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존재한 수만 년 동안 그림, 기호, 설화 등 다양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있었다. 그중에서 말이나 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적기 위해 일정한 체제의 부호를 만들어 낸 것이 문자(文字, letter)이다. 문자는 인간의 생각을 담아 전달하는 언어를 시각화한 것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데에 이용됐다. 또 우리는 이를 통하여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물에 대해서도 생각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정보를 영구적으로 저장하고 전달하는 매개로서 문자를 이용하였다. 문자의 발명으로 정치, 경제, 종교, 문학 등이 발달하게 되었고,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더욱 신장할 수 있었다. 새로운 분야의 지식을 넓힐 기회가 확대되었고, 구전으로 전승되던 사상이 문자라는 구체적인 수단에 의해 조직적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
“인류가 지구상에서 생존한 것은 100만 년, 그러나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6000년밖에 되지 않았다.”
– 르네 에티앙블(Lene Etiemble)
문자, 소통의 기호
인류가 발명해낸 지혜와 지식의 산물인 문자는 그 기호적 성질과 사용상의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이미지로 전개되어왔다. 인류사에서 최초의 문자는 우르크 대신전단지에서 출토된 진흙 판에 새겨진 농축산물의 수확량을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수메르의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 script)의 초기형태로 알려졌으며, BC 1세기경까지 범용적으로 사용되었으나 그리스문자나 아랍문자의 보급으로 점차 잊히게 되었다. 이르러 발달한 이집트의 신성문자(神聖文字, hieroglyph)는 신들의 글자로 불릴 만큼 신성한 존재였다. 신성문자는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근 3,000여 년 동안 주로 왕의 업적, 신이나 사후 세계에 관한 문장을 신전이나 분묘의 벽면, 또는 기둥에 조각하는 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회화적인 성격이 강하여, 미술적 가치가 높은 것도 많았다. 이후 문자는 공식적인 기호나 상징으로써, 여러 사람 사이에 합의된 체계의 과정을 통하여 오랫동안 복잡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분화, 발전하게 되었다. 지금도 문자는 사건을 보존하는 구체적 필요에 의한 사회적 기호뿐 아니라 상징적 이미지의 표현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문자의 역사, 그것은 6천 년이라는 세월이 일구어낸 인류의 서사시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 황하에 이르기까지 문화가 담긴 장대한 파노라마이자 영감으로 가득 찬 예술세계이다. 문자는 인류문명의 주춧돌이며, 그 역사는 인류가 물려받은 기억의 총량이다.”
– 조르쥬 장(Georges Jean)
소통의 수단에서 이미지의 매개로….
15세기 인쇄술의 발달은 정보의 저장과 전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인쇄 작업에 적합한 활자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표준적인 형태나 장식을 지닌 서체(書體, Typeface) 개념도 발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붓 또는 펜글씨와 비슷한 서체를 활자로 만들었지만, 점차 밝고 읽기 쉬운 새로운 자체(字體)를 만들어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이탈리아에서는 로만(Roman)체의 활자가 1470년에 완성되었고, 그 이후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는 모던 로만 서체의 기초가 완전히 이루어졌다. 초기 활자는 언어의 기술적 표현으로서 오직 정보를 전달하는 일차적 기능에 머물렀지만, 현대로 올수록 서체의 심미적, 조형적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읽힘의 수단뿐 아니라 이미지 요소로도 활용되어 공간의 이미지를 창출하고, 아이덴티티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말은 시간 속에서 진행되고, 글은 공간 속에서 진행된다.”
