기심’이란 단어로 명료하게 설명한다.
“순간적으로 떠오르고 즉흥적으로 발생하는 호기심에 충실하기란 쉽지 않지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이유가 발목을 잡지요. 그런데 작은 부분이라도 일상에서 느끼는 호기심에 반응하다 보면 당장은 큰 성과가 없겠지만, 그것이 쌓여서 후에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된다는 실험을 제가 했어요.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기섭 대표의 말처럼 호기심 공장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 공장을 돌릴만한 에너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그는 그 에너지의 생성 과정을 이야기하며 ‘여행과 일상’, ‘자신감과 자존감’, ‘상식과 소통’, ‘기회와 행운’, ‘비전과 철학’이라는 키워드를 꺼내 20년의 세월을 지나온 시간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1997년 IMF 때였어요. 그땐 거의 모든 디자이너에게 일이 끊긴 시절이었고 저도 그런 상황을 겪게 됐죠. 절망에 빠지기보단 뭔가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했기에 급하게 1박 2일분에 해당하는 간단한 가방을 싸고 6개월간의 중동 지역 여행을 시작하게 됐어요. 사실 우리나라 여행객이 많이 가지 않는 여행지인데, 그 생소함마저 즐거웠어요. 경비를 챙겨가지 못했기에 한 농장에서 소젖을 짜는 일도 했고, 그 일이 끝나면 이곳저곳 여행을 다녔어요. 간단한 배낭 짐을 꾸려야 했던 저는 카메라부터 빼게 됐는데요, 그렇다고 사진이 생기지 않은 건 아니에요. 도착하는 도시마다 책을 한 권씩 사서 우편으로 부치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는 팸플릿도 얻었지요. 사진을 찍는 대신 여행기를 꼼꼼히 쓰게 됐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것은 그림을 그려서 남겼어요. 이집트 피라미드 꼭대기는 원래 못 들어가게 되어있는데, 여행에서 만난 일본인과 친해져서 입장이 금지된 그곳도 들어가 보기도 했고요. 여행을 오래 하다 보면 그 나라의 시스템이 보이기 시작하는데요, 그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비교 대상이 생기지요. ‘저 나라에선 이게 이랬는데, 우리나라는 이렇구나!’ 그때부턴 일상도 그렇게 평범하지만은 않을 거예요. 여행으로 적절한 자극을 찾고 일상으로 돌아와선 내가 좋아하는 일을 만들어 보는 것. 그게 호기심 공장을 돌리는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26년 전, 홍익대학교에서 섬유미술을 전공했던 이기섭 대표는 섬유미술이 싫어 시각디자인과 수업을 들었다고 한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열등감으로 가득 차 소심했었더라고 그것이 긍정으로 바뀌기까지의 시간도 이야기해 주었다.
“섬유미술이 재미없어서 과 소식지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걸 만들기 시작하면서 뭔가 제가 중요한 사람처럼 생각됐죠. 살면서 인정받은 일이 별로 없었는데, 남들이 인정해 주니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그리고 더 잘하고 싶었죠. 그래서 시각디자인과의 안상수 선생님을 찾아가 수업을 듣게 해달라고 했고 선생님도 흔쾌히 허락해 주셨어요. 그런데 시디과 학생들은 너무 잘하고 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없는 거예요. 당연하죠. 그 학생들은 계속 그 공부를 해왔잖아요. 그래서 전 절망하기보단 그걸 인정하고 그 아이들과 나의 차별점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저에겐 섬유미술이라는 공부를 했던 장점이 있더라고요. 편집 디자인에 섬유의 특징을 반영하여 다른 학생들과의 작품과 차별화시켰어요. 여기에서 중요한 건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면 다음 단계로 가기 쉽다는 거예요. 그걸 계기로 〈홍익미술〉 편집장도 하고 홍디자인에 들어가 『행복이 가득한 집』 리뉴얼도 했어요. 호기심에 충실했더니 존재감도 생기고 기쁨도 맛보고 실력도 는 거죠.”
그는 최근에 갔던 DDP, 즐겨 타는 자전거, 재미있게 봤던 영화, 맛있게 먹었던 햇배추 부침개와 막걸리 이야기하며 ‘일상도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했다. 일상의 패턴을 관찰하며 사회의 시스템을 관찰하며 배우는 습관을 들이라고 조언했다. 가령 지하철을 타고 휴대전화만 보지 말고 사람들이 옷 입은 스타일을 보거나 아침을 챙겨 먹거나 운동을 하거나 하는 그런 부분이 일상을 풍요롭게 한다고. 일상도 충분히 공부가 된다고 말한다.
“오늘 세미나 주제가 호기심 공장이었는데요, 왜 공장이라는 말을 붙였을까요? 만든다는 것의 즐거움, 공장이란 단어가 주는 생산적인 뉘앙스. 저는 제 마음속에 호기심 공장이 있어요.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몸이 원할 때 그런 신호들을 잘 눈치채야 해요. 그런데 그런 신호를 잡는 안테나가 보통은 내 안으로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향해 있는 것이 문제이지요. 남들이 날 어떻게 볼까, 내가 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사실 이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다 보면 자기 안에서 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가 쉽지 않죠. 그런 부분들. 자기 호기심에 관심을 가져주고 그것을 북돋아 줄 때 우리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진다는 사실, 오늘 제가 하려는 세미나의 메시지이지요.”
관습적인 삶, 남들이 하는 걸 안 하면 뭔가 불이익을 당할 것만 같은 일들은 살면서 수없이 많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 안 맞을 때는 과감히 버리고 나에게 맞는 것을 찾으면 된다는 얘기. 그러기에 나 자신을 잘 아는 것과, 용기와, 자신감이, 공부가, 경험이 필요하다. 이렇게 몸소 실천하여 실험하고 좋은 결과를 얻은 사람, 이기섭 대표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각자의 호기심 공장을 가동하는 에너지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날따라 집에 가는 지하철은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기에….
한편, 〈The T와 함께하는 강쇼 세미나〉는 매월 둘째 주 목요일 혹은 금요일에 열린다. 오는 5월 9일(금) 저녁 7시에 예정된 제4회 세미나는 그래픽 디자이너 신덕호의 ‘건조한 조건’이다. 자세한 내용은 타이포그래피 서울을 통해 곧 공지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