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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민준의 서(書) #5 캘리그래피에 사용한 판본체

    서예가 오민준의 캘리그래피 시론 ― 한글 서예 작품의 유형과 캘리그래피에 활용된 판본체


    글. 오민준

    발행일. 2013년 02월 28일

    오민준의 서(書) #5 캘리그래피에 사용한 판본체

    판본체는 서예뿐만 아니라 문자 디자인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글 최초의 문서, 언문, 소설, 서체 등 한글의 모든 시작을 알리는 문서 자료이기 때문이다. 판본체는 한글 창제 당시에 주로 쓰인 서체이지만, 이후 각광을 받지 못했다. 필사에 대한 어려움과 시대가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지 못해 아쉽게도 많은 곳에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궁녀를 중심으로 서사된 한글은 아름다움과 격을 중시하는 궁체와 서간문(편지글)의 형태가 주를 이루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판본체의 존재감이 낮아지게 되었다.

    근대에 와서도 그 흐름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손재형 선생을 비롯해 서희환 선생, 김충현 선생 등이 궁체 위주의 한글 서예에서 판본체의 예술성과 그 가치를 알리기 시작하면서 판본체에 대한 가치가 다시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판본체를 재해석하여 예술 작품으로 다양하게 쓰이고 있는데, 한문 전서와 예서의 필의를 활용하거나 다른 한글 서체와 혼용하기도 하는 등 서각, 전각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판본체가 활용되고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판본체를 활용한 한글 서예 작품의 유형과 캘리그래피에 활용된 판본체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판본체를 활용한 한글서예작품

    판본체 선구자의 작품

    판본체의 예술성과 서예적 가치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노력했던 선생들의 작품이다. 이들은 당대 한국 서단에서 상당한 영향력과 실력을 갖춘 분들로 한문과 한글 서예 모두 능필이다. 손재형 선생의 글씨는 판본체의 특징인 고른 굵기와 필획의 수직과 수평을 이루면서도 세로획에서 중간에 왼쪽으로 갑자기 꺾어 기울어지는 특징과 ‘서’의 ‘ㅅ’, ‘차’의 ‘ㅊ’은 흘림의 자형, 그리고 종성의 ‘ㅇ’은 작게 쓴 특징이 있다. 서희환 선생의 글씨는 세로획의 길이가 상당히 짧게 표현되었고, 흘림의 자형이 여러 곳에 보인다. 전체적인 느낌이 손재형 선생의 글씨와 유사한데 이것은 사제의 관계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인다. 하지만 손재형 선생보다 글자의 대소, 필획의 강약의 차가 크게 나타나 강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고전적 느낌보다는 상당히 현대적 자형을 취하고 있다. 김충현 선생의 글씨는 판본고체인 용비어천가와 유사한 자형을 보이지만 필획에서 다른 느낌이다. 한문 예서의 필획을 활용하여 단아하지만 필획의 다양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위의 세 선생은 후대의 판본체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 판본서체의 초석이 되고 있다.

    판본체의 선구자 작품

    현대 한글 서예가 판본체 작품

    현대 한글 서예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판본체 작품이다. 김정자 선생의 작품은 전체적인 글자의 폭을 일정하게 하면서 글자의 대소, 먹의 농담 차이를 두고 표현하였으며, 붓의 운필은 방필을 활용하여 강한 필획이 느껴지며, 작품의 구성은 한글 판본체의 전형이다. 조종숙 선생의 작품은 주제가 되는 내용은 강건한 판본체로 쓰고 그에 대한 내용은 단아하고 아름다운 궁체 흘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한글 서체를 혼용한 작품이다. 작품의 구성은 전체를 채우지 않고, 여백미를 살려 표현한 것으로 독특한 구성이다. 최민렬 선생의 작품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쓴 것으로 한문 예서와 신라 석비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필획을 구사하고 있다. 자간과 행간을 두지 않고 전체적으로 꽉 찬 느낌으로 글자의 대소, 먹의 농담 변화를 주어 표현한 작품으로 자형의 현대적 감각이 엿보인다.