– 까프 게르스트너(Cafe Gerstner)
기능적인 서체
문자의 언어적 전달기능은 조형 구조 내에서 약속된 기호를 전제로 구체적인 형태를 표현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공통된 지각 반응을 유도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문자를 통해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합리적, 과학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문자는 쓰임새에 맞춘 최적의 조형성이 필요하며, 적정한 판독성과 가독성을 고려하여 디자인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시내버스 노선 등 각종 공공 안내판의 표지는 악천후 상황과 움직이면서도 잘 인식될 수 있도록 순간적 판독성과 명시성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 표지판의 문자는 공간의 성격과 공간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도로 상황에 따라 적합한 표시 방식을 따르지만, 늘 앞을 바라봐야 하는 운전자들에게는 운전 도중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오는 배열이 필요하다.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Autobahn)의 표지판은 독일산업규격(DIN)의 활자체를 적용하고 있다. 문자의 획을 최대한 단순화하였으며, 아이(I)와 엘(l)처럼 모양이 유사한 글자에는 고유한 특징을 부여해 시속 130㎞를 넘는 고속주행 중에도 쉽게 인식할 수 있게 했다. 또 획의 구부러짐이나 꺾임을 꼼꼼하게 조정해 밤에 차를 몰며 표지판을 볼 때 경험하는 빛에 의한 번짐 효과에도 대비한 기능적인 서체이다.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서체
각 나라가 자신들의 서체를 발전시키면서 특정한 나라와 그 나라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글자 사이의 관계가 맺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에서 9세기 초에 필사본으로 완성된 라틴어 복음서 ‘켈스의 서(book od Kells)’에 있던 독특한 형태의 글자에서 비롯된 아이리시(Irish)서체는 그 모양이 곧 아이리시 민족을 상징할 만큼 이미지가 굳어진 경우이다. 이는 문자의 시각적 속성이 국가의 아이덴티티까지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 서구 주요 신문의 제호로 쓰이는 ‘블랙 레터(Black Letter)’는 건축의 고딕양식에 비견되는 타이포그래피의 정수이다. 흔히 주변의 독일식 호프집 장식에서 볼 수 있는 이 블랙 레터는 독일의 히틀러 시대에는 애국심의 표상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블랙 레터는 지하철 노선도와 일반 정거장 표지, 각종 인쇄물에 두루 적용되고 있다.
이미지의 표현 수단으로서의 서체
문자는 더 이상 틀에 박힌 이미지가 아니며, 오늘날 뉴미디어 시대에서는 이미지로서의 문자의 역할이 이전과 다른 차원에서 강조되고 있다. 문자기호를 표기하는 도구가 기계화되어 컴퓨터 등의 뉴 미디어의 보급이 급속도로 보편화 되면서, 문자는 사회적 기호로서가 아닌 조형적 이미지로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즉, 읽히는가에 대한 가독성의 문제를 벗어나 하나의 이미지로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 또는 도시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문자가 마치 하나의 그림같이 비언어적 전달요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도시의 슬로건이나 로고타입으로 형상화된 문자들은 도시가 지향하고자 하는 이미지를 쉽게 전하고, 깊은 인상을 남게 하는 역할을 한다. 최근 새롭게 고안된 뉴욕시의 로고타입 ‘NYC’는 뉴욕의 핵심가치인 ‘다양성’을 담고 있으며, 일본의 관광홍보용 로고인 ‘YOKOSO! JAPAN’은 환영의 메시지를 시각화한 것이다.
정보의 구조체로서 현대도시
산업사회가 빠르게 정보사회로 전환되면서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형태의 정보화가 이미 시작되었고, 그로 인하여 무수히 많은 정보가 생성되고 있다. 일찍이 존 네이스비트(J. Naisbitt)는 이 같은 상황을 ‘정보의 폭발(information explosion)’이라 했다. 현대사회는 대중매체와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사회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정보의 양과 종류가 절대적으로 증가하여 정보가 부가가치 창출의 중심이 되고 있다.
현대도시의 점증하는 욕망과 정보, 그리고 다양한 흐름의 영역들은 서로 독자성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혼재되어 중첩되고 다층의 관계들을 형성하여 이전 도시의 영역을 초월하는 거대도시를 만들어 내고 있다. 도시를 형성하는 흐름과 각종의 장(場)에 혼재된 물질과 정보의 양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사회에서보다도 더 많으며, 인간은 이러한 흐름의 일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운송, 전기통신, 생산, 소비 등이 중첩된 네트워크의 도움 없이는 도시가 유지될 수 없으며, 이러한 하부구조와 물질적인 흐름은 공간적인 경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연결의 중요성 때문에 정보를 시각화한 안내사인, 공공정보, 간판과 같은 정보인프라가 도시의 표면을 구성하는 주요요소가 되었다.
