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토크쇼’라는 형식을 표방하며 지난 2014년 2월에 시작했던 〈더티&강쇼〉. 어느덧 2년의 시간이 지났고 벌써 시즌 2의 마지막 이야기를 전하려고 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지난 11월 13일(금) 저녁 7시, 홍대 앞 공연장 ‘폼텍 웍스홀’에서 그래픽 디자이너 강구룡이 진행하는 〈더티&강쇼〉 마지막 강연자로 Plus X 공동대표 신명섭이 나섰다. 편집 디자인의 산실 안그라픽스와 국대 최대 포털 NHN(네이버)를 거처 Plus X를 창업하고 브랜딩과 제품까지 만들어 특이한 이력을 보여온 그에게 쏟아진 관심은 이날 강의까지 이어져 〈더티&강쇼〉 진행 이래 최 단시간 신청 마감이 끝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야말로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한 모든 것이 최적화되어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2년의 시간, 18명(팀)의 강연자의 얼굴이 필름처럼 스쳐가며, 감회가 남다른 마지막 시간은 시작됐다.
“강구룡 씨와 사전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 했지만, 저는 약간 ‘이단아’ 같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타이포나 편집으로 시작해서 네이버라는 기업을 갔다가 지금은 또 브랜드를 하면서 제품도 만들게 됐으니까요. 이렇게 된 이유를 한번쯤은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사실 굉장히 부끄럽기는 하지만, 13년차 디자이너의 다양한 경험이 여러분께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열정의 이름 3 그리고 3, 안그라픽스
안그라픽스에 처음 입사한 날부터 3일을 집에 못 갔다며, 자신이 선정한 키워드 3과 3에 대해 신명섭은 설명했다. 그렇게 시작한 첫 회사 생활은 집에 가는 평균 일수가 3일, 그렇게 시간이 지나 그곳에서의 총 근무 일수가 3년 3개월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숫자로 들으니 굉장히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결코 일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안그라픽스에서의 가장 좋았던 기억은 자극을 주고받는 동료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위에서 지시해서 무조건 결과물을 내놨다기보다,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디자인을 꺼내놓기 위해 스스로 컨디션을 조절해 가며 밤을 샜던 거죠.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실력 있는 선배들이 그렇게 해 왔던 것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기도 해요. 저와 동료들 위에는 더 나은 작업물을 위해 항상 연구하고 실험하는 선배들이 있었어요. 그런 끊임 없는 시도를 보면서 많은 배움과 깨달음이 있었죠. 지금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워크룸이나 제너럴그래픽스 등이 그분들이시죠.”
신명섭은 디자이너로서 한 분야에 역량을 키우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처음 시작할 때 회사의 타이틀과 돈 보다는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일인지, 그리고 자신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동료들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간은 사회생활 초반 3년~5년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회사를 선택할 때 ‘성장’에 최우선을 두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디자인에 대한 생각의 변화, NHN(네이버)
디자인에 대한 접근, 더 넓게는 디자인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가장 컸던 회사가 NHN(네이버)였다고 신명섭은 말한다. 시작을 편집 디자인으로 했던 터라, 네이버라는 하나의 브랜드를 다루어야 하는 일을 해야 했기에 그야말로 처음에는 ‘멘붕’에 빠졌었다고.
“브랜드에 있어서 디자인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많이 느꼈던 시기였어요. 처음에 회사에 들어갔는데, 매일 익숙한 쿽으로만 디자인을 하다가 갑자기 파워포인트 문서를 디자인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어떤 컨퍼런스 전시를 나가는데, 그 공간 디자인도 해야 하고 고객들한테 기념품으로 줄 제품 디자인도 해야 한다고 하고. 이렇게 뭔가 생소한 일들이 끊임없이 펼쳐져 어려움이 많았죠. 그렇게 정신 없는 3개월을 지내고 제 나이 서른에 팀장을 맡게 되었어요. 제가 너무 뛰어나서가 아니라 팀원 3~4명으로 시작하는 팀을 세팅하려는 시기였습니다.”
네이버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보자, 라는 미션을 받고 지금의 검색창 ‘그린윈도우’를 만들었던 일, 그것에 수반되는 다양한 마케팅을 수행했던 일, ‘한글한글 아름답게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들었던 나눔고딕, 나눔명조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로젝트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신명섭이 네이버와 함께한 4년 3개월의 시간 동안 300여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디렉팅하면서 하나의 브랜드가 고객을 만날 때 나올 수 있는 다양한 매체의 일관된 모습과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일들을 에피소드로 들려주었다.
인생 2막, Plus X 창업
‘안정’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들이 있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딜레마가 있었다. 거대해진 조직의 관리, 소위 말하는 줄서기, 디자이너로서 크리에이티브를 표현함에 있어서도 기업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불가피했단다.
“회사에서 조직 관리를 하고 한 단계 더 올라가고 더 많은 연봉과 처우를 받으며 조직을 이끄는 게 맞을지, 아니면 그냥 디자인을 순수하게 하는 게 나에게 더 맞을지…. 이런 고민을 친구들과 같이 하다가 결론을 냈죠. 계속 아웃풋을 내고 뭔가 만드는 일이 우리에게 맞겠다, 이걸 회사를 나가서 하자! 그렇게 플러스 엑스를 차리게 된 거예요. 제가 그래픽 디자인(브랜딩)을 맡고, 변사범이라는 친구가 UI/UX, 허승원이란 친구가 영상을 맡고 마케팅 디렉터까지 더해 처음에는 5명의 디렉터가 모여 통합적인 브랜드 경험을 만드는 회사를 해보자고 했어요.”