    현대한글서예가 판본체 작품

    판본체를 응용한 현대 서예

    현대 서예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필자의 작품이다. 왼쪽의 작품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판본체로 하고, 그 안에 흘림을 섞어서 쓴 것으로 과감한 먹의 농담변화와 자형의 대소 차이를 크게 했으며 자간과 행간을 무시한 작품이다. 가운데 작품은 ‘우리 모두’를 쓴 것이 아니라 바탕을 먹으로 칠해 하얀색으로 쓴 것 같은 형태로 표현하고, 작은 글씨를 판본체의 자형과 흘림의 자형으로 각각 나누어 세로쓰기와 가로쓰기를 섞어서 쓴 것이다. 오른쪽 작품은 ‘얼’, ‘일어나라 대한민국’을 판본체의 자형을 활용하여 쓴 것으로 작품 구성의 재미가 있다. 현대 서예는 자형에 대한 이해와 과감한 필획, 다양한 작품 구성력이 필요하다. 고전 자료에 대한 분석과 연구는 다양한 자형 구성을 하게 되고, 거침없는 붓의 운필은 다양한 선의 변화로 감흥을 주는 작품이 된다.

    판본체를 응용한 현대서예

    판본체를 활용한 서각

    서각은 입체적인 자형 구성과 표면의 질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배영순 작가의 작품은 글자의 크기와 자간의 공간에서 자유로운 구성을 느낄 수 있으며, 표면의 무늬는 구름 운(雲)자를 상형문자로 표현하였다. 김재길 작가의 작품 ‘샘솟는 기쁨’은 일반적인 판본체의 자형으로 표현하고, ‘넘치는 사랑’은 판본체의 자형을 변형하여 표현하였다. 서각 작품이면서도 동판을 부식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덕희 작가의 작품은 흘림의 필선을 활용한 판본체이다. 오른쪽 부분의 바탕 표면에 입체감을 주어 질감적 느낌이 든다. 오규남 작가의 작품은 원필의 부드러운 판본체이며, 와당 문양 안에 한자 전서를 새겨 넣어 고전적 느낌을 주고 있으며, 표면에 나무의 질감을 표현하였다.

    판본체를 활용한 서각작품

    판본체가 주가 되는 전각자형

    전각은 한문 전서를 새긴 것이기 때문에 한글 전각에서는 한문 전서와 유사한 판본체가 주로 쓰이는 것이다. 왼쪽의 ‘대한민국’은 판본고체인 ‘용비어천가’의 자형으로 권창륜 선생이 새긴 옥새로 중후하고 단아하면서도 강건함을 느낄 수 있다. 다른 전각들은 필자가 새긴 것으로 판본체의 자형을 재구성하고 붓맛, 칼맛, 돌맛을 표현하고자 했다. 요즘은 전각을 활용한 캘리그래피도 많이 활용하고 있다.

    판본체가 주가 되는 전각자형

    캘리그래피에 나타난 판본체

    현판, CI

    ‘자유선진당’은 이일구 선생의 글씨로 필획이 간결하고 산뜻한 느낌의 판본체이다. 일반적으로 판본체는 질감적 느낌의 거친 글씨가 많은데, 정당의 신뢰 이미지를 생각하고 썼는지 맑고 청아한 느낌이 농후하다. ‘전북도립미술관’은 판본필사체의 글씨이다. 일반적으로 ‘판본체’라 하면 훈민정음 당시의 판본고체를 말한다. 육필서로서의 판본필사체는 쉽게 보기 어려운데, 여태명 선생은 ‘조웅전’을 비롯해 다수의 판본필사체 책을 출판하는 등 판본필사체를 캘리그래피와 서예 작품에서 많이 선보인 작가이다. ‘동대문구’는 강병인 선생의 글씨로 가장 큰 특징은 동대문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며, 판본체의 자형에 약간의 흘림을 주어 동적인 느낌이 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필자의 글씨로 우리나라의 끈끈한 정과 강건함이 표현되도록 판본체의 서체를 선택했으며 필선의 다양함을 꾀하였다.

