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한글의 창제 후 한글이 맞게 되는 위기 상황과 그것의 극복 그리고 현재 상황에 대해 논의해 보기로 한다. 모든 존재는 생겨나면서부터 다른 존재와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해야 하고,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그 생존 영역 내지는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해 다른 존재와 처절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 그러한 경쟁이나 투쟁을 하는 동안 하나의 존재는 때로는 위축되기도 하고, 때로는 생존 자체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게 된다. 어떤 존재이든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생존 영역이 위축하거나 소멸하기 마련이고, 그러한 위기를 제대로 극복하면 그 세력을 넓게 펼쳐 융성의 기회를 맞기도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원리는 한글의 탄생 후 지금까지의 존재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한글의 위기
가. 탄생과 관련한 제1차 위기(한글의 창제)
새로운 문자인 한글은 창제 당시부터 분란의 과제였다. 당시 한문을 익힌 사대부들에게는 문자생활에 지장이 없었고, 국가적으로는 명나라에 대해 사대주의를 내걸었기 때문에 한문에 의한 문자생활에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고, 명에 대한 사대주의에 흠이 될 수 있는 새로운 문자의 창제는 기존의 기성세대에게는 그 가치관을 완전히 뒤엎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문자는 그 문자로 작성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문자를 익혀 정신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가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집현전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최만리와 그를 따르는 선비들의 속칭 ‘최만리 반대 상소문’에 잘 나타나 있다.
무릇 사공(事功)을 세움에는 가깝고 빠른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사온데, 국가가 근래에 조치하는 것이 모두 빨리 이루는 것을 힘쓰니, 두렵건대, 정치하는 체제가 아닌가 하옵니다. 만일에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百僚)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先甲) 후경(後庚)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帝王)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세(百世)라도 성인(聖人)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지도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인으로 하여금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韻書)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附會)하여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 각본(刻本)하여서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천하 후세의 공의(公議)에 어떠하겠습니까.
언문 즉 훈민정음은 필요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역사에 누를 끼치는 존재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나. 확산과 관련한 제2차 위기(연산군의 탄압)
한글을 창제하여 궁 안에서부터 그 사용이 조금씩 확산해 가는 도중에 엄청난 위기 상황을 맞게 되는데 그것은 연산군에 의해서였다. 연산군의 재위 시절 그의 외척 신수영이 연산군에게 한글로 작성한 투서 석 장을 보고했다. 그 글 석 장이 다 언문으로 쓰였으나 인명은 다 한자로 쓰였으며, 첫 표면에는 무명장(無名狀)이라 쓰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임금이 신하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니 권좌가 오래가지 못하리라
(2) 임금이 여자를 가리지 않고 색을 밝혀 기강을 바로잡을 수 없도록 무도하다
(3) 극악무도한 이 임금의 대가 언제나 바뀔까
이에 발끈한 연산군은 도성 문부터 닫아걸었다. 성벽 위에도 내관과 군사를 세워 사람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검문검색을 하였는데 주모자를 찾지 못하였다. 그 후에도 몇 차례 닦달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 색출에 실패하자 연산 10년 7월 20일에는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지금부터는 한글(언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라. 또 이미 배운자는 그것을 행하거나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한글을 아는 모든 자는 한성5부(漢城五部) (가) 적고(摘告)할 것을 명한다. 그것을 알면서 고지하지 않는 자는 그 이웃과 같이 벌한다.(今後諺文勿敎勿學 已學者亦令不得行用。 凡知諺文者 令漢城五部 摘告。 其知而不告者, 幷隣人罪之 – 연산군일기 54권 31쪽 상)”
“언문을 알고 쓸 수 있는 자는 모두 글을 쓰게 하여 모두 그 필적을 대조하라.(且諺文者 摘發 令一一書之 與封下書 憑考 – 연산군일기 54권 31쪽 하)”
당시 연산군이 내린 명령은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는데,
㉠ 한글 학습 및 사용 금지 ㉡ 한글 해독자 고발 ㉢ 한글 문헌 소각 ㉣ 한글 필체 대조
이러한 연산군의 탄압 조치는 이제 막 그 세력을 확산해 가는 훈민정음의 보급 및 확산에 결정적인 찬물을 끼얹게 되는 것이었다.
다. 생사와 관련한 제3차 위기(일제의 말살 정책)
조선(대한제국)을 강제로 점령한 일본은 초기에는 조선어와 조선어 표기를 위한 정비 사업을 하는 등 구한말에 했던 문자 정책을 이어가다가 후반기에 오면서 조선어와 조선 민족의 말살 정책을 펼치게 된다. 성을 새로 만들고 이름을 고치고(창씨개명), 조선어(한국어)는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등 한국어 말살 정책을 펼치게 된다. 조선말과 조선글의 말살을 위해 일본이 펼친 정책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조선어(한글) 교육 및 사용 금지
2. 한글로 된 신문 및 잡지 폐간 – 조선일보, 동아일보 폐간
3. 조선어학자 박해 – 조선어학회 사건
4. 황국신민서사 암송 강요 및 신사참배 강요
5. 창씨개명(일본식 이름을 쓰도록 함)
6.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 세뇌(일본과 조선은 같다, 일본과 조선의 조상은 같다는 의식 강요)
일제는 지구상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타민족에 대한 세뇌 작용, 그리고 모국어 사용의 금지 및 한글 학습 및 사용의 금지 조치를 시행하는 것이다.
