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한글 사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짐에 따라 한글 서체도 다양하게 변화되었다. 판본고체를 시작으로 판본필사체, 궁체, 민체에 이르기까지 한글 서체는 발달하였고 실용의 목적에서 이제는 예술적인 변모로 이르게 되었으며 현재는 한글의 우수성과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다양한 장르에서 한글 서체가 활용되고 있다.
한글 서체의 꽃이라 불리는 궁체는 단정하고 간결하여 정적인 느낌인 정자체와 리듬감과 유려함이 있는 동적인 흘림체로 나누어진다. 흘림체는 다시 반흘림과 진흘림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반흘림은 한자의 행서, 진흘림은 초서에 해당하는 서체로 반흘림에는 정자의 자형을 곁들여 쓸 수 있으며, 진흘림에는 반흘림을 함께 써서 획의 굵기나 방향에 많은 변화를 줄 수 있다. 반흘림에서는 정자체의 자음보다 많이 흘려 모음과 연결되는 선이 많으며 운필의 속도에서 오는 리듬감으로 율동감이 느껴진다. 주로 소설, 가사, 사기 등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대표적인 글씨로는 <옥원듕회연>, <낙성비룡>, <후슈호전>, <옥누연가> 등이 있다.
진흘림은 글씨를 쓰는 사람의 감정과 개성이 잘 나타나며, 오랜 기간 숙련된 필체를 요구한다. 한자의 행·초서에서와 같이 획의 태세, 글자의 대소, 강약 등의 변화를 줌으로써 글자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자·모음을 따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연결하여 구성한 것으로 물이 흘러가듯 거침이 없고 자유분방하게 쓰인 서체이다. 대표적인 글씨로는 왕이나 비, 빈 등의 명에 의해 서사상궁들이 대필한 봉서 등에서 다양하게 볼 수 있다.
흘림의 비슷한 형태에 따른 오자의 위험성
서체는 서로의 약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 서체에 대한 이해와 정확한 자형과 운필을 구사하지 않으면 잘못된 글자를 쓰게 된다. 캘리그래피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흘림체는 자칫 오자의 위험성이 크며 정확한 흘림에 대한 자형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중에서도 형태가 비슷해서 가장 틀리기 쉬운 흘림 자음이 있는데, 초성에 쓰이는 ‘ㄷ’, ‘ㄹ’, ‘ㅌ’, ‘ㅍ’이 그렇다. <표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반인들은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그 특징들을 살펴보면 ‘ㄷ’은 처음 시작을 가로점을 찍듯이 하여 다음 선과 연결되어야 하고, ‘ㅌ’은 짧은 가로획을 점을 찍듯 긋고 다음 선과 연결선이 없도록 한다. 다음 선과 연결되는 선이 그어지면 ‘ㅍ’의 형태가 된다. ‘ㄹ’과 ‘ㅍ’의 경우는 형태가 거의 흡사하기 때문에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다. ‘ㄹ’은 처음 시작 부분을 궁체정자 ‘ㅜ, ㅠ, ㅡ’에 오는 초성 ‘ㄱ’처럼 하고, ‘ㅍ’은 가로획을 점을 찍듯 하고 다음 선과 연결하여 쓴다.
그밖에 다른 자음에서도 모음과 연결되는 부분에서 오자의 소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와 더불어 정확한 흘림 자형에 대한 숙지가 필요하겠다.
캘리그래피에서 흘림의 형태로 쓰인 사례 중에 오자의 위험성이 큰 것들은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필선이 아름답고 전체적인 구성과 자형의 형태가 좋은 우리은행의 CI를 살펴본다. 우리은행의 CI ‘우리나라’를 보면, ‘ㄹ’의 형태는 오자의 소지가 크다. 훈민정음 한글 기본자음은 ‘ㄱ’, ‘ㄴ’, ‘ㅁ’, ‘ㅅ’, ‘ㅇ’ 오음으로 되어 있다. ‘ㄹ’의 경우는 기본자음 ‘ㄴ’의 이체 글자로 그 구성을 보면 ‘ㄱ’과 ‘ㄷ’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아래 <표3>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우리은행 CI ‘우리나라’의 ‘리’ 자와 ‘라’ 자의 ‘ㄹ’은 ‘コ’과 ‘ㄴ’의 결합 형태로 보인다. 문제는 ‘ㄱ’과 ‘ㄷ’의 구분이 묘연하기 때문이며 오히려 ‘ㅋ’에 가깝게 보인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에 쉽게 ‘우리나라’라는 글씨로 읽히지만 좀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기존의 우리은행 CI ‘우리나라’를 교정해 보았다. 미묘한 차이라서 크게 보이지 않을지는 모르겠으나 앞서 말한 ‘ㄹ’의 자음을 ‘ㄱ’과 ‘ㄷ’으로 나누어지게 교정했다. 흘림체뿐만 아니라 모든 글씨에서 그냥 지나칠 수 있는 1㎜~2㎜의 차이지만, 그것이 글씨의 흐름과 분위기를 바꾼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며, 더군다나 흘림의 경우는 그 차이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오자의 소지로 보일 수도 있다.
