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두 양상. 인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대체로 이분법적으로 인식한다. 영혼과 육체, 내용과 형식, 양과 질, 음과 양 등 이분법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존재의 실체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인간이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 역시 소리와 의미라는 두 면을 가지고 있고, 소리 역시 ‘본래의 소리’와 ‘변화된 소리’의 두 면을 가지고 있다. ‘값’이라는 본래의 소리와 사용 환경에 따라 발음이 달리 되는 소리 ‘값(값이), 갑(값도), 감만(값만)’이라는 두 면을 가지고 있다.
소리와 문자의 조화
한글맞춤법 총칙 제1항 ‘한글맞춤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한다.’에서 ‘소리대로’ 적는다는 것은 한국인이 내는 소리를 한글이라는 문자로 표기할 경우에는 ‘소리가 존재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표기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문자로 표기하는 것이 존재하고 있는 소리를 있는 그대로 표기한다는 원칙을 천명한 것이고, 이 뜻은 문자의 표기와 소리의 존재가 조화를 이루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청각적인 소리를 시각적인 문자로 표기할 경우에는 ‘본래의 소리’대로 표기할 수도 있고, ‘변화된 소리’를 변화한 대로 표기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예를 들었던 ‘값’의 경우 ‘값이, 값도, 값만’으로 표기할 수도 있고, ‘갑씨, 갑도, 감만’으로 표기할 수도 있다. 다른 예를 들어 ‘돕-‘이 활용하는 경우 ‘돕고, 돕지, 돕아, 돕으면’으로 표기할 수도 있고, ‘돕고, 돕지, 도와, 도우면’으로 표기할 수도 있다. 이 중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어법에 맞게’이다. ‘어법에 맞게’라는 개념은 본래의 소리대로 표기할 것은 본래의 소리대로 하고,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할 것은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는데 그 기준이 어법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표기법의 두 원리
언어가 음성 형식과 의미 내용의 복합체라면, 언어를 문자로 표기하는 방법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음성 형식 위주로 표기할 것이냐 아니면 의미 내용 위주로 표기할 것이냐 하는 것이 그것인데, 우리 문자의 경우 기본적으로 한 음성에 하나의 문자가 대응하게끔 표기하는 음소적 표기와 형태소의 기본형을 밝혀 표기하는 형태소적 표기로 구분될 수 있다. 흔히 전자를 표음주의적 표기라 하고 후자를 표의주의적 표기라 한다.
언어(음운규칙)와 문자의 조화
/값만/이라는 음소들의 연결을 한국인이 발음할 때 [값만]이라고 발음하거나 [갑만]이라고 발음하는 한국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도움]이라고 발음하는 형태소 ‘돕-‘과 ‘-음’의 연결을 ‘돕음’이라고 표기했을 경우 한국인은 철자를 의식하여 [도븜/도붐]이라고 발음하거나 혹은 실제 단어의 뜻을 고려하여 [도움]이라고 발음할 것이다.1) 전자는 한국어의 음운규칙으로 당연히 예견될 수 있고, 그래서 달리 발음될 가능성이 없어서 발음이 혼란될 위험이 없기 때문에 그 기본형을 밝혀 적은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모음과 모음 사이에 ‘ㅂ’은 얼마든지 발음될 수 있기 때문에(예: 잡음, 접음 등) 공시적인 음운규칙으로 예견될 수 없다.(한글맞춤법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원칙에 따랐기 때문에 그러한 예는 많다.)
공시적인 음운규칙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형태소적 표기를 하고, 공시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음소적 표기를 함으로써, 언어에 내재되어 있는 규칙과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의 표기방법을 조화시키고자 한 것이 현행 한글맞춤법의 기본정신이 된다. 음소적 표기는 발음하는 대로 즉 표면 구조를 표기하는 것이고, 형태소적 표기가 기본형 내지는 기저형을 즉 기저구조를 표기에 반영하는 것이라면, 두 원칙은 상반된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그러면 무엇을 원칙으로 삼고 무엇을 예외로 인정할 것인가.
1) ‘잇어지는’과 ‘듣어라’도 같을 것이다. 철자식 발음을 하여 [이서지는], [드더라]으로 발음하거나, 문맥상의 의미를 고려하여 [이어지는][드러라]로 조음할 것이다.
상반된 원칙의 균형
음소적 표기가 그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고, 형태소적 표기 역시 그 나름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면, 개별 사항의 표기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결정할 사항이 될 것이다. 그런데 현행 한글맞춤법에서는 두 원칙의 균형을 고려하여 안배한 흔적이 역력하다. 총론에서는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으로 규정하고, 각론에서는 ‘어법에 맞추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소리대로를 예외로’ 인정하고 있다. 두 원칙은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한쪽의 우위는 다른 쪽의 위축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어서 이들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때로는 음소적 표기를 하고 때로는 형태소적 표기를 한다는 것은 상반된 원칙을 적절히 혼용하는 것인데, 이것은 언어 현실과의 조화를 꾀하고자 한 것이고, 또한 상반된 규칙이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경쟁적 발전 내지는 논쟁점의 끊임없는 발아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상반된 두 원칙이 그 지향하는 바가 상반된다고 하여 모든 경우를 다 포괄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냇가’, ‘못하다’ 등의 표기는 음소적 표기인가, 아니면 형태소적 표기인가. 이들은 현대의 공시적인 상태에서 볼 때 ‘ㅅ’으로 표기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여 다른 문자로 표기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다. 이들을 ‘ㅅ’으로 표기한 것은 이전부터 해 오던 관습을 존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전의 관습적인 표기를 그대로 따르는 것을 역사주의적 표기라고 하는데, 한글 맞춤법에는 형태소적 표기와 음소적 표기 외에 역사주의적 표기를 채택하여 세 원칙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고 있다.
마무리하는 말
한글맞춤법에 내재된 원칙은 언어 현실과 표기의 부조화를 최대한 줄이고, 역사적으로 해 왔던 관습까지 존중하여, 언어와 표기 그리고 관습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행 한글 맞춤법의 정신이고, 이것이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정신문화이자 전통이다.
여기에 하나 덧붙일 사항이 있다. [일찌기]라는 발음하는 우리말을 ‘일찍이’라고 표기할 것이냐 아니면 ‘일찌기’라고 표기할 것인가. 어느 쪽으로 하든 그 나름의 논리를 세울 수 있겠지만, 그 결정 과정에서 고려할 첫 번째 사항은 언어현실(그것이 기저형이든 표면형이든)과 조화를 꾀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이 조화에 어긋나지 않는 한 상반된 두 원칙이 서로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선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글맞춤법을 사정할 당시의 사람들이 그때의 상황에 맞추어서 결정할 일일 것인데, 조화 속에서의 균형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박창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국어학을 연구하고 교육하고 있으며,
한국어세계화재단 운영이사, 국립국어원 어문규범연구부장을 지냈다.
〈훈민정음〉, 〈중세국어자음연구〉 등 100편 내외의 연구업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