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은 늘 선택과 마주한다. 수강신청에서 어떤 과목을 들을 것인지, 짝사랑하는 그녀에게 고백을 해야 할 지 말지, 심지어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선택까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을 통해 펼쳐지는 인생의 그림은 달라지게 되는데, 그러고 보면 디자이너가 만들어내는 디자인도 꼭 우리의 인생을 닮아있다. 디자이너가 선택하는 방법에 따라 드러나는 결과물이 달라지니 말이다. 지난 8월 22일(금) 저녁 7시, 윤디자인연구소 1층 세미나룸에서는 그래픽 디자이너 조현열을 통해 디자인에 있어서 ‘선택’에 관해 들어보았다. 〈더티&강쇼: 제7회 조현열의 선택의 순간〉의 현장으로 함께 가보자.
디자인뿐만 아니라 모든 작업은 선택을 하는 과정이다. 조현열 작가는 디자이너에게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는 요즘이라고 한다. 처음 일을 의뢰 받았을 때 이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 것부터 작업을 하기로 했을 때 책의 크기, 디자인 요소, 텍스트는 어떤 폰트를 쓸 것인지, 이미지는 어느 정도 사이즈를 잡아야 하는지, 이미지와 텍스트는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지 등 수많은 선택을 통해서 완성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최근 ‘타이포그래피’가 화두가 되고 있는데, 조현열 작가는 초기에 ‘타이포그래피’라는 단어가 너무 무분별하게 쓰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디자인에서 ‘글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글자’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디자이너(특히 그래픽 디자이너)는 글자를 다루는 직업이기 때문에 글자의 이해가 없이는 좋은 디자인을 만들기 어렵다. 따라서 디자이너는 ‘글자’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조현열 작가는 ‘한글’이 태생부터 세로쓰기에 맞춰진 서체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어릴 적 서예학원에서 모눈종이에 그려진 세로 기준선에 맞춰 붓글씨를 연습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한글은 세로쓰기에 질서가 맞춰져 있는데, 가로쓰기로 방법이 바뀌면서 글자의 비율이나 시각적인 기준이 모두 흐트러졌다고 말했다. 로만 알파벳의 아름다운 기준선이 한글에서는 보기 힘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조현열 작가는 한글의 조판을 잘 운용하는 디자이너가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조현열 작가는 디자이너에게 가장 어려운 작업이 책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말하면서, 책을 만드는 작업에서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지만 책이 완성되었을 때 가장 큰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디자이너에게 있어서 책은 가장 큰 완성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여러 장의 페이지가 묶여서 만들어지는 한 권의 책 속에 온갖 디자인 전략이 한 자리에서 드러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규칙이 필요하다. 조현열 작가는 이 규칙이 잘 세워졌을 때 가장 좋은 책이 나온다고 말한다. 그는 이해를 돕기 위해 규칙을 세우는 일을 기초공사에 비유했는데, 규칙이라는 기초 위에 요소들을 올렸을 때 최종적으로 책이 나와도 크게 뒤틀림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작업을 하는 동안 변수도 많고, 규칙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안 작업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 규칙을 잡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 그는 어떤 요소가 들어와도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있는 규칙을 만들어 냈을 때 ‘탄탄한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한편, 다음 〈더티&강쇼〉 제8회 세미나는 오는 9월 26일(금) 저녁 7시에 제너럴그래픽스의 문장현 대표를 초대해 디자인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자세한 내용은 타이포그래피 서울을 통해 곧 공지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