위기의 극복
가. 백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기존의 문자를 사용하고 중국의 문물에 대해 가치관을 보유하고자 했던 최만리 등은 보수주의자에 속하고,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새롭게 문자생활을 하고자 했던 세종은 혁신주의자에 속한다. 혁신주의가 당시에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세종의 애민정신이었다. 세종의 애민정신은 잘 알다시피, 훈민정음 예의에 잘 나타나 있는데, 예의에 나타나는 ‘백성들을 편하게 하려고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이 취지는 누구도 거역할 수 없었다.
나. 실용적인 효용성 때문에
한글을 금지했던 연산군의 정책을 넘어 한글이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은 한글이 배우기 쉽고 사용하기 쉬워서 한자와 관련한 문자생활에서도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한자학습서인 천자문과 유합이 이미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들 한자학습서는 한자를 익히기 위해서는 한글을 먼저 익히게 하였고, 그 유명한 훈몽자회 역시 한자를 익히기 위해서는 한글을 먼저 익히게 하였다. 게다가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사서삼경을 반드시 익혀야 했는데, 사서삼경의 번역 작업이 선조 대에 와서 완성되므로, 사대부들이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한글로 된 번역본 사서삼경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쉽게 익혀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이 효용성은 자연스럽게 한글이 조선인 일반 언중 속으로 퍼져 나가게 했다.
다. 민족을 지키기 위한 저항정신 때문에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주시경(周時經)을 중심으로 한글 연구가 확대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서는 민족의 혼을 지켜야 한다는 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하면서, 1921년 12월에는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여 한글 연구를 꾸준히 해나갔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고, 사전 편찬을 위한 연구로 〈한글맞춤법통일안〉, 〈표준어사정〉, 〈외래어표기〉 등 국어의 제반 규칙을 연구 정리하였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바로 민족정신을 유지하고 보급하는 교육 운동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의 우리말 연구는 우리 민족의 정신과 언어를 지켜가는 운동과 맥을 같이했기 때문에 일제강점 말기에 들어서면 우리말 연구자를 탄압하고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 펼쳐진다.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하고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회원을,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회원들을 검거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 구금령(拘禁令)’을 공표하여 민족운동이나 민족계몽운동을 하는 한국인을 마음대로 구속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2년 10월부터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맞서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던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일제가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했다.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었고, 이들은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의 혐의를 받았다. 그리고 재판에 회부되어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월 등 많은 사람이 징역을 선고받았지만, 한 사람도 민족을 배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고, 우리말과 글의 유지가 조선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라는 것을 견지하였다. 민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사수하는 조상들의 민족정신은 어떤 외세도 굴복시킬 수 없었다.
세계 속의 한글로 성장
1945년 해방 후 우리 민족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세계적인 무대에 한국어와 한글이 소개되는 초기 당시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I. J. Gelb(1952)의 에 의해, 한글은 매우 특이하고 알 수 없는 문자의 예로 아프리카의 몇몇 문자와 함께 괄호 속에서 소개됐다. 하지만 G. Sampson(1985)의 에서는 120쪽에서 144쪽까지 제7장이라는 독립된 장에 자질체계 문자(A featural system)라는 제목으로 한글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저자는 ‘한글이라는 문자는 체계적인 내적 구조를 되어 있는데, 그것은 음소를 구성하는 음성적인 자질과 상관관계에 있다.’고 하고, ‘한글은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이 이룩한 위대한 지적 성취물의 하나로 등재되어야 한다.’고 하고 있다.
이러한 한글의 우수성과 그 창제자인 세종의 공로가 세계적으로 알려져 유네스코에서는 1990년부터 문맹 퇴치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상의 이름을 ‘세종대왕상’이라 하여 수상하고 있다. 그리고 유네스코에서는 고문서 등 세계의 진귀한 문서들을 선정하여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는데, 문자에 관한 것으로는 유일하게 훈민정음이 1997년에 지정되었다. 이로 때문에 훈민정음은 우리 민족의 보물을 넘어서서 인류 모두의 소유물이고 동시에 미래 세대에 전수되어야 할 가치물로 인정된 것이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한글은 이제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 10위권 내외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국어와 한글은 세계 곳곳으로 확산하고 있는데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세종학당의 확산이다. 세종학당은 2007년 시작할 당시 3개국(미국, 중국, 몽골) 13개소로 시작하여 2013년 12월 현재 불과 몇 년 사이에 52개국 120개소로 늘어났다.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오세아니아를 넘어 아프리카에는 5개국에 5개의 세종학당이 설립된 것이다. 이러한 열기는 세계 여러 나라의 현지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열의로도 알 수 있다. 중국을 예로 들면 1990년대 초반 한국이 중국과 수교할 당시에 한국어 교육을 수행하는 현지 대학교는 4개 내지는 5개밖에 되지 않았지만, 2013년 현재 중국의 북부(동북 3성)를 넘어 중부와 남부 그리고 해안가인 동부와 내륙인 서부를 가리지 않고 한국어 교육의 열기가 확산하여 대략 200개 내외의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어와 한글, 이제 세계무대로 힘차게 뻗어 나가고 있는 도중이다.
박창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어학을 연구하고 교육하고 있으며,
한국어세계화재단 운영이사, 국립국어원 어문규범연구부장을 지냈다.
〈훈민정음〉, 〈중세국어자음연구〉 등 100편 내외의 연구업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