5명이 500만원씩 투자, 자본금 2,500만원에 지인의 사무실을 빌려 시작한 플러스 엑스는 지금 직원 30명을 둔 탄탄한 디자인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이름의 의미보다 시각화가 먼저 되어 만들어진 사명, 브랜딩·패키지·UI/UX·영상·제품을 통합해서 회사의 전문성을 키웠던 일, 남다른 생각의 디자인으로 크고 작은 수많은 상을 받았던 일, 현대카드, CGV나 YG엔터테인먼트 등 지금의 플러스엑스가 있기까지 벌여왔던 프로젝트 사례를 이야기 해주었다. 아울러 창업 멤버 2명이 빠져 나가면서 회사를 분리 시켰던 일,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덧붙이며, 인생은 꼭 좋은 일만 있지 않다는 교훈도 덧붙였다.
생각만해도 아픈, 자체 브랜드 LAB.C
디자인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있다. 바로 갑과 을의 관계. 곧 그것이 숙명이란다. ‘갑의 횡포’라는 말은 현실이 되기에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디자인 회사는 자연스레 자체 수익 모델을 만들고자 하는 수 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디자인을 잘 하는 것과 잘 나온 디자인 아웃풋으로 소위 말해 대박이 나는 제품을 만드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신명섭은 말한다.
“LAB.C라는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 휴대전화 케이스를 내놓고 처음엔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그런데 제조업이라는 게 단번에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 수익으로 다시 다음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생리가 있어요. 그래서 업그레이드 버전인 휴대전화 케이스에 USB와 교통카드를 넣을 수 있는 아이디어 상품을 다시 만들었죠. 레드닷에서 상도 받고 퀄리티가 굉장히 좋았거든요. 그런데 실패를 했어요. 문제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시장의 속성을 잘 몰랐던 거예요. ‘Time to Market’이라고 만약 애플에서 신제품을 출시 한다고 하면, 출시일 훨씬 전에 매장에 판매할 자리에 대한 영업이 끝나야 해요. 제품에 대한 퀼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이 시간을 놓치면 매출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재고가 쌓이고 투자 비용은 늘고, 수익은 보이지 않았죠. 팔리는 상품을 만드는 것과 디자인적으로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간극을 좁히는 일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플러스 엑스는 LAB.C를 운영하면서 낸 ‘수업료’와 ‘노하우’로 아이디프레임(사원증 케이스)을 만들었다. 플러스 엑스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개발할 당시에는 시장에 쓸만한 사원증 케이스가 없어서 일본에서 비싼 돈을 들여 제품을 사서 썻다. 이 경험을 하며 우리같이 작은 회사들도 쓸만한 사원증을 만들고 싶었고 2015년에야 거금을 투자해서 만들게 되었다. 다행히 킥스타터도 진행하고 SNS를 통해 마케팅을 하면서 지금은 손익분기점을 넘기게 되었다.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가치 있는 디자인을 추구할 수 있는 것. LAB.C의 뼈아픈 경험이 노하우가 된 전화위복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리고 디자이너 신명섭 이야기
많은 일을 하는 와중에도 신명섭은 개인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회사에서는 디렉터로서 디자인을 넘어 다른 고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작 디자인을 잡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20명 정도의 사람에게 청첩장을 만들어 주었어요. 때로는 포스터 형식으로, 때로는 화보 형식으로 그 사람만의 유니크함을 담아 정성스레 만들었어요. 그리고 월페이퍼 작업은 2001년부터 시작했으니 14년 동안 150여 개를 만들었네요. 시작한 계기는 내가 디자인한 걸로 바탕화면을 쓰고 싶어서였고요. 제가 그림을 잘 못 그리는 대신 사진을 좋아해서 찍고, 거기에 타이포그래피나 그래픽 요소를 넣어 편집을 하는 거죠. 그런 과정을 통해 나름의 생각과 실험을 반복했던 거예요. 그 결과물을 모아 나중에 전시를 하기도 했고요.”
신명섭은 주어진 일이나 상황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가치를 찾아가는 사람을 좋아한단다. 리서치를 하나를 하더라도 이것을 왜 하는지를 생각하고 여기에서 얻어내는 가치와 느낀 점을 정리해서 그 다음까지 고민을 한다면 단연코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고 조언한다. 편안하면 그만큼 성장이 더딜 수 있고 힘든 만큼 더 얻을 수 있는 경험과 성장이 더 많다고 신명섭은 말한다. 본인 또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함께하는 좋은 사람들과 계속 경험하며 성장해 나갈 것이라고.
신명섭의 강연을 끝으로 2년간 진행했던 〈더티&강쇼〉를 마무리했다. 세미나 기획부터 위트 있는 진행으로 함께해준 그래픽 디자이너 강구룡 님, 시즌 1 강연을 해준 김기조 님, 이지원 님, 윤여경 님, 이기섭 님, 신덕호 님, 이기준 님, 김다희 님, 조현열 님, 문장현 님, 이재민 님, 조경규 님, 신기헌 님, 이용제 님, 시즌 2 강연을 해준 조현 님, 최성민(슬기와민) 님, 마이케이씨(김기문, 김용찬), 프로파간다(최지웅, 박동우), 신명섭 님, 특별 심포지엄 강연자였던 노은유 님까지 21명의 디자이너 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마지막으로 총 1,000여 명에 이르는 관객 여러분께도 고개 숙여 인사를 전한다. Adieu! The T&Kang Show! 다음에 어떤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지 기대해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