    현판, CI판본체

    영화, 드라마, 포스터

    ‘맨발의 청춘’은 자유스런 손 글씨의 느낌이지만 판본체의 자형이고, ‘뿌리 깊은 나무’는 한글서예의 판본체 스타일로 안정적인 자형에 한문 예서의 필획으로 선의 변화가 보인다. ‘김광석 다시 부르기’는 판본체의 자형을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석’의 ‘ㅅ’은 궁체의 자형으로 점을 상당히 길게 한 특징이 있다. ‘왕의 남자’와 ‘경성스캔들’은 판본필사체의 자형으로 전체적으로 안정적이며 고풍스러운 느낌이 있다. ‘웰컴투 동막골’은 자유스런 글씨의 느낌이 강해 보이지만 기본 형태는 판본체이다. 선의 변화와 강약이 확연하게 드러난 글씨로 익살스러운 느낌이다.

    영화 드라마 포스터

    북 타이틀

    ‘한글 새소식’은 고전적인 느낌의 판본체이고, ‘토지’는 거침없는 붓터치에서 오는 강건함을 느낄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지’의 ‘ㅈ’의 아래 두 선이 너무 떨어져 가독성이 떨어진다. ‘길 잃은 나의 조국’은 선의 변화가 많고, ‘잃은 나의’의 네 글자를 한 글자의 크기로 쓴 재미있는 구성이다. ‘한국’은 다른 글씨에 비해 선의 변화가 적고 부드러운 느낌의 판본체이다. ‘민주’는 ‘ㅈ’의 왼쪽 아래 선을 길게 강조한 것과 ‘ㄴ’과 ‘ㅜ’의 가로획을 하나로 연결한 듯한 자형의 특징이 있다. ‘다석전기’는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돌에 새긴 글씨이다.

    북타이틀판본

    패키지

    ‘김치’, ‘김치찌개’, ‘황금’은 안정적인 판본체의 자형에 서예의 필선을 느낄 수 있다. ‘통새우’, ‘태양초’, ‘춘장’, ‘흑마늘’은 판본체의 자형을 활용한 글씨로 선의 굵기 변화에서 동적인 느낌이 든다. ‘흑마늘’의 ‘ㄹ’은 흘림의 자형을 취하고 있다. ‘오곡누룽지’는 판본체의 형태지만 자유스런 글씨로 선의 태세 차이가 상당히 크다.

    패키지 판본체

    주류

    ‘처음처럼’은 신영복 선생의 작품이 캘리그래피가 된 것으로 신영복 선생만의 독특한 필치를 느낄 수 있다. ‘참이슬’은 판본필사체로 선의 굵기가 일정하며 안정적인 자형을 취하고 있다. ‘예담’과 ‘명작’은 필선에서 느껴지는 깊이감이나 자형 구성이 좋다. ‘럼’, ‘담’, ‘명작’의 종성이 세로획의 중심에 쓰인 공통점이 있지만, 자형의 구성이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럼’은 초성 ‘ㄹ’이 종성 ‘ㅁ’과 같은 선상으로 ‘ㄹ’이 상대적으로 크게 쓰였고, ‘담’은 ‘ㄷ’과 ‘ㅁ’을 작게 써서 시원스런 공간감이 생겼으며, ‘명작’은 세로로 글씨가 긴 자형과 강한 필선을 보이고, ‘ㅏ’의 점을 긴 선으로 쓴 특징이 있다.

    주류 판본체

    판본체는 한글 서예 작품은 물론 캘리그래피에도 많은 곳에서 쓰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판본체는 점획의 굵기가 거의 일정하고, 필획의 가로획과 세로획은 수직과 수평을 이루며, 비교적 글자의 중심을 맞추려고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대 작품이나 캘리그래피에서는 판본체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점획의 태세, 자음과 모음의 대소, 서체의 혼용 등 과감한 변화를 주는 것도 있었다. 판본체는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큰 서체이다. 판본체 안에서의 변화는 물론 다른 서체와의 혼용은 또 다른 서체를 만들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판본체의 고전 자료와 캘리그래피의 사례들을 통해 다양한 자형 구성력과 자신감 있는 운필법으로 나만의 판본체를 만들 수 있다.

    오민준
    현재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에서 대학정통서예를 공부한 후 신고전주의 캘리그라피/서예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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