궁체흘림 고전자료
낙셩비룡(洛城飛龍)
조선 시대 후기에 창작소설을 한글 궁체흘림으로 필사하여 2권 2책 129장으로 구성된 필사본이다. 내용은 고아로 자란 주인공 이경모가 일약 영웅, 승상이 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영웅담을 엮은 것으로 다른 고전소설 <소대성전>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낙셩비룡>은 다른 한글 필사본에 비해 대체로 큰 글씨로 쓰였으며, 행간을 알맞게 구성하여 전체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안정된 운필에서 선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자음과 모음 간의 조화, 글자 간의 대소, 결구가 잘된 글씨로 한글 궁체흘림의 교본으로 많이 쓰이고 있는 글씨이다.
옥원듕회연(玉鴛重會緣) <옥원듕회연>은 작자 미상의 한글 창작 소설로 <옥원재합기연>의 이본이다. 21권 21책으로 한글 궁체로 쓰인 책 중의 제11권에 해당한다. <옥원듕회연>은 권 종류에 따라 궁체 정자, 흘림 등 서체를 달리하여 쓰였다. 이 책은 궁체 흘림으로 쓰인 것임에도 단아한 느낌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느낄 정도로 맑은 필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궁체 정자와 더불어 궁체 흘림도 한글 궁체 교본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옥누연가(玉樓宴歌)
조선 말기에 필사된 연대, 작가 미상의 가사이며, 27면 1권으로 구성된 책이다. 한국과 중국의 역대 제후(帝侯), 장상(將相), 문무(文武), 시객(詩客), 기류(妓流), 서화(書畵), 예악(禮樂), 군법(軍法), 선은(仙隱) 등에 이르는 고사를 열거하여 태평연월에 성은(聖恩)을 구가한 내용이다. 고사성어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 책으로 <교주가곡집(校註歌曲集)>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본(異本)으로 <옥루연기(玉樓宴記)>가 있다. <옥누연가>는 서사상궁이 궁체 흘림으로 쓴 글씨로 결구와 자형 구성이 탄탄하여 잘 정돈된 단아한 느낌이며 필치가 좋고, 운필에서 힘찬 필선을 느낄 수 있으며, 간혹 두 글자를 연결하여 쓴 부분도 보인다. 일반적으로 한 면에 구성하지만 <옥누연가>는 2단으로 구성된 특징이 있다.
후슈호젼(後水滸傳)
이 한글 필사본은 <수호전(水滸傳)> 속서 가운데 하나로 명말청초에 지은 영웅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모두 12권 12책으로 정확한 필사연대나 필사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른 소설류의 필사본보다 글자가 작게 쓰였지만 자형과 결구가 좋고, 필선이 부드럽고, 필치가 유려하다. 글자를 연결하여 쓴 부분이 보이며 자간을 붙여 써 정갈하면서 행간이 뚜렷이 구분되어 시원스럽다.
옥호빙심(玉壺冰心)
조선 후기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로 4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은 명나라 태조 말에서 성종 즉위 초까지를 배경으로 하여 재자(才子)인 사강백이 기옥호, 해빙심 두 가인(佳人)과 결연하게 되는 과정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다.
궁체흘림의 필사본을 보면 보통 두 글자를 연결하여 쓰지만, 세 글자를 연결하여 쓴 부분이 많이 보이며 글자를 연결하여 쓴 부분이 다른 소설에 비해 많아 흘림의 느낌이 농후하다. 필선에서 강한 자신감이 보이며 이미 자신만의 서체를 이룬 것으로 생각되고, 다른 궁체 흘림의 글씨에 비해 상당히 강한 필선을 사용하여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신정왕후 조대비 언간
순조의 장남인 익종의 비 신정왕후가 생질부인 정경부인 연안김씨에게 답서한 편지글이다. 전체적으로 안정된 구성과 부드러운 필선에서 편안한 느낌이 들며, 정확한 자·모음의 운필에서 아름다움과 유려함을 느낄 수 있으며, 연결선을 길게 또는 짧게 하여 시원스런 느낌과 두 글자를 마치 한 글자처럼 쓴 부분도 보인다.
명성왕후 홍씨 언간
헌종의 계비 명헌왕후 홍씨가 시고모인 덕온공주의 제삿날에 내종동서 정경부인 김씨에게 보낸 편지글로 서사상궁이 대필한 것이다. 정확한 운필에서 필선에 대한 자신감이 엿보이며 연결선을 확실하게 써 시원스런 느낌이 든다. 전체적으로 힘찬 기운을 느낄 수 있고, 봉서의 멋을 한껏 표현한 글씨이다.
서기이씨의 봉서
서기이씨의 봉서체로 서기이씨는 조선 오백 년에 제일가는 국문명필이라고 했다. 안정된 운필에서 자신감이 넘치는 필선은 진흘림의 느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글씨이다. 마치 새가 춤을 추는 듯하며, 새의 날갯짓처럼 시원스런 느낌이다. 글자와 글자의 연결선과 점 획의 대소, 태세 등 어느 하나 소홀함이 없이 표현된 최고의 글씨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민준
현재 한국캘리그라피디자인협회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에서 대학정통서예를 공부한 후 신고전주의 캘리그라피/서예작가로 활동하고 있다.