“유한한 인간은 글자에서 영원을 맛본다. 무생물인 글자가 살아있는 생각을 담아 마치 확대경처럼 생각에 영혼을 불어넣어 준다.”
– 조지프 샹피옹 (Joseph Champion)
뉴욕의 브로드웨이와 그 중심지 타임스퀘어는 글자의 응집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미국인은 하루에 평균 1,500개의 광고를 보면서 돌아다닌다. 무엇보다 시각적 이미지가 집중된 곳이 라스베이거스인데 스타더스트(Stardust) 호텔의 거대한 네온사인은 1만 5,000개의 전구를 이용해 작동하고 있다. 현대 도시의 광고물 홍수 속에서 글자 하나하나는 거대한 이미지의 원소와 같다. 글자는 단어의 덩어리와 의미의 연상에서 해방되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시지각경험의 대상이 되며, 도시 이미지의 표현의 핵심적인 매개가 된다.
글꼴이 도시의 이미지를 만든다
국경이 모호한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언제 경계를 넘어왔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러나 가로의 공공표지나 간판의 글꼴로 자신이 다른 나라의 어느 도시에 들어와 있음을 이내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문자는 도시의 시각적 질서와 이미지 정체성에 깊숙이 연계돼 있다. 따라서 각 국가나 도시에서는 지정 서체 및 전용 서체4)를 통하여 공공시설물과 안내사인의 디자인 적용과 응용함을 통해 고유의 독창적인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고속도로, 공항, 터미널 등 대중교통체계에 설치된 교통 표지판이나 안내표지판에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독창적인 전용 서체를 사용하는 것은 정보전달의 기능과 더불어 국가나 도시의 효과적인 아이덴티티 구축을 돕는다.
4) 지정 서체란 기존에 만들어져 있는 서체를 지정하여 일괄 적용하는 것이고, 전용 서체란 각 단체의 아이덴티티 구축을 위해 서체를 새로 개발하여 적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도시는 이름 모를 저자가 집필한 거대한 책이 펼쳐져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은 그냥 들여다보기만 해도 충분하다. 이미지가 스스로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 로베르 마생 (Robert Massin)
기능과 효율의 도시를 만드는 서체
도시를 구성하는 수많은 정보 중 시민의 안전과 직결된 정보는 빠른 인식과 가독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용도의 서체를 과학적인 근거에 따라 일관성 있게 구축해 놓을 경우 도시의 흐름을 원활하게 시민 편의를 증진할 수 있다. 많은 도시가 지하철, 공항, 철도, 고속도로의 안내사인에 지정 서체 혹은 전용 서체를 사용하여 시민이 안전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하고, 사인시스템의 아이덴티티를 일관성 있게 구축해놓은 사례가 많다. 이러한 기능성에 초점을 맞춘 폰트의 사용은 경제적 공간의 폰트 사용으로 쾌적한 주위 환경을 형성한다. 더 나아가 이는 혼란스러운 도시경관에서 탈피하여 쾌적하고 정리된 도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
가. 파리 지하철의 상징 파리지앵(Parisienne)체, 프랑스
파리의 파리지앵(Parisienne)체는 1996년 프랑스 파리 지하철 ‘RATP’의 사인과 인쇄용을 위한 서체로 제작되었다. 당시 서체를 개발하는 목적은 300여 개의 파리 시내와 외곽을 잇는 지하철의 안내 표지판을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재정비하는 데 있었다. 헬베티카(Helvetica)를 기본으로 하여 제작된 파리지앵은 심플함과 전체적인 자형이 헬베티카와 매우 유사하지만, 자폭이 좀 더 좁게 조정되어 소문자와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조합되는 특징이 있다. 또한, 소문자의 사용으로 빠른 시간에 단어를 인식하게 하여, 도시 안내사인 적용에 적합한 서체이다. 파리지앵체는 고속화, 대형화되고 있는 대중교통시설에서 이용객의 동선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원활한 의사소통을 유도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나. 독일의 표준서체 DIN 1451, 독일
독일의 DIN 서체는 기술, 교통, 행정, 기업 등의 분야에서 널리 사용하도록 1936년 독일표준공업규격(Deutsches Institut fur Normung) 1451호로 지정된 서체로, 간결하고 가독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인식성이 뛰어나 오늘날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다. 독일의 뒤셀도르프(Dusseldorf)공항은 1996년 화재사고 이후 1998년 다시 문을 열면서 새로운 공항 사인시스템과 함께 서체도 새롭게 개발하였다. 새로 고안된 서체는 유난히 긴 독일어 표기 때문에 가독성이 떨어지는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지정서체인 DIN체를 장체로 수정한 것이었다. 이후 다른 외국어와 조화를 이루는 균형 있는 사인시스템이 자리 잡게 되어 사용자에게 잘 읽히고 일관성 있는 안내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다.
다. 잘 읽히는 도시 브리스톨의 트렌지트, 영국
영국의 브리스틀은 ‘잘 읽히는 도시 브리스톨(Bristol Legible City)’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의 도시디자이너 공공디자이너들이 순례하는 도시가 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특징은 도시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새로운 서체와 색상을 개발하여 일관성 있게 적용한 점이다. 그 결과물인 ‘브리스톨 트랜지트(Bristol Transit)’는 독일 베를린의 인포메이션 시스템의 영향을 받은 서체로 속독과 오독 방지를 위한 무수한 사용성 테스트를 거쳐 공공장소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잘 읽히는 글꼴로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쉽게 인지할 수 있는 폰트의 사용은 동선의 흐름을 용이하게 하며, 정보의 전달이 효과적이며 이해가 쉽고 명료하여 위치파악이 쉽게 한다.
도시의 이미지를 담은 서체
도시의 수많은 공공정보에 적용된 일관된 서체는 도시경관에 시각적 즐거움과 함께 그 도시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부여하게 된다. 부분적인 요소로만 여겨졌던 서체를 종합적으로 운용할 때 효과적으로 도시 아이덴티티를 형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도시, 나아가 세계적인 국제 관광도시로서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가. 국제도시로서 조화의 의미를 담은 프루티거체와 헤이체, 홍콩
국제 비즈니스 도시이자 요리, 쇼핑, 문화, 관광지, 축제의 다양한 아이템을 보유한 세계적인 관광지 홍콩에서는 특수 행정지역의 전략적 커뮤니케이션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도시마케팅 전략에 따른 브랜딩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브랜드 홍콩’이라는 명칭의 이 프로젝트는 홍콩의 도시 이미지를 세계시장에 널리 알리기 위한 적극적인 프로모션이었다. 2003년 제정된 ‘Guideline for Hongkong City Brand Identity’에 따르면 역동성과 창조성을 강조한 심벌과 함께 도시 이미지에 적합한 서체를 지정 서체로 사용하여 도시 안내 사인과 웹 사이트 및 각종 브랜드 활용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홍콩의 영문 지정 서체는 ‘프루티거(Frutiger)’체로 현대적이고 심플한 도시이미지를 담고 있으며, 완벽한 균형미와 강한 콘트라스트로 전통적인 중국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또한, 중국어 타입페이스는 ‘헤이체(Hei)’라고 하는 활자체가 선정되었는데, 이는 안정적이고 균형적일 뿐만 아니라 영문 서체인 프루티거와 조화를 이루어 국제도시로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홍콩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나. 정통에서 모던으로의 변화 – 뉴 존스턴체
영국 런던 지하철에 사용되는 뉴 존스턴(New Johnstone) 서체는 존스턴 서체를 기반으로 약간의 수정을 거친 것으로 1916년 런던 운송국 디자인 통합 계획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다. ‘런던 언더그라운드(London Underground)’라는 이름으로 더욱 알려진 이 서체는 아이덴티티 구축을 위한 최초의 전용 서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뉴 존스턴체는 기하학적인 단순함을 기본으로 한 매우 견고한 인상을 주는 서체로 이전 빅토리아 시대까지 품격 있는 서체로 여겨지던 셰리프5) 서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1920년대 유행처럼 전개된 모던디자인 물결과 함께 런던의 대표적인 얼굴이 되었다. 이 서체는 지금도 지하철 노선도와 일반 정거장 표지, 각종 인쇄물에 두루 적용되어 있으며, 런던 언더그라운드와 함께 단순한 서체가 아닌 도시와 공존하는 상징이 되었다.
5) 셰리프란 문자 가로획의 시작이나 끝 부분에 붙어있는 장식을 말한다. 본래 셰리프의 기원은 로마 시대 석공들이 끌로 석판을 조각하며 낱자들을 나란히 정렬시키기 위해 획의 밑단 부분에 가는 실선을 조각한 것에서 유래한다. 현대서체에서는 세로 기둥과 줄기의 끝 부분에 맵시를 내거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붙인 획의 명칭으로 글자 사이에서 글자를 연결해 낱말을 만드는 것을 도우며, 동시에 글자 사이의 간격을 유지해 인식 가능성과 가독성을 높여준다. 셰리프가 없는 서체는 프랑스어로 ‘없다’는 뜻의 ‘Sans’를 붙여 산셰리프라고 한다.
다. 도시의 미래상을 담은 지정서체 – 요코하마
일본 요코하마시의 ‘미나토미라이 21: 21세기 항구도시의 미래’ 프로젝트는 일본 요코하마 시의 도시 만들기를 위한 단계별 계획으로 1983년에 수립되었다. 이 계획에서 요코하마시는 도시 디자인을 체계적으로 재정비하였고 비교적 이른 시점인 1989년에 디자인 도시를 선언했다. 1989년에 개최된 요코하마 박람회를 계기로 시설물을 활용한 미래형 도시지구를 형성하였고 외국인이 알기 쉬운 사인과 안내 체계를 구축하여 도시 이미지 개선에 성공하였다. 요코하마 시는 ‘고나’, ‘신고’, ‘나우’, ‘RF 중고딕’, ‘타이프뱅크고딕’체를 일문 지정 서체로 사용하고 있으며, 영문은 ‘헬베티카(Helvetica)’, 유니버스(Univers)’, ‘프루티거(Frutiger)’, 로티스(Rotis)’체를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 서체들은 기존 전통적인 일본 서체의 구조와 틀을 바탕으로 중성적이며 중립적이며, 거리 간 시각적 판별의 연구와 사인에서 효과적인 활용의 연구를 통해 효과적인 정보전달을 하고 있다.
서울시민의 감성을 담은 서울 서체
도시의 전용 고유서체는 그 도시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토대가 되며, 도시의 시각적 질서를 위한 기초이다. 또 대외적으로는 서체가 지닌 독창성과 고유성으로 차별화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도시디자인의 펀더멘탈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오랫동안 고유한 글꼴을 갖지 못했던 서울시도 서울의 시각 질서를 세우는 백년대계로 고유서체인 서울 서체를 개발하여 활용하고 있다. 서울 서체는 서울에 대한 인문·사회학적 고증을 바탕으로 디자인 방향을 결정한 후 시민의견 수렴 및 전문가의 수많은 테스트와 검수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서울 서체는 서체 개발 초기부터 시민에게 무료로 배포되어 사업자, 디자이너뿐 아니라 일반시민에게 이르기까지 폭넓게 애용되고 있다. 나아가 서울의 거리나 공공장소의 안내사인, 표지판, 간판은 물론 공문서나 홍보물 등의 다양한 매체에 일관된 질서와 아이덴티티를 부여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서울의 도시경관이 한층 쾌적하고 정온한 환경으로 거듭나고 서울이 가진 역사, 전통, 문화 등을 바탕으로 한 서울만의 고유인상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알려진 한글의 우수성과 섬세한 아름다움에 대한 자긍심도 높이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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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르쥬 장, 이종인 역, 문자의 역사, 시공사, 2007
– 조르쥬 장, 김형진 역, 기호의 언어, 시공사, 1997
권영걸 현재 서울대학교 디자인학부 교수, 서울대 미술관 관장.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 한국공공디자인학회장, 서울시 부시장 겸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을 지냈다. 『공간디자인 16강』, 『공공디자인행정론』, 『색채와 디자인비즈니스』 등 34권